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수고했다. 후……. 치안대장이 되면 가끔 이런 지저분한 일에도 관여해야 한다. 영지에 피해가 올 수 있는 일을 모두 사전에 차단해야 하니 말이다. 영지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치안대원이 앙심을 품고 다른 곳으로 가는 건 너무 변수가 많아.”
폴은 이번 기회에 자신이 맡고 있는 치안대장의 자리를 루이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기사단장의 업무 때문에 치안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치안대 일에만 집중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으니까.
그 변절자들을 처단하는 일을 루이에게 맡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번 일로 차기 치안대장인 루이가 치안대 일의 본질을 깨닫기를 바랐다.
기본적으로 영주가 무른 그레이츠령이었기 때문에 치안대는 독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돌아온 아들의 표정을 보니 대충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폴은 안심하고 치안대 일을 루이에게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켄트가 처단당한 그날.
로빈은 밤잠을 설쳤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눈앞에서 켄트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눈앞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을 본 건 조금 충격이었다.
“소설에 빙의하거나 판타지 세계로 차원 이동한 주인공들이 사람 죽는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네. 확실히 좀 쇼킹하긴 했지. 그냥 글로 알고 있는 거랑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거랑은 조금 다르니까. 후……. 저런 놈이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이렇게 심란한데 만약 가족 중에 누구 하나가 저렇게 죽으면 진짜 트라우마가 심하겠어.”
그렇게 고개를 젓던 로빈은 문득 실비아가 어머니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한숨지었다.
“이거, 실비한테 더 잘 해줘야겠네. 어린 것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그리고 로빈이 밤잠을 설친 건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완료!]
재무관 켄트의 비리를 적발하고 적법한 처벌을 내려라.
보상: 영지민 감소의 원인 확인
페널티: 영지민의 감소(15~30%)
기한: 6개월
바로 완료된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다섯 살 로빈을 폭풍 속으로 밀어 넣었던 이 퀘스트.
피곤하긴 했지만 여차여차 해결은 되었고, 보상을 받을 차례인데 보상이 저 모양이다.
“페널티는 영지민 감소인데, 보상은 그 원인을 알려준다고? 이게 무슨 개방귀 같은 소리야? 원인은 켄트잖아? 그러니까 퀘스트가 그렇게 나온 거였고. 지금 장난하냐? 퀘스트, 이거이거……. 보상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하… 그래서 그 원인은 어떻게 알려줄 생각인데?”
어이없는 보상에 짜증이 난 로빈이 밤새 말 없는 퀘스트 창을 붙잡고 씨름한 것이다.
그렇게 피곤한 밤을 보낸 로빈은 다음 날 관저에 도착했을 때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에? 돈이 없어요?”
“네. 장부는 찾았는데 돈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하하하. 진짜…….”
장부를 찾아 켄트를 체포했다기에 당연히 착복한 돈도 찾은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란다.
아니, 그러면 충분히 심문해서 돈의 행방을 찾은 후에 재판했어야지 도대체 무슨 일 처리가 이 모양인가. 하다못해 어느 정도 죄를 줄여주는 조건으로 돈의 행방을 언질받든지.
지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 이유가 있긴 했다.
그런 큰돈을 개인이 보관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계좌에 넣어놨을 거로 생각했고, 켄트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그 판결을 근거로 켄트의 제국은행 계좌를 조회하고 착복한 금액을 회수할 수 있단다.
그런데 막상 판결이 나 켄트를 사형에 처했는데 그의 계좌는 완전히 비어있었던 것.
완전히 새 된 셈이었다.
“대충… 8천 골드라고 했던가요? 아껴 쓰면 저희 영지의 2년 예산쯤 되네요.”
상황이 조금 심각했다.
그 돈의 사용처를 고민했던 지온과 폴의 계획들도 다 물거품이 될 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요?”
“우선 그의 집을 뒤지고 있는데… 별로 수확이 없답니다. 모두에게 친절했던 켄트지만 딱 누구와 마음을 터놓고 지낸 건 아니라서 무슨 정보를 얻을 만한 곳도 없고요.”
“총체적 난국이네요.”
