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한편 로빈이 없는 그레이츠 영지.
영지는 예상치 못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문제는 바로 가을 징수.
예전에 켄트가 마지막으로 한탕 해먹으려고 했던 바로 그 가을 징수였는데, 그레이츠 영지는 지온이 영지를 떠나있는 바람에 재무관 없이 징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영주의 입장에서 가을 징수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없는 살림에 계산 실수로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낭패였고, 실수로 빠뜨리게 되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아무리 카인이라도 예민하게 생각할 수밖에. 만약 재무관이라도 있었다면 그냥 전적으로 맡기고 결과만 확인할 텐데, 지금은 재무관마저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영지에서 징수 업무를 수행할 만한 사람이 없어 카인이 직접 징수하게 되었는데, 수십 년간 징수 업무를 보지 않은 카인이 능숙하게 업무를 수행할 리 만무했고 예전에 켄트를 도와 징수했던 재무관 보조들도 시키는 일만 잘하지 징수의 전체적인 맥락을 집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고생하던 카인이 도움을 청한 것은 다름 아닌 마리아나였다. 그나마 황도 아카데미에서 영주학을 수학한 마리아나는 경험은 없지만, 영주 업무의 이론은 충실히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카인과 마리아나가 좌충우돌하며 결국 무사히 징수를 마칠 수 있었다.
한동안 관저에서 시달렸던 카인과 마리아나는 겨우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늘어져 있었다.
“참을 수 없어요!”
늘어져 있던 마리아나가 벌떡 일어서자 가족들의 눈이 모두 마리아나에게 쏠렸다.
“제가 이렇게 힘든 건 로빈이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쏙 가버리더니……. 이건 엄마에 대한 반역이에요!”
“아니… 기껏해야 반항 정도겠지.”
“음, 그렇군. 이건 로빈이 잘못했어.”
윌리엄은 쓴웃음을 지으며 딴지를 걸었지만, 카인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아나를 부추겼다.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로빈은 벌을 받아야겠어요.”
“아니, 로빈이 있었어도 뾰족한 수는 없었잖아. 그 아이에게 징수 업무를 맡길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에욧! 만약 로빈이 있었으면 일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온종일 로빈을 끼고 있을 수 있었잖아요. 그럼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요. 로빈은 저의 에너지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 로빈이 보고 싶은데, 없잖아욧!”
“끙, 그건…….”
윌리엄은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입술을 앙다문 마리아나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에 꽂힌 모양인데 저런 마리아나는 누가 말려도 소용없기 때문이었다. 저게 말려서 되는 거라면 자신은 마리아나와 결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 이번에는 못된(?) 아이를 혼내주는 훌륭한 엄마의 이미지에 꽂힌 게 아닐까? 로빈은 지금까지 벌 받을 짓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 번쯤은 엄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마리아나였는데 로빈은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니었으니……. 물론 가장 큰 건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옆에 없는 것 때문이겠지만.
“오… 그래서 어떻게 혼내줄 생각인 게냐?”
“언니, 힘내요!”
가족들은 모두 로빈이 따라가든 말든, 징수 업무 때문에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로빈이 안 가도 지온은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건 그냥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저녁에 모여 일상적인 이야기를 노닥거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이 가족들의 취미이자 즐거움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누군가가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더욱 그랬고.
“자, 회의를 시작해요. 주제는 ‘못된(?) 로빈이 돌아왔을 때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예요.”
그렇게 로빈의 가족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어이없는 토론을 시작했다. 로빈이 봤으면 황당해서 고개를 저으며 한탄할 그런 토론을 말이다.
어이없는 이유로 시작된 토론이지만 그 분위기만은 사뭇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빈에게 줄 만한 벌이 없는데. 엉덩이 팡팡 같은 걸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에이. 그건 어렵죠, 아버님. 로빈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그건 그래요.”
어린아이가 가장 무서워한다는 엉덩이 팡팡. 로빈이 당한다면 수치심 때문에 두 배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은 다행히 잘못 없는 아이에게 엉덩이 팡팡을 할 정도로 분별없는 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빈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이미 다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이 토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음……. 일주일간 껴안아주지 않기?”
“일주일이나요? 그건 언니가 더 힘들 거 같은데요?”
“그건… 그렇네.”
“그래, 마리야. 괜히 무리하지 말아라.”
“그럼 세이랑 일주일간 놀지 못하게 하기?”
“실비가 돌아온다고 해도 그건 무리야. 아니, 애초에 로빈을 벌을 준다면서 왜 그 피해는 세이가 봐야 하는 거냐고?”
윌리엄은 로빈과 실비아가 같이 떠나는 바람에 계속 우울해 보였던 자신의 딸 세이라를 떠올리며 강하게 반박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답이 없구나. 마리야, 차라리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떠니?”
“그래요, 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로빈에게 벌을 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 녀석이 생각보다 강적이라고요.”
“아니, 애초에 잘못하지도 않은 아이에게 벌을 주려고 한 것부터가 문제인 거 같은데.”
처음에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동조하던 세릴과 카인도 시간이 좀 지나자 피곤해져 이런 의미 없는 토론을 서둘러 끝마치고자 했다. 윌리엄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태도였고.
“아니야! 난 반드시 찾아내겠어.”
다만 마리아나만이 마지막까지 머리를 굴렸다. 로빈이 없어서 외로웠던 그간의 시간을 어떻게든 보상받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이때가 로빈이 영지로 돌아오기 3일 전의 이야기였다.
* * *
쏜살같이 3일의 시간이 지나고 로빈과 일행은 무사히 영지에 도착했다.
아무리 사건, 사고 없는 여행이라도 집을 떠나면 고생하는 법이라 일행이 느끼는 피곤함은 대단했고 영지에 도착하자 저절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이곳이 그레이츠 자작령인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정감 가는 분위기군요. 조용히 제자를 키우기에도 좋은 곳 같아요.”
