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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5화 (15/303)

15화

* * *

그렇게 본격적으로 지온이 활동하기 시작한 지 며칠.

실비아를 돌보고 그녀와 놀아주는 건 로빈의 몫이 되었다. 아무리 로빈이 뻔뻔해도 다섯 살 아이를 혼자 놔두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지온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는 건 조금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지온 정도의 직원을 위해 이 정도 복지쯤이야.

로빈은 자신이 헬 조선의 사장들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자부하며 실비아를 돌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로빈이 그렇게 실비아를 만나러 온종일 집을 비우자 이상하게 여긴 로빈의 가족들이 그에게 캐물어 실바아의 사정을 대충 알게 되었고, 오늘 그녀를 영주 저로 데려오라는 명을 내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슨 이상한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오늘 하루는 자신의 집에서 보내자는 말에 잔뜩 긴장한 실비아의 모습을 보니 로빈도 왠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게 실비아를 대동해 영주 저로 돌아왔는데 역시 그냥 평범한 하루가 되지는 않으려는지 현관 앞에 왠지 좀 익숙한 한 소년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로빈을 발견하자 급히 달려와 바닥에 꿇어앉았다. 로빈 입장에서는 상대가 누군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번개같이 달려와 무릎을 꿇으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도련님! 거두어주십시오! 이 목숨 다할 때까지 도련님을 섬기겠습니다!”

소년이 이렇게 외치고 나서야 로빈은 상대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노파의 손자, 듀발. 책임감 있고 용감한 소년 듀발이었다. 아마 루이가 전해준 약을 먹고 낫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모양인데 정말 5G급 반응 속도였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아니, 바치지 마. 사양할게.

이제 겨우 여덟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건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이름: 듀발

성향: 보은. 의리

타이틀: 없음

아무런 재능도 개화하지 못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로빈도 타이틀의 정체를 모두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다섯 살이 되어 자신의 재능을 깨달을 때, 혹은 훗날 노력으로 어떤 분야에 정통할 때 타이틀이 추가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니 저 소년이 훗날 어떻게 성장할지는 몰라도 당장 무슨 재능이 있는 건 아니란 뜻이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거고.

하지만 저 소년이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거둬 달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마을에서 건강하고 평범하게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로빈이 이 아이를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밖의 소란을 눈치챘는지 가족들까지 모두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아이의 모습과 당황하는 로빈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의문에 찬 눈으로 로빈을 바라보았다.

왠지 일이 쓸데없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빈에게 당장 거두어주라고 채근했다.

“괜찮은 아이구나. 그러고 보니 로빈도 시동을 거둘 때가 되긴 했지. 내가 폴을 만난 것도 이때쯤이었던가…….”

아니, 할아버지. 폴 경이랑은 전혀 달라요. 폴 경은 대놓고 재능충이잖습니까? 얘도 물론 긁지 않은 복권이긴 한데, 꽝에 가까운 놈이라고요.

할아버지나 저처럼요.

그리고 지금 관저 집무실에 계실 시간 아닌가요? 왜 아직 집에 계세요?

“그렇군요. 이곳까지 찾아온 성의가 갸륵하니 역시 받아주는 게…….”

아니, 아버지. 사람 하나 거두는 게 얼마나 성가신데요. 그렇게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씀하십니까?

“어마~ 좋은 녀석이잖니! 로빈, 이 엄마는 마음에 드는구나.”

어머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나요?

“확실히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동무랑 시동이 훗날까지 같이 가는 거죠. 성품만 좋으면 능력은 어떻게든 가르치면 되는 거니…….”

작은어머니, 능력은 가르치면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타고나는 거라니까요.

가족들이 한마디 할 때마다 반론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리고 가족들의 분위기를 보니 자신이 저 녀석을 무조건 거둬야 하는 모양이었다.

로빈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손을 내밀어 듀발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좋아. 앞으로 널 시동으로 삼을게.”