로빈은 켄트의 집을 수색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 많은 돈을 착복한 놈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지금 당장 할 일도 없으니 그놈의 집을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저도 한번 가볼게요. 혹시 알아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서 돈을 찾을 수 있을지?”
로빈의 말에 지온은 피식, 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뭐… 그러시죠. 어차피 저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으니까요.”
켄트의 집은 관저 근처에 위치해 있었는데 생각보다 작고 아담했다. 집 내부에 가구조차 몇 개 없었고.
“이러니 사람들이 청렴하다고 착각할 만하네요.”
“그렇군요.”
폴 역시 이곳에서 켄트의 집을 수색하고 있었다.
“마법적인 장치는 없는 거 같은데 역시 집 말고 다른 곳에 숨긴 거 같습니다.”
경지에 오른 기사인 폴의 감각으로도 전혀 마력을 느낄 수가 없다니 아무래도 마법적인 장치로 숨겨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폴의 감각을 속일 정도로 고난이도 마법 장치는 부르는 게 값이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테니 아마 그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정말 별거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벽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탁자와 그 위에 자리 잡은 몇 개의 조각상뿐이었으니까.
조각상은 이곳 사람들이 믿는 신들을 조각해 놓은 거 같았는데 제법 정교해서 볼만하긴 했다.
그리고 그중 한 조각상이 로빈의 눈에 들어왔다. 농염하고 자극적인 곡선 때문에 아름답지만 조금 야한 여신의 조각상이었다.
“이게 사랑과 봉사의 여신 조각상인가?”
묘사에 능숙한 봉구의 소설답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종종 각 신전이나 마을 광장에 위치한 신상을 묘사한 장면을 읽을 수가 있었다.
“묘사가 쩔긴 했지. 난 무슨 그런 야한 조각상이 있나 했으니까. 그런데 눈으로 직접 보니 진짜 그러네. 왼손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넣고 주먹을 말아 쥐고 있다고 해서 상상하다가 잠깐 빵 터지기도 했고.”
무려 여신인데 어떤 야겜에 나오는 경비의 마스코트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다고 묘사하는 바람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던 기억이 있었다.
“어? 분명 겟츄 손 모양을 하고 주먹을 하늘 위로 추켜올리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여신은 왼팔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물론 조각이야 만드는 놈 마음이라지만 좀 이상한 일이었다.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조각상을 건드렸다. 그런데 조각상을 탁자에 붙여놓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걸 왜 붙여놨지? 이상한 놈이네.”
로빈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만졌다. 그리고 힘을 살짝 주자 아래로 내려져 있던 왼손이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움직였다.
당연히 굳어있을 거로 생각했던 조각상의 팔이 위로 움직이자 아무 생각 없이 힘을 줬던 로빈이 더 당황할 지경이었다.
“틱…….”
조각상의 팔이 자기 위치를 찾자 탁자 옆 바닥에서 틱, 하는 소리가 나며 바닥이 헐거워졌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지온과 폴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와… 이런 장치를…….”
헐거워진 바닥을 들어내자 그 안쪽으로 큰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금까지 켄트가 모아놓은 금화와 금괴가 잔뜩 들어있었고.
“허… 진짜 찾았네요.”
당황한 지온의 모습에 로빈은 그냥 뒷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다.
이게 또 이렇게 되네.
솔직히 로빈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걸로 당분간 영지 자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상자 안에 들어있던 돈은 무려 1만 7천 골드 정도. 켄트가 착복했다고 예상되는 8천 골드보다 월등히 많은 양이었다.
“돈이 많은 건 좋지만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아무래도 켄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들어있는 게 아니겠나?”
켄트가 처형되고 빈 재무관의 자리에는 지온이 정식으로 임관하게 되었다. 지온에게 존칭을 쓰던 폴도 그때부터는 지온에게 편하게 말을 내리고 있었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너무 많은 돈이군요. 원래부터 켄트가 9천 골드나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솔직히 의문이긴 하네요.”
