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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16화 (16/303)

16화

적법한 징벌을 받게 만든다. 퀘스트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폴 경, 우선 진정하세요. 경이 당장 켄트의 목을 베어버리는 건 할아버지를 욕보이는 일일 수도 있어요.”

로빈이 간곡하게 말리자 폴은 움찔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고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동인 거 같았다.

“켄트의 인망을 생각하면 역시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할 거 같아요. 만약 이대로 그냥 켄트를 처단하면 영지민들이 오해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도련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로빈의 말에 어느 정도 이성을 찾았는지 폴의 억양 역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솔직히 너무 서슬이 퍼레 살짝 긴장했던 로빈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음… 역시 공개 재판이 낫겠네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잡아 공개적으로 처벌하는 거죠. 그러면 영지민들도 동요하지 않을 거예요.”

이 작은 영지에 그나마 좋은 점이 있다면 영주들이 대대로 욕심이 없어 수탈도, 사치도 하지 않으니 영지민들이 영주를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마수 산맥과 바다에 인접한다는 지리적인 장점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비록 거짓이라도 인망 있는 재무관을 재판도 없이 처벌해 영주에 대한 신뢰를 의문으로 바꿀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를 찾는 일이군요.”

“네. 맞아요, 폴 경. 업무 시간 내내 관저를 지켜야 하는 재무관이 혼자서 공사 대금을 착복할 수 있을 리가 없죠. 현장에서 재무관의 손발이 되어준 사람이 있을 거예요. 당연히 기사단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머릿수가 많은 치안대라면 혹시 또 모르죠.”

“음…….”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하겠다는 폴에게 로빈은 자신이 확인한 치안대의 양아치 삼인방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권유했다.

“…그 인원들은 더 철저하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폴 경.”

지온에 이어 폴까지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더는 로빈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폴까지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머지않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이제야 좀 정상으로 돌아온 기분이군.”

집으로 돌아와 그늘에 누워 정원을 뛰어다니는 세이라와 그 뒤를 쫓는 실비아의 정겨운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로빈은 다시 다섯 살다운 여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이 뿌듯함을 느꼈다.

“솔직히 아직 원작 진입까지 7년이나 남았는데 요즘은 좀 심했지. 당분간은 책이나 보면서 좀 쉬어야겠다. 기사단은 전혀 포섭하지 못했을 테니 켄트 놈도 이젠 독 안의 쥐지. 후후. 하… 그놈의 퀘스트, 정말…….”

* * *

켄트는 요즘 뭔가 싸하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작은 영지에 들어와 일한 지가 벌써 십수 년. 이제 챙길 만큼 챙겨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으니 퇴직하는 순간 남쪽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해상 연합국으로 도망친다면 잡힐 일도 없고, 죽을 때까지 풍요롭게 살 수 있는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특히 자신에게 포섭된 치안대 간부가 와병을 이유로 접촉을 거부하는 것도 이 불안감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진짜 기사 중 한둘만 포섭할 수 있었으면 사전에 폴의 행동에 대하여 언질받을 수 있어 이렇게 불안해할 이유도 없는 건데, 이런 시골 영지의 기사 주제에 다들 왜 그렇게 완고하기만 한 건지.

다들 외골수적인 놈들뿐이라 작업 자체는 더 수월했지만 좀 답답하긴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음이 편치 않던 켄트는 다음 분기의 세금 징수 때 마지막으로 한탕 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퇴직을 서두르기로 했다. 자신의 직감이 서두르라고 재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켄트도 이런 변화가 다섯 살밖에 안 된 도련님 때문이란 사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로빈과는 직접적으로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하리라.

오늘 당장 퇴직하겠다고 카인에게 보고하려던 켄트는 관저에 들어가자마자 기사들에게 포박당했다. 카인은 보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체포된 것이었다.

