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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2화 (22/303)

22화

* * *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던 지온은 어렵지 않게 마법 공학자의 원로라는 ‘히센 자리온 자작’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히센 자리온 자작은 평민에서 마법 공학 능력만으로 단승 자작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이곳 트와이드 제국은 평민이라도 능력이 출중하고 공이 있으면 작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비록 단승 작위라 영지도 없고 자손에게 물려주지도 못하지만 본인 자체는 귀족으로서 다른 계승 귀족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평민이 귀족 작위를 받게 되면 당연히 다른 계승 귀족들의 텃세가 있을 법도 한데 그건 또 아니라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애당초 여기는 인간성 자체가 전생과 다른가? 로빈으로서는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어쨌든 단승 작위로는 가장 높은 단승 자작에 오른 마법 공학자 히센은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자였고, 마수를 미끼로 삼지 않았으면 만날 약속을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마법 공학자가 왜 마수 연구를 못 할까요? 돈도 엄청 많으니 어떻게 해서든 마수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히센을 만나러 가는 길. 로빈은 지온이 히센을 소개하던 중 의문이 생겨 질문을 던졌다.

“음… 아마 돈으로는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마 히센 님이 원하는 마수는 분명 고위 거대 마수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놈을 잡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게다가 그렇게 맡겨도 그 사람이 무사히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솔직히 그런 놈을 안전하게 잡을 수 있는 기사들은 최상급이나 마스터급 기사들뿐일 텐데. 그 기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아마 저희가 처음에 논의했던 그대로일 겁니다.”

“음…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이분을 영지로 등용하게 되면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써야 하겠네요.”

“그럴 겁니다. 적어도 상위 등급의 마수를 따로 사냥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마수 사냥에 한해서는 저희 영지의 기사들이 황도의 기사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황도의 기사들과 영지의 기사들을 모두 지켜본 지온은 생각보다 영지의 기사들을 더 믿고 있었다. 관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마수들과 싸우는 모습이라도 본 건가?

아마 영지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영지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영지 여러 곳을 둘러볼 때 우연히 기사들을 살펴보았나 보다.

이 만남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영지의 자금을 아끼고 영지 방어에 성공해 영지민을 구하는 길이기도 했고, 마수 연구를 통해 영지를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가능하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전생에서도 연구만 하는 학자는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점이 조금 걱정되었다.

마법 공학자 협회는 무려 7층 높이의 건물로, 황도 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건물이었다.

솔직히 로빈도 그 높이에 살짝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는데 전생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2~3층 건물 사이에 우뚝 솟은 7층 건물이 주는 남다른 포스 때문이었다.

마법 공학자들이 돈을 많이 번다더니 확실히 건물만 봐도 그런 느낌이 팍팍 들었다.

로빈은 자신에겐 이런 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온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동행한 실비아도 거대한 건물에 두려움을 느끼는지 로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귀여운 것. 두려움을 느끼는 실비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저렇게 떨리는 눈동자를 보니 평소보다 더 귀여운 거 같았다.

로빈은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린 후, 실비아를 달래서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솔직히 건물 밖에서야 큰 건물이 위압감을 주지만 막상 안에 들어서면 건물이 크든 작든,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으니 말이다.

성공한 마도 공학자이자 협회의 원로이기도 한 히센은 협회 내에 따로 자신의 연구실을 두고 있었다.

마도 공학자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인물만이 이곳에 연구실을 둘 수 있어 많은 공학자가 협회 내 입주(?)를 희망한다는데, 확실히 능력과 지위를 봤을 때 그레이츠 영지 같은 작은 곳에는 과분한 인물이긴 했다.

하지만 서로의 위치가 다르다 해도 조건만 맞는다면 거래를 못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로빈은 최대한 편하게 생각하며 지온의 뒤를 따랐다.

그의 연구실 옆에 작게 마련된 접견실에 세 사람이 자리를 잡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히센이 들어왔다.