“마을에 빈 공터가 많아 집을 싸게 지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인심도 좋아 보이고요.”
영지를 처음 방문한 손님들(이제 식구가 되었지만)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긴 웬만큼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레이츠 영지의 정적이고 따듯한 이미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좀 위험하고 가난하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지만 말이다.
“오! 로빈, 무사히 잘 다녀왔느냐?”
“내 아들! 보고 싶었어.”
당연히 가족들도 로빈과 일행을 반겨주었다.
버선발로 뛰어나왔다는 게 이런 모습일까? 로빈은 자신을 껴안는 가족들의 모습에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 자신이 사랑받고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인 카인은 히센, 도리아와 앞으로의 처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에 지온이 합류해 이견을 조율하고 있었고.
“아무래도 실험이나 연구까지 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하겠군요. 음……. 아, 그럼 차라리 영주 저에서 머무르시죠. 연구실은 따로 별채에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창고로 쓰는 별채들이라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가볍게 영주 저 근처에 머물 생각이던 두 학자는 카인이 아예 영주 저 내의 별채를 내어주겠다고 하자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 저 내에 연구실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하. 어차피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빈 별채인데요, 뭘. 식사나 휴식은 본채에서 하시고 연구만 별채에서 하시면 되겠군요. 연구하시는 분들이니 별채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자료들도 있을 테니까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연구에 집중할 때는 밥을 챙겨 먹는 것도 귀찮은 것이 바로 마법 공학자나 연금술사 같은 연구 전문 직종이었다. 그러니 잠자리나 식사, 청소까지 모두 책임지겠다는 카인의 말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비록 황도였으면 자신의 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할지라도 말이다. 특히 실비아가 영주 저에 머물고 있어 자주 이곳을 들러야 하는 도리아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어머… 도리아 시더렌 모리 님 아니세요? 세상에…….”
한창 로빈과 실비아와 어화둥둥 하던 마리아나는 카인과 대화하던 도리아를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호호. 날 아세요? 제자를 찾느라 활동을 접은 지 몇 년 되었는데요.”
“그럼요, 당연하죠. 성공한 여성 학자의 표본이시잖아요. 귀족 여성 중에 도리아 님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정말 영광이에요.”
“호호호. 그래요? 거봐, 히센. 내가 이 정도라니까. 같이 학회 활동을 쉬었는데 난 아직도 이렇게 알아준다고.”
“끙…….”
서로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업적을 잘 인정하지 않는 둘이었지만, 이렇게 결과가 자명한 것까지 부정하기에는 각자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러니 오늘은 히센이 도리아의 대단함을 인정할 수밖에. 솔직히 히센도 이런 외진 곳의 귀족 여성이 도리아를 알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이렇듯 영주 일가의 강권 끝에 히센과 도리아는 영주 저에, 검은 곰 용병단 가족들은 영주 저 근처 용병단이 미리 마련해 놓은 보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로빈은 오랜만에 집에서 식사한다는 것에 기꺼워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그간 집에서 먹었던 매콤한 음식들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역시 한국 사람은 매운 걸 먹어야…….
“어?”
하지만 로빈은 저녁상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트와 브로콜리를 갈아 넣고 끓인 수프.
말린 당근 가루와 같이 반죽해 만든 빵.
양배추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채소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 및 기타 등등.
맛은 뭔가 미묘하지만, 몸에는 더럽게 좋아 보이는 식단이었다.
아니, 우리 집이 이렇게 웰빙 식단을 추구하는 곳이었나? 음식은 맛도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이었던 거 같은데.
로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윽.”
로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입이 짧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를 가릴 만큼 풍족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입에 담은 이 수프는 정말 최악이었다. 이런 식감에 이따위 향이라니, 진짜 돈을 받는다고 해도 먹기 힘들 정도였다. 아마 비트라는 뿌리채소 때문인 모양인데……. 세상에, 당근보다 더한 놈이 있었다니.
반찬 투정 따위는 절대 할 수 없다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꾸역꾸역 음식을 삼키고 있는 로빈의 모습에 웃음 지으며 마리아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 로빈은 역시 의젓하다니까~ 너무 어릴 때부터 매운 음식을 먹는 건 성장에 안 좋대. 그러니 앞으로 당분간 매운 음식은 금지! 그리고 앞으로는 몸에 좋은 것을 좀 먹어야겠어. 사랑하는 로빈~ 엄마 마음 알지?”
“…네.”
자식에게 몸에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은 세상 모든 부모가 다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 로빈이 이해할 수밖에.
하지만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수프는 진짜 아니었으니까. 물론 가장 좋아하는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도 그렇고.
로빈은 그저 한숨만 났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질린 표정으로 마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화풀이를 이런 식으로……. 정말 교묘한 계략(?)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수저를 들던 가족들도 수프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은 후에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수프의 맛을 보니 마리아나의 집념이 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지금 마리아나는 이 음식을 웃으면서 먹고 있었다. 저런 독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 당분간 이런 음식을 계속 내 올 생각인 모양인데, 도대체 이런 똥 같은 걸 얼마나 더 먹어야 하지?
가족들의 시름도 덩달아 깊어져갔다.
여담이지만 로빈 가족의 건강 식단은 이유식으로 비트&브로콜리 수프를 떠먹은 세이라가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중지되었다고 한다.
아마 세이라가 울음을 터트리지 않았다면 그들 가족은 마리아나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 끔찍한 건강식을 먹어야 했을 것이다. 로빈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마리아나의 그릇된 집념(?)이 생각보다 강했으니 말이다.
역시 집안의 귀염둥이, 구세주 세이라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