깜짝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재무관 주제에 기사들을 따돌릴 순 없었고 도망치려 했다는 이유로 기사들의 거친 응징을 당해 질질 끌려서 죄인들을 임시로 가두어두는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켄트의 직감이 한발 늦은 것이었다.

그 시간, 켄트를 수감하라고 명령한 폴은 카인과 독대하고 있었다.

“하… 켄트가? 정말인가?”

“네. 여기…….”

켄트를 횡령과 착복으로 수감할 거라는 말에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폴은 지금까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그에게 내밀었다.

지온이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들과 자신이 치안대 인원들을 심문한 자료까지.

모든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켄트의 비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 영지에 들어섰을 때는 조심하며 치밀했던 켄트도 시간이 많이 지난 최근에는 더욱더 대범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작정하고 파 들어가자 증거를 찾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영지에 너무 무른 사람들뿐이라 켄트도 타성에 젖어 방심하게 된 것이리라.

자료를 모두 읽은 카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기가 막히는군. 그리고 이 일의 시작이 로빈이었다고?”

“네. 재정 상태가 안 좋다고 했더니 도련님이 가장 먼저 켄트를 의심하시더군요. 사전 조사는 지온 님이 맡아주셨고, 조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치안대 인원들을 심문해 증언까지 확보했습니다.”

“허… 지온까지? 그래. 그래서 어쩔 생각인가?”

“공개적으로 재판할 생각입니다. 이미 켄트를 구속했고, 그의 집을 수색 중입니다. 바이스 님에게 공개 재판을 신청했고요. 영지민들 중에 켄트를 믿는 자가 많으니 영지의 분위기와 안정된 미래를 위해 공개 재판을 열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것도 로빈이?”

“네.”

“거참… 그 녀석은……. 좋아, 그건 그렇고. 정말 깔끔한 선 조치 후 보고구만. 그래, 알았네. 그렇게 처리하게.”

폴이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카인이 그를 다시 불렀다.

‘폴 경’이 아니라 ‘폴’을 부른 카인. 이번에는 영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부른 것이었다. 폴은 뒤에서 들려오는 카인의 목소리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따가 집에 들러서 한잔하게나. 손녀도 좀 보고.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알았네. 그럼 이따가 밤에 들르지.”

폴이 집무실을 나서자 카인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민에 빠져든 카인.

그렇게 카인은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재무관으로 일하던 켄트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영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세금을 착복해 왔다는 사실과 공개적으로 재판한다는 내용까지 말이다.

최근 영지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영지민들은 그 이유가 켄트의 착복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며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이, 설마… 무슨 오해가 있는 거겠지, 누명을 쓴 거겠지, 하는 켄트를 옹호하는 여론도 있었고, 영주님이 재무관에게 누명을 씌울 리가 없으니 켄트의 유죄가 확실하다는 여론까지 반응은 참 다양했다.

하지만 로빈은 폴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켄트의 재판은 매우 싱겁게 끝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켄트의 집 한구석에서 또 다른 장부를 찾았다는 지온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 * *

그리고 며칠 후.

바로 켄트의 재판이 영주 성 앞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재판이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영지민이 모였다. 치안대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주변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고.

이윽고 법무관 바이스가 등장해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이곳의 재판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나 궁금했는데 특별히 변호사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켄트가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고 있었다.

“음……. 저거 저래서 변호가 되려나?”

켄트야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억울한 죄인이 생겼는데 저렇게 재판을 하게 되면 죄가 없음을 증명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로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런 작은 영지에서 재판이 열리는 경우는 거의 드물죠. 황도의 귀족 재판소가 아닌 다음에야 전문적으로 변호해 주는 사람도 없고요.”

“역시 그런가요? 억울한 사람들이 제법 생기겠네요.”

“영주들이 법을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게 되면 그렇긴 하죠. 그걸 막기 위해 법무관을 황실에서 임명하고 있는 거고요. 법무관을 임명하는 기준 중 가장 으뜸이 청렴함과 정직함이니 생각보다 재판에서 전횡이 일어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어? 그럼 바이스 님도…….”

