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만약에 훗날, 아르마늄이 서서히 고갈되어 가는데 마수 가죽으로 마법 갑옷을 인챈트하는 방법이 완전히 소실된다면. 다시 그 기술을 복원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겠나. 게다가 제국은 아르마늄 매장지가 별로 없네. 많은 양을 국외에서 수입하고 있지. 지금은 제국이 강성해서 그럴 일이 없지만, 만약 상대가 아르마늄 수출을 중지하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는 아르마늄 마법 갑옷이 없는데 상대는 마법 갑옷으로 무장해서 덤빈다면? 난 모든 마법 공학자가 아르마늄 인챈트 기술 한 가지에만 매진하는 이 상황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거네.”
“그건 그렇군요.”
조금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이런 일을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래서 난 증명하고 싶은 거야. 마수 가죽으로도 아르마늄에 버금가는 마법 갑옷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러면 사람들이 이 기술에도 많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겠지.”
히센의 이야기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마수 가죽 마법 갑옷은 아르마늄과 상관없이 다시 재조명받을 수밖에 없어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흐름과는 상관없이 마법 공학자로서 기술을 사장시키지 않고 더 발전시키려는 자세는 본받을 만해 보였다. 뭔가 장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어르신, 그럼 차라리 저희 영지로 가시죠.”
“음? 그레이츠 영지에?”
“저희 영지에는 가메라뿐만 아니라 포랍 같은 최상급 마수 가죽도 있고, 그 밖에 히포나 하나비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니, 영지에 무슨 난리라도 났나? 왜 그런 것들이 있는 거야?”
로빈은 웃으며 전대 영주들의 비밀 창고에 대하여 살짝 알려주었다.
히센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허… 역시 골 때리는 가문이군. 그걸 애장품으로 남겼다고?”
황당해하는 히센에게 로빈은 마지막 공격을 날렸다.
“어르신, 저희 영지는 항상 마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죠. 그런데 돈이 없답니다. 지금 당장은 가메라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기사들을 보호한다고 해도 앞으로는 어떡할까요? 조상들이 남긴 가죽들이 무한정인 것도 아닌데요.”
“흠…….”
“그러니 저희는 마수를 사냥해야 합니다. 어르신이 만들어준 갑옷을 입고요. 저희 영지에 오셔도 돈을 드리진 못할 겁니다. 저희는 가난하니까요. 대신 세상 어느 곳보다 더 많은 마수를 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면 어르신의 이해관계와 저희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족이나 미사여구, 그리고 사탕발림조차 모두 제거한 담백한 이야기에 히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 돈이란 이미 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네.”
조건이 있다는 히센의 이야기에도 로빈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뭐, 조건 따위 아무렴 어떻겠는가. 히센 같은 전문가를 공짜로 고용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지온을 보니 어쨌든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히센의 조건은 별거 아니었다.
자신이 마수를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달라는 것.
영지의 중요한 일이 아닌 다음에는 귀찮게 하지 말고 중급 이상의 마수를 잡으면 자신에게 보내달라는 것 정도였으니까.
공학자가 점검할 마법 물품조차 그리 많지 않은 그레이츠 영지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조건에 대한 확답까지 받자 히센은 로빈이 복귀하는 시기에 맞춰 같이 그레이츠령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빈으로서는 최선의 결과를 낸 것이었다.
거래를 마치고 마음이 푸근해진 로빈과 히센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교(?)를 다졌다. 다섯 살 아이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대화였지만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으니까.
“그나저나. 그레이츠 영지에 대해서 제법 아시는 거 같던데요. 처음 보자마자 그레이츠령에서 온 사람이 아니었으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아아, 그렇지. 마수 연구를 하는 사람치고 그레이츠령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영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이 서쪽 구석에 처박혀서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살아가는 곳이잖는가. 그래도 예전에는 황도로 직행할 수 있는 항구까지 있었는데 인구가 줄어들면서 항구마저 폐쇄했다지? 그게 한… 200년 전쯤이라고 하던가? 게다가 마수는 더럽게 많이 나오고 말이야.”
처박혀서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살아간다라.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황도를 방문한 것도 현 황제가 즉위할 때, 영주 직을 계승하기 위해서 들른 것이 다였다니 말 다 했지.
어쨌든 히센은 그레이츠령을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보니 그래도 마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레이츠령을 대충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표적인 마수 사냥의 메카였으니 당연한 건가? 비록 지금은 마수 사냥조차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마수 사냥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얻는 게 많을 거야. 마수 가죽은 그렇다 쳐도 중급 이상의 마수 전리품을 기념 삼아 가지고 싶어 하는 귀족들도 꽤 있거든. 아마 포랍 같은 녀석의 피막 날개나, 용종 마수의 두개골 같은 건 제법 고가에 거래될 거야.”
“음…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민가로 내려오는 하급 마수만을 사냥하는 지금 시대에 고급 마수는 기념품으로 의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창고에 보관 중인 마수 전리품들은 영지의 기사들을 위해 모두 풀어야 했으니 조금 무리였다. 로빈은 마수들의 거대한 뼈로 기사들의 무기까지 만들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가메라 뒷다리 정강이뼈로 마법 인챈트 무기를 만들어달라고 하면 히센이 무슨 소리를 할지 자못 궁금해졌다. 뭐, 그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지자 로빈은 넌지시 실비아의 스승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의 권위자인 히센에게 정보를 얻고 싶어서였다.
이곳에 처음 온 자신보다는 분명히 나을 테니까. 애초에 이곳에 실비아를 데려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로빈이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히센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린데. 이 아이가 연금술을 익힐 수 있을까? 연금술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학문인데…….”
이 말은 실비아를 무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닐 것이다.