흰 수염과 하얗게 센 머리 그리고 흰 로브를 입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이미지의 어르신이었다.

“히센 자리온 간다프다. 네 녀석들이 마수 가죽으로 마법 갑옷을 만든다고 한 멍청이들이냐? 설마 랩터 가죽 정도로 그런 계획을 세운 건 아니겠지? 에잉, 그레이츠 영지의 녀석들만 아니면 내가 직접 만날 이유도 없었는데…….”

히센 자리온 간다프. 이 어르신이 단승 자리온 자작이라고 불린다니 자리온이란 성은 황제가 선사해 준 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의 본명은 히센 간다프였겠지.

하지만 저 외모로 이런 이름이라니, 뭔가 볼일을 보고 뒤처리를 하지 않은 듯 찝찝하기만 했다.

야, 봉구야. 아니지? 그냥 우연히 비슷한 거지?

혼자서 흰 백마를 타고 수천의 기마대를 이끈다든지, 혼자서 발록이랑 싸우던…….

난 믿는다, 봉구야. 우리 적어도 양심은 있었잖아?

로빈이 순간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버리자 지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빈을 흔들었다.

“도련님?”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로빈은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히센을 바라보았다.

뭐, 진짜 비슷하긴 한데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자신에게 이곳은 소설이 아닌 현실인데.

물론 너무 비슷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그냥 그뿐이었다.

봉구가 마음속으로 표절을 했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막상 소설에는 저분이 나오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고.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후… 안녕하세요, 자리온 자작님. 로빈 그레이츠라고 합니다.”

뭔가 불만 가득해 보이는 히센에게 로빈은 우선 자기소개부터 했다. 아무래도 상대가 뭔가 착각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추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센은 생각보다 더 직설적인 사람인가 보다. 왜 자신의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만 모이는 거 같은지, 원.

“뭐야, 이 꼬맹이는. 어른들 일하는 데 왜 꼬맹이를 데리고 왔어? 아니, 잠깐. 그레이츠라고?”

“네. 저희 영지의 도련님입니다. 이번 황도행의 최종 결정권자이시기도 하고요.”

히센이 로빈을 무시하자 지온은 오히려 로빈을 최종 결정권자로 만들어버렸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영지의 대표를 겉모습만으로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은 상대의 흠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과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대표가 다섯 살이라면 상대를 탓할 일도 아니게 되지만 적어도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어 진정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기세를 살짝 누그러뜨릴 수도 있었고.

지온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히센도 로빈이 최종 결정권자라고 하자 멋쩍어하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좀 어이없긴 했지만 어쨌든 한 영지의 대표를 그렇게 무시한 건 그의 잘못이었다.

“아니, 무슨 애를 데려와서……. 흠흠. 뭐, 내 미안하게 됐소. 어쨌든 이 아이랑 이야기하란 말이지?”

로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선 상대의 기세를 꺾는 것은 좋은데 이래서야 진짜 자신이 거래를 진행해야 하지 않는가. 지온이 거래를 진행하고 자신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일이 참 이상하게 됐다.

이거 설마, 일을 피하고 싶은 지온의 계략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다시 인사드릴게요. 로빈 그레이츠입니다.”

“히센 자리온 간다프다.”

이름: 히센 자리온 간다프

성향: 진취적. 직설적. 학구적

타이틀: 마법 공학의 대가(SR). 마수 연구가(UC)

이 어르신을 보니 딱 연구실에서 연구만 해서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한 연구원의 냄새가 났다. 아까 지온의 말을 듣고 바로 사과하는 것도 그렇고.

아마 처음에 자신을 무시한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 말대로 왜 굳이 아이를 데려왔는지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걸 테지. 게다가 직설적인 성향을 봤을 때 굳이 말을 길게 해봤자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럴 때는 그냥 팩트로?

“가메라입니다. 저희가 마법 갑옷으로 만들 마수 가죽은요.”