“네. 물론 중앙에서 파견 오신 분이죠. 영주들이 제국법을 수호하는지를 감시하는 것도 사실 법무관이니까요.”

“아… 그래서…….”

변호인은 없지만 적어도 판결을 내리는 법무관은 다들 정상적인 모양이었다. 예전에 바이스가 자신은 법무관이기 때문에 재무관과 특별한 친분을 갖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게 이런 의미였나 보다.

하긴 변호인이 있는 것보다 법무관이 정상인 게 차라리 나은가?

로빈은 생각보다 더 상식적인 이곳의 재판 제도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21세기에서도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성행하고 있거늘.

로빈이 딴생각하는 와중에도 재판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오해라고, 모함이라고 주장하며 구구절절 이야기하던 켄트도 계속 증거와 증인들이 나오자 조금씩 대답이 궁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타는 켄트가 꼭꼭 숨겨놓았던 이중장부였다.

전생에서 법원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로빈이었지만 적어도 저렇게 증거를 기습적으로 던질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건 없는 모양이었다.

장부까지 나오자 할 말을 잃은 듯 말이 없는 켄트에게 바이스의 판결이 떨어졌다.

“죄인이 착복한 세금의 양, 그리고 재판정에서도 반성할 줄 모르고 죄를 회피하고자 하는 죄인의 태도로 미루어봤을 때 죄인의 죄질은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본 재판장은 제국법에 근거하여 죄인 켄트 시우워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미친, 진짜 사형이라고?

전생에서는 경제 사범이나 사기꾼들이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징역 몇 년 살다가 나와서 떵떵거리며 잘 살던데 이곳에서는 세금 착복했다고 바로 사형이란다.

그래, 경제 사범이 진짜 엿 같은 놈들이긴 하지. 그런 놈들이 감방에서 대충 몇 년 살다가 사면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솔직히 화딱지가 조금 나긴 했었다.

이곳에서는 2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저 켄트는 이제 사망 확정이었다.

자신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정신이 번쩍 든 켄트는 이 재판의 최종 집행 선언자인 카인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의 인정에 호소하면서 말이다.

“영주님, 제가 미쳤나 봅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흑흑. 제발 목숨만은…….”

하지만 카인의 표정에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자네를 믿었네. 전적으로 믿고 맡겼지. 하지만 믿음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 아니겠는가? 내 믿음을 저버린 책임을 지게나. 자네 목숨으로 말이야.”

지금까지 길지는 않지만 5년이나 그를 봐왔던 로빈도 저런 표정의 카인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켄트가 울며불며 인정에 호소할 때는 살짝 움찔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은 단호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카인의 선고까지 떨어지자 켄트는 이 자리에서 바로 처형되었다.

켄트가 처형된 후에는 그에 관련된 다른 범죄자들의 선고가 이어졌다.

켄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나 법정에서 켄트의 죄를 실토한 치안대의 3인은 재산 몰수 후 추방형에, 영문도 모르고 3인의 지시 때문에 소소하게 가담한 7인의 치안대원은 3개월 감봉형에 처해졌다.

로빈이 봤을 때도 그럭저럭 고개가 끄덕여지는 판결이었다.

다만 성향이 매우 안 좋은 저 3인이 단순히 추방당하는 것은 조금 불안하긴 했다. 저런 놈들이 나중에 후환으로 다시 나오는 소설도 제법 있지 않았던가.

뭐, 켄트라면 몰라도 저들은 지나치게 조무래기이긴 했지만…….

로빈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이미 판결은 났고, 그가 더 관여하기에는 좀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폴은 루이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놈들은 다 처리했나?”

“예, 아버지. 남서쪽 관문을 넘어선 후 영지 밖에서 처리했습니다. 아마 도적 떼의 소행으로 보일 겁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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