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러다 문득 자신이 귀족 집안의 적자이면서 지금까지 항상 존댓말만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나이가 어리니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까 몰라 돌려서 물어봤는데 주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귀족의 화법 중에 존칭을 사용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화법이 있습니다. 특히 도련님은 외모가 화려해서 존칭을 사용할수록 더 돋보이니 괜찮습니다.”
솔직히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소리였지만 상대를 존중해 주면서 자신이 더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란 걸 어필할 수 있다는 뜻으로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다. 뭐, 어쨌든 괜찮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한 가지 단면만으로 이 사회를 평가한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만 정말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그러니 앞으로 알아갈 일도 태산이었고. 특히 세금 포탈처럼 한 번에 골로 갈 수 있는 일을 더욱 자세하게 알아봐야겠다.
참 이상한 세계였지만 뭐, 어쩌겠나. 이렇게 이곳에서 살게 되었으니 자신이 적응하는 수밖에.
그렇게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다 보니 어느새 황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 * *
트와이드 제국의 황도, 와이드홀.
황도를 처음 봤을 때 로빈이 느낀 감정은 바로 ‘크다’는 거였다. 이곳 황도는 외성 내에만 4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황도 인근까지 포함하면 대략 100만이나 되는 인구가 상주해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서울은 인구 1천만인데 겨우 100만밖에 안 되나? 별로 크지 않은데’라고 착각했는데 막상 이곳을 눈으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다 외성 안에는 3~4층이 넘는 건물들도 즐비했으니 2층 건물도 찾아보기 힘든 그레이츠 자작령과는 수준이 달랐다. 물론 그레이츠 영지는 영지민이 5만밖에 안 되는 작은 곳이었으니 비교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그렇게 황도의 고급 여관에 자리를 잡은 후, 지온은 마법 공학자와 만날 약속을 정한다며 떠났고, 실비아는 아직 완벽하지 않은 연금술 이론을 공부한다고 하는 바람에 로빈은 졸지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공중에 붕 떠버린 로빈을 구원해 준 사람은 주노 상단주였다.
“이곳에 오신 김에 황도에서 열리는 경매장에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아마 볼만한 게 많을 겁니다.”
“오, 그런 게 있어요? 꼭 가보고 싶네요.”
로빈은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귀족들이 어떤 물건에 큰돈을 쓰는지 확인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겠다는 그런 포부였다.
그렇게 로빈은 기대감을 품고 주노를 따라나섰다.
황도의 중앙 경매장.
이곳에서는 매달 한 번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경매가 열리는데, 기본적으로 물건의 출처는 따지지 않는 게 룰이라고 한다.
다만 훗날 장물이란 게 밝혀지게 되면 판매자는 정말 큰 곤욕을 치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황실에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장물을 황실에 넘겼기 때문에 황족 모독죄에 걸린다나? 그래서 지금까지 잘못된 물건이 나와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단다.
그러고 보면 정말 황실에서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예전에 로빈이 황실이 흔들리면 제국이 망할 거로 생각했던 게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리라.
이곳은 기본적으로 귀족만이 구매석에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로빈과 주노는 그냥 평범하게 관람석에 착석했다. 관람석도 소정의 입장료를 받기 때문인지 제법 자리가 넓고 쾌적했는데 생각보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황도의 모든 경매장이 귀족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귀족만 사용할 수 있게 제한한 경매장은 오히려 이곳뿐이었는데 그래서 관람객도 이곳이 가장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오는 입장료도 모두 황실로 간다는데, 황실 사람들이 은근히 장사를 좀 할 줄 안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좋은 물건을 보면 안목도 늘어나니 물건을 감별하는 사람들도 종종 구경을 오고요.”
주노의 이야기에 로빈의 고개도 절로 끄덕여졌다. 자신도 그런 비슷한 이유로 이곳을 찾지 않았던가.
경매가 시작되고 다양한 물건이 경매에 부쳐졌다.
로빈은 처음 보는 알 굵은 루비부터 귀하다는 은여우의 모피, 그리고 유명한 마도 공학자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마법 물품도 있었다. 특히 하얀 모피가 나왔을 때는 실비아가 생각나 로빈도 살짝 욕심이 동하기도 했었다.