“…뭐… 뭣? 가메라라고? 그게 거기 왜 있어? 아니, 아니지. 그레이츠 영지니까 있을 만한 건가?”

의뢰의 대상이 가메라라는 이야기에 잠시 혼란에 빠져 혼자 중얼거리던 히센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거래에 나섰다.

“뭐, 좋아. 가메라. 하긴 가메라 정도 되면 내가 나설만한 일이긴 하지. 흠흠. 그래서 보수는 얼마나 줄 수 있는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가메라 가죽에 인챈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히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로빈에게는 그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정말 속마음을 못 숨기는 분이네. 연세도 지긋하긴 분이…….

“솔직히 가메라 정도면 저희가 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걸 만져볼 기회가 없을 텐데요.”

“뭐? 아무리 그래도…….”

로빈이 훅 찌르자 잠시 당황하던 히센도 나이를 허투루 먹지는 않았는지 차분하게 반격했다.

“뭐, 솔직히 그 말이 맞지.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네. 가메라 가죽은 나 정도가 아니면 제대로 인챈트할 수가 없어. 그러니 희소가치는 둘 다 마찬가지란 말이야.”

사실 그랬다.

마수 가죽으로 마법 갑옷을 만들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고, 덕분에 젊은 마법 공학자들은 마수 가죽에 인챈트할 능력이 없었다.

그럼 도대체 황태자는 마법 갑옷을 어떻게 만들었지?

소설에서는 그냥 만들었다고만 써놔서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진짜 이 어르신이 만든 건 아니겠지?

“뭐, 가메라가 아니라면 나 말고도 다른 공학자가 있겠지만……. 그 대상이 가메라라면 나밖에 없어.”

그나마 다른 마법 공학자가 있긴 한가 보다.

하긴 상대는 주인공 황태자인데 없는 마법 공학자를 만들어서라도 갑옷을 만들겠지.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로빈은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시 거래에 집중했다.

“그렇군요. 어르신, 그러지 말고 좀 더 건설적인 거래를 하죠.”

“음?”

무려 다섯 살짜리가 청하는 건설적인 거래.

히센의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눈앞에서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맹이를 보니 뭔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자작님에서 어르신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고.

“어르신, 어르신은 왜 마수를 연구하십니까?”

“흠…….”

로빈의 질문에 히센은 뭔가 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법 공학자로 자리를 잡은 후 마수에 대하여 연구해 보고자 노력했던 시간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누구도 진지하게 마수를 왜 연구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굳이 그런 영양가 없는 짓은 그만두고 마법 물품을 제작하는 데 집중하라고 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무려 다섯 살의 어린아이, 그레이츠 영지의 차기 영주라는 로빈이라는 아이였다.

상황이 좀 어이없긴 했지만 히센은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사실을 처음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인지 히센의 목소리에서는 왠지 모를 한과 울분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 왜 연구하느냐라……. 들어보게. 처음에 마법 갑옷이 발명되기 전, 우리 인간은 항상 마수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네. 마수 범람이 일어날 때마다 무수히 많은 기사가 희생되고, 민간인들도 많이 죽었지. 어쩌면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겠군. 그레이츠 영지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야.”

“아직 어려서 많은 경험을 쌓지는 않았지만, 마수의 위험성 정도는 잘 알고 있죠.”

“그래. 마법 갑옷의 시작은 마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었어. 그런데 아르마늄이 발견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더니 이제는 찾기 힘든 존재가 되어버렸지. 덩달아… 마수 가죽에 마법을 인챈트하는 기술마저 사장되고 있고.”

“그렇죠.”

나이는 어리지만 로빈은 좋은 청자였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아이답지 않게 인내심도 깊었으니 말이다. 로빈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만 봐도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어쨌든 로빈이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자 히센의 딱딱했던 표정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아르마늄은 광석이야. 땅에서 캐는 거고. 그 말은 언젠가는 고갈된다는 의미지.”

“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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