초전문직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 중에 가장 어려운 과목은 무엇일까?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연금술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이는 연금술이 단순히 한 가지 학문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의 제반 지식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연금술은 화학과 의학, 지질학 그리고 수학까지 넓게 포함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연금술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했다. 비록 쇠를 금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새로운 약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그 기능을 파악하기도 한다. 사실 현시대에 가장 비싼 금속 중 하나인 아르마늄을 발견한 사람도 연금술사였다.
그러니 히센의 입장에서는 저 작은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연금술 스승을 구한다니 의아할 수밖에.
잠시 생각하던 히센은 로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 소개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다만 내 이름을 걸고 소개해 주는 건데 엉뚱한 아이를 소개할 순 없으니 내가 잠깐 테스트해 봐도 되겠지? 내가 마법 공학자지만 연금술도 기초 정도는 익혔으니 말이야.”
히센의 제안에 로빈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히센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실비아가 테스트만 통과하면 정말 진지하게 스승을 찾아줄 거 같아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실비아와 히센의 대화.
솔직히 로빈에게는 그냥 전혀 모르는 외국어에 불과했다. 뭐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도통 이해할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대답하는 실비아의 표정과 히센의 반응을 보니 그럭저럭 대화가 통하는 모양이다.
그래, 그렇겠지. 우리 실비아가 어? 얼마나 영리한 아이인데. 얘는 진짜 로또 1등이 확실한 아이라고.
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지온이 더 놀란 얼굴이었다. 지온도 자신의 딸이 이 정도로 똑똑한지는 몰랐나 보다. 그러고 보면 지온도 은근히 자기 딸을 무시한다니까.
이곳이 꽉 막힌 사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의 권위가 더 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전문직 종사자 중에 남성의 비율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고. 남녀의 능력 차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대의 흐름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능력 있는 여기사나 다른 전문직 여성을 성별을 이유로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능력이 없다면 당연히 무시당하겠지만 솔직히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수련한 여기사나 여자임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공부할 수 있었던 전문직 여성은 남성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그럼에도 다르고 특별하다는 이유로 텃세당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건 조금 신기했다. 원래 인간이란 동물은 조금만 달라도 무리 짓고 따돌리는 동물인데 말이다.
로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히센의 테스트가 끝났는지 그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허……. 이게 다섯 살짜리가 이해한 연금술이라고? 참 대단하군.”
아무래도 합격인 모양이었다.
“괜찮죠, 어르신? 저희 실비가 무척 똑똑하거든요.”
로빈은 자신이 한 것도 아닌데 은근히 콧대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자신의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때 부모들이 느끼는 감정인가? 딱 보니 지온의 반응도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게, 날 믿으라니까 참…….
“그렇군. 그냥 평범한 놈한테 소개해 주긴 너무 아깝군. 누가 좋을까…….”
“아, 어르신. 아시다시피 저희가 좀……. 아시죠? 하하, 돈은 별로 못 드려서요.”
로빈이 멋쩍게 웃으며 굽실거리자 그 모습이 너무 아이 같지 않아 히센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게다가 저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고 동그랗게 만 손가락 모양은 뭐란 말인가? 처음 보는 모양인데도 대충 무슨 의미인지 파악될 정도로 직관적이었다.
“허… 걱정하지 말게. 저 정도 아이라면 돈을 주고서라도 가르치고 싶어 하는 놈들이 쌔고 쌨으니까. 어디 보자. 그럼 내일 다시 오게나. 내가 좋은 녀석을 하나 소개해 주지.”
“오, 그래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우선 내일 들를게요. 그리고 저희가 5일 정도 뒤에 출발할 계획이거든요. 어르신도 참고하시라고요.”
“알았네.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럼 내일 보세나.”
일행은 히센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숙소로 향했다. 정말 얻으려고 했던 것을 모두 얻은 뜻깊은 만남이었다.
“허…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네요. 적어도 연봉 정도는 드려야 할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러게요. 뭐, 대신 다른 일을 맡기기 애매한 상황이 됐지만, 우리 영지에서 마수 갑옷이랑 관문 말고 크게 맡길 일도 없잖아요? 그리고 사실 저런 분은 연봉 맞춰 드리기도 힘들어요.”
“그건 그렇죠.”
“그리고요. 우선 우리 영지에 정붙이고 살다 보면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어요. 지온 님도 저희 어머니나 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할아버지도 그렇고요.”
로빈이 음흉하게 웃으며 이야기하자 지온도 짓궂은 미소로 응답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저렇게 죽이 잘 맞는지.
“후후, 그렇죠.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두 분이 어르신을 영주 저에 모셔놓고 부모처럼 따르면 저 어르신도 아마…….”
“그걸 노린 거랍니다. 훗, 골수까지 그냥~ 쭉!”
두 남자의 음흉한 대화에 실비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로빈은 실비아와 함께 다시 마법 공학자 협회를 찾았다. 지온과 주노는 마나석과 기타 다른 마법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 해서 부득이하게 둘이서만 오게 된 것.
황도의 치안은 아이 둘이서 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둘은 그렇게 별다른 문제없이 히센의 연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히센의 연구실에는 히센과 함께 한 중년 여인이 실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히센이 소개해 줄 연금술 선생인 모양인데 히센과 비교했을 때 너무 젊어 보여 로빈도 살짝 놀랐다.
친구를 소개해 준다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여인이 히센에게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친구이긴 한 모양인데……. 설마 나이를 초월한 친구? 뭐 이런 건가?
“호호. 네가 실비아구나. 내 이름은 도리아야. 풀 네임은 도리아 시더렌 모리 단승 남작이지.”
이름: 도리아 시더렌 모리
성향: 진취적. 포용. 제자 사랑
타이틀: 연금의 대모(S). 치료학 전문가(R). 물질 분석의 대가(SR)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