“…이제 마지막 물건입니다. 아마 이 물건 때문에 오신 분들도 많을 텐데요.”
사회자가 운을 띄우자 로빈도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단상을 바라보았다. 원래 경매는 마지막에 나오는 물건이 주인공인 법이니 지금 소개하는 물건도 제법 대단한 물건인가 보다.
“자~ 공개합니다! 비운의 천재! 얼굴 없는 화가! 아름다운 윌의 작품! 「다정한 노부부의 이야기」!”
경매의 마지막 물건은 바로 그림이었다.
부부인 듯한 두 노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그림. 둘은 서로를 무척이나 아끼는지 매우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 역시 그러했고.
그야말로 대단히 아름답고 가슴 따듯해지는 그림이었다.
경매가 한참 진행되는 동안에도 로빈은 멍하게 그림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척이나 대단한 그림이었지만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쪽 구석에 새겨진 ‘Will’이란 사인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진짜냐? 저게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라고? 저게 지금 왜 나와?
게다가 수도의 귀족들은 저 화가의 그림을 사는 것에 익숙한지 누구도 화가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니 있던 로빈은 옆에 앉은 주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 그림을 그린 화가가 유명한가요?”
“음……. 유명하다면 유명하죠. 다만 아무도 저 화가가 누군지 모르지만요. 그래서 얼굴 없는 화가고요.”
윌이란 화가의 그림이 알려지게 된 것은 황제 폐하 때문이란다.
4년 전인가? 종종 황도를 잠행하던 황제가 우연히 작은 화방에서 어떤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화풍의 대단히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그 그림에는 ‘Will’이라는 사인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 황제 폐하가 말씀하시길 ‘섬세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고풍스러우면서 세련되니, 그 놀라운 솜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라고 하셨었죠.”
그게 무슨 물방개 오줌 싸는 소리인지. 섬세하면서 힘이 넘치고 고풍스러운데 세련되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나? 하여간 예술 좀 안다는 인간들의 허세란.
“그래서 황제 폐하는 그날로 그 화가를 수소문하셨죠. 물론 그의 작품을 모으기도 하셨고요. 하지만 결국 그 화가를 찾지는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화가가 된 것이죠.”
당연히 못 찾으셨겠지.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어머니랑 결혼해서 제국 끝자락에 꼭꼭 숨어버린 아버지를 무슨 수로 찾겠는가.
게다가 화가 윌로 찾았다면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아마 영주이신 할아버지가 이 소식을 접했다 하더라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황제께서 화가 윌을 찾으신다고? 누군지 그림을 참 잘 그리나 보구나.’ 하며 금세 잊어버리셨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가 그 대단한 화가 윌일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테고.
“그나마 알게 된 건 이 화가가 가난해서 종종 그림을 팔았고, 그 그림이 남부 연합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로빈은 예전에 아버지가 전해준 자신의 모험담을 떠올려 보았다.
남부 연합국의 몰락한 귀족이었다는 아버지의 가문.
아버지는 4남으로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각박하게 아등바등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신물이 나서 가족을 떠났다고 했었다.
그렇게 떠돌다가 돈이 떨어지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다시 생활비를 벌었고.
결국 어쩌다 보니 이 황도에까지 흘러 들어오셨는데 이곳에서 운명처럼 어머니를 만났다고 하셨었지.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에 성공, 그레이츠 영지에 정착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만끽하게 되었다.
아마 황제 폐하가 보셨다는 그 그림은 아버지가 황도에 머물 때 그려 판 것을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화가를 찾지도 못하고, 작품도 더는 발견되지 않자 사람들은 윌이 죽었다고 결론짓게 된 겁니다.”
아니, 정원수 돌보면서 건강하게 살아 계시는데요. 살아있는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이겁니다. 윌이라는 젊은 천재는 가난했고, 생활고에 시달려 젊은 나이에 죽었다. 더 이상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희소성에다 황제 폐하가 인정한 천재라는 프리미엄까지 더해지자 윌의 작품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음…….”