그리고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밝혀지게 되었다. 상자가 있던 비밀 장소 안쪽의 또 다른 공간에서 어떤 편지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 이거……. 애초에 다른 사람한테 의뢰를 받고 들어온 거였네요. 결국 저희가 발견한 장부도 또 다른 이중장부인 겁니다. 착복한 1만 7천 골드 중에 장부에 기록된 8천 골드는 자신에게 의뢰한 사람한테 전해주고 자신은 따로 9천 골드를 더 챙기려고 한 거죠.”
편지의 내용만으로 의뢰한 놈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적만은 분명했다.
바로 어떻게든 돈을 훔쳐오라는 것.
지온의 분석에 폴도, 로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힌 일이네요. 벼룩의 간을 내 먹을 놈 같으니라고.”
“어이없지만 당장 무슨 방법은 없어 보이네요. 편지를 봐도 상대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요.”
“그 건은 우선 두고 보지. 나중에 무슨 리액션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당장 당면한 일들부터 처리하자고.”
이번 일은 폴과 지온 그리고 로빈만 알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있었다지만 이 작은 영지에서 저 많은 돈이 나올 곳이 있나요?”
그레이츠령의 경제 규모를 생각했을 때 세금의 잔여분을 모두 모은다 해도 저 돈이 나올 거 같지 않았으니 로빈의 의문은 자못 타당한 것이었다.
솔직히 켄트가 그간 완전히 개판 치고 다닌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가 챙겨봤자 영지 세금의 일부일 뿐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켄트의 창조 경제 수준의 수탈 실력은 로빈의 머릿속에 큰 궁금증으로 남았다.
* * *
그리고 며칠 후.
로빈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이 영지를 방문했다.
바로 영지와 거래하는 유일한 상단인 주노 상단의 상단주 주노였다.
주노 상단과 거래를 마친 지온은 로빈을 찾아와 켄트가 그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허… 그러니까 이 마을 출신인 주노 상단주가 지금까지 계속 최소 마진만 받고 물건을 넘겼다고요? 거의 판매가에 가까운 가격으로 약초를 사갔고요?”
“그렇다는군요.”
“아니, 무슨 그런 호구… 아니, 바람직한 상인이 다 있답니까?”
견실한 중견 상단인 주노 상단의 상단주 주노는 이곳 영지 출신이란다. 어렸을 때 가난했던 주노는 영주인 카인이 나누어주는 식량으로 겨울을 나곤 했었고.
그렇게 자란 주노는 돈을 벌기 위해 영지를 떠났고, 부지런하고 악착같으면서도 사람을 아낄 줄 알던 주노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딴 자기만의 상단을 거느릴 수 있었단다.
상단주로 어느 정도 성공한 주노는 예전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그레이츠 영지를 잊지 않았고, 자신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게 모든 거래에서 마진을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과실을 켄트가 따 먹었다는 거였다. 물론 그 돈은 결국 다시 영지로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허허. 정말 고마운 사람이네요. 상인이 이득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요. 만약 우리 영지에 돈 되는 물건이 하나라도 있으면 뭐라도 주고 싶은 기분이에요.”
로빈은 진심으로 주노에게 뭐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노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호위 격으로 검은 곰 용병단과 함께 왔으니까.
마나 프로즌의 치료제를 구했다는 소식에 검은 곰 용병단의 단원 모두가 그레이츠 자작령으로 출발했고, 오는 김에 이곳으로 향하던 주노 상단의 호위까지 맡게 되었다고 한다.
마나 프로즌에 감염되었다는 단장은 거의 한계가 왔는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흑웅이오. 마나 프로즌의 치료제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름: 흑웅
성향: 직설적. 의리. 책임감
타이틀: 곰의 힘(UC). 곰의 체력(UC)
직설적인 성향답게 흑웅은 바로 치료제의 존재부터 찾았다.
하지만 이름이 흑웅이라니 조금 이상했다. 아마 검은 곰 용병단의 이름도 저 단장의 이름에서 딴 것이겠지? 이곳에서도 저런 식으로 한자 이름을 쓰는 곳이 있었던가? 소설을 볼 때 저런 이름을 본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다리를 많이 절긴 하지만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은 건 저 곰의 체력이라는 타이틀 때문인 거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