로빈의 허락이 떨어지자 듀발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누를 끼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끙…….”

여덟 살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조숙한 녀석이었다. 홀로 남겨진 할머니를 모시고 골목에서도 대장 격이라더니 철이 빠르게 든 모양이었다.

로빈은 적어도 배신을 할 녀석으로는 안 보이니 적당히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 구실만 하게 해줘야겠다며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카인은 로빈과 듀발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듀발을 불러 세웠다.

“듀발이라고 했니? 넌 당장 가서 할머니부터 모시고 오너라. 너랑 할머니 모두 영주 저에서 생활하도록 해.”

“아… 정말… 감사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할머니까지 모시고 오라는 카인의 이야기에 듀발의 얼굴에는 감동이 가득했다. 그리고 카인은 듀발이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나려 하자 마차까지 하나 붙여주었다.

그렇게 듀발이 떠나고 카인은 웃으면서 로빈을 바라보았다.

“원래 사람을 거둘 때는 정성을 아끼면 안 되는 거야. 뼛속까지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지. 특히 어려울 때 베푼 것은 작은 것도 기억 속에 깊게 남는 법이거든.”

로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너무 경황이 없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럴 때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또 영주다웠다. 다만 켄트같이 정성을 다해도 처음부터 쓰레기인 녀석이 있다는 걸 모르시는 거 같아 조금 안타깝긴 했다.

나중에 켄트의 배신을 알고 큰 상처를 받지는 않으셨으면 좋으련만.

“그러고 보니……. 옆에 작은 숙녀가.”

폭풍같이 등장해 큰 충격을 주고 신속하게 빠진 듀발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가족들은 이제야 실비아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실비아 루페시라고 합니다.”

“어머~ 귀여워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마리아나가 실비아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나머지 식구들도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심지어 카인마저도.

아니, 할아버지는 진짜 출근(?) 안 하세요?

정원으로 실비아를 안내한 가족들은 부끄러워하는 실비아의 모습이 귀여운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와… 원래 저 나이 때는 저게 맞죠?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엽네요.”

“그러게. 우리 로빈은 좀 지나치게 성숙하지?”

“영리해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서운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예전에는 귀여운 소리도 하고 재롱도 곧잘 부렸는데, 다섯 살이 된 이후에는 그런 것도 없으니…….”

“그러게요. 세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만약 그 비교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면 로빈도 편하게 그 모습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아니, 언제는 영리하고 조숙해서 좋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신다. 게다가 아버지, 제가 네 살까지는 재롱도 많이 떨어 드렸잖아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억울한 일이 많은지 로빈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럴 바에는 차라리 실비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어떨까요?”

“로빈이 맨날 실비를 보러 가느니 차라리 실비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좋죠.”

“듣자 하니 아이 아버지는 온종일 일을 한다지?”

실비아가 어느새 실비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으니 참 빠르기도 하다.

하지만 로빈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지온이 영지의 재무관으로 일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실비아를 직접 돌보기는 힘들어질 테니 말이다.

게다가 될성부른 떡잎인 실비아의 자발적인 충성을 기대하기 좋은 환경이 아닌가.

“그래도 그렇게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지온의 의견도 중요하니 지온의 말부터 들어봐야 할 거 같네요.”

로빈은 선택권을 지온에게 넘겼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실비아와 지온의 생각이었으니까. 상대가 원하지 않는 친절은 그저 강요와 자기만족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온은 흔쾌히 실비아가 영주 저에 기거하는 것을 허락했다. 자신까지 실비아와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왠지 살짝 당황한 것 같지만.