아무래도 황제가 인정했다는 점이 귀족들의 허영심을 제대로 자극했나 보다. 비극적인 젊은 천재의 이야기가 거기에 날개를 달았고.
화가가 죽은 후에 작품 값이 올라가는 건 여기나 전생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젊었다는 것과 가난하다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아, 윌의 작품을 가진 사람 중에 윌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려지게 되었죠. 무척이나 잘생긴 젊은 남자였고, 가난해서 아주 낡은 화구와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고요. 덕분에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윌의 작품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죠. 그리고 아주 가끔 저렇게 나오는 윌의 유작은 아주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갑니다.”
그놈의 외모 지상주의는 참…….
어쨌든 설명을 들으니 대충 상황을 알 만했다.
그러는 사이에 경매가 끝났다.
“윌의 작품. 「다정한 노부부의 이야기」는 3천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헐, 3천 골드. 저 작은 그림이 이 가격이라고? 분명 우리 영지의 1년 예산이 대략 4천 골드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던 로빈도 이어지는 주노의 이야기에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크기도 작고, 윌의 작품 중 가장 흔한 인물화이다 보니 가격이 별로 높진 않군요.”
“저게 싼 거라고요? 저희 영지 1년 예산에 맞먹는 돈인데요?”
“하하. 그레이츠 영지는 조금 특별한 경우고 웬만한 크기의 자작령이면 예산이 몇만 골드인 경우도 많으니까요. 특히 황도에 사는 고위 귀족이라면 3천 골드 정도는 그저 푼돈입니다.”
“끙……. 더러운 세상이네요.”
부의 차이에 한숨짓던 로빈이지만 머릿속으로는 이 호재를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니 여러 번 써먹을 수는 없겠지만 크게 한탕 정도는 해먹을 수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로빈은 주노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걸 보니 윌의 작품에도 가격 차이가 있나 본데, 어떤 그림이 가장 비싼가요?”
“음……. 가장 귀한 건 역시 풍경화겠죠?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윌이 싸구려 물감을 사용해 자신의 솜씨를 모두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더군요. 만약 제대로 된 고급 물감으로 그린 윌의 그림이 있다면… 정말 부르는 것이 값일 겁니다.”
“제대로 된 물감이라…….”
하긴 그건 그랬다. 오늘 나온 그림과 집에서 아버지가 그렸던 그림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명확했으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귀족 가문에서 쓰는 물감은 길바닥에서 그림을 그릴 때 쓰던 물감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주노 님. 저희 집에 말이죠, 저 윌의 그림이 몇 점 있는 거 같거든요. 혹시 위탁 경매 가능할까요?”
“네? 윌의 그림이요?”
“네. 사실 그게 그렇게 비싼 물건인 줄 몰랐는데 오늘 경매에 나온 걸 보니 엄청 비싸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영지 사정이 별로 좋지 않으니 팔아야 할 거 같아서요.”
“허… 그런 귀물이 있으셨다니. 역시 마음을 곱게 쓰니 하늘이 돌보시나 봅니다.”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다음번 영지에 들르실 때 저희 저택으로 오세요. 그럼 그때 넘겨 드릴게요. 주노 님은 그 그림을 이곳에서 팔아주시기만 하면 돼요. 물론 장물 같은 건 당연히 아니고요. 의뢰 대금은……. 대충 7:3? 판매 대금의 30%를 드리려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하지만 위탁 비용은 괜찮습니다. 그 돈으로 영지 사정이 좋아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단호하게 위탁 비용을 거부하는 주노의 모습을 보니 역시 끝까지 의리 넘치고 은근히 호구스러운 주노였다.
주노가 저렇게 나오니 로빈도 좀 고민되었다. 차라리 30%의 대금을 받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뭐, 그건 그때 생각하죠. 어쨌든 다음 방문 때 꼭 저택에 방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윌의 다른 작품이라니,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그렇게 급전을 당길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를 찾은 로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숙소로 돌아갔다. 영지로 돌아갈 때 고급 물감을 한 세트 사서 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