아마 지온도 자신이 정식으로 일하게 되면 실비아를 쉽게 돌볼 수 없다는 걸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지온은 자상해 보이는 마리아나와 세릴의 모습에 크게 만족한 듯 실비아를 잘 부탁드린다고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아마 딸아이를 맡기기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카인은 실비아의 아버지라는 이야기에 지온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의 경력을 전해 듣고 차기 재무관감으로 어떤지 마음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로빈은 카인이 미리 지온을 알게 된 것이 차라리 잘됐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 * *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로빈의 집, 그러니까 영주 저에서 살게 된 실비아는 세이라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 항상 오빠만 따르던 세이라가 실비아와 나무나 잘 어울려 놀아 오히려 로빈이 조금 서운할 지경.

그래도 덕분에 실비아와 세이라 모두에게서 해방된 로빈은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어머~ 귀여워라. 세이랑 실비가 노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네.”

“로빈이 딸이었으면 저렇게 놀았겠죠?”

“음… 로빈은 딸이었어도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놀 거 같진 않은데…….”

“그건 또 그럴까요?”

어른들도 좋아하는 거 같으니 실비아의 합류는 어쨌든,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그리고 듀발과 그의 할머니 역시 영주 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듀발의 할머니 리리 여사.

조상이 북부 출신이었다는 이분은 놀랍게도 이제는 많이 잊혀졌다는 북부 요리를 몇 가지 할 줄 아셨는데 이 요리가 로빈의 입에 꼭 맞았다.

매콤하고 향이 자극적인 북부 요리.

리리 여사의 요리는 로빈의 추억을 자극하는 아련한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 자극적이라 꺼려진다는 두 어머니를 제외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도 리리 여사의 요리는 호평 일색이었다.

“이게 술 한 잔 걸치면서 먹으면, 크~”

“자꾸 당기더라고요. 이거 괜히 살이 찌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요건 내가 먹겠네.”

“엇. 아버님, 그건 제가 아껴놓았던…….”

이렇게 즐겁게 술자리를 나누고 계셨으니 말이다.

듀발은 영주 저로 오자마자 바로 기사단으로 끌려갔다. 폴을 주축으로 루이와 기사들은 듀발을 철저히 교육시켜 로빈의 호위 기사 겸 시종으로 키우기로 한 모양이었으니까.

검에 재능을 깨우친 귀족 아이들이 대여섯 살부터 무예를 익히는 것에 비하면 듀발은 조금 늦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도 한번 검을 배워 볼까 기웃거리던 로빈은 치가 떨리는 훈련 양과 괴멸적인 자신의 재능에 한탄하며 금세 훈련을 포기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곳은 힘과 야만이 판치는 세계였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배우긴 해야 할 텐데 로빈으로서도 참 고민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을 때, 지온이 몇 가지 자료를 가지고 로빈을 찾아왔다. 바로 로빈이 그렇게 원하던 켄트의 착복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였다.

“음…….”

지온이 가져온 자료에는 영지에서 공적인 사업을 할 때 인부의 수로 장난을 쳐 인건비를 착복했다는 정황과 재료의 단가를 미묘하게 속여 실질 공사 대금이 장부상 기록된 공사 대금과 차이가 있음이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나마 증거를 찾을 수 있던 건 이 정도입니다. 가장 최근에 실시했던 영지 성 주변 도로 정비와 남쪽 마을 다리 보수 공사. 더 예전에 실시했던 보수 공사는 몇 년이나 지난 것이라 정확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더군요.”

지온의 이야기에 로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은 정확하게 파헤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이 정도 자료로 켄트를 처벌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 정도로는 착복 액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횡령은 그 금액이 많을수록 처벌 수위도 높아지는 제국법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로는 중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뭔가 더 있긴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로빈은 이 자료를 그대로 폴에게 가져갔다. 그라면 이 정도 금액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아마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이… 미친! 버러지 같은 자식이 감히!!”

자료를 살펴본 폴은 로빈의 생각 이상으로 격하게 분노를 터트렸다. 마치 당장 뛰어가 켄트의 목을 베어버릴 기세였으니까.

평소에는 진중한 사람이 진짜 화가 나니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그건 로빈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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