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로빈이 귀향한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영지 방어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마법 갑옷의 제작 일정, 관문의 방문, 수리 일정, 그리고 기사단의 합동 훈련 일정이 신속하게 결정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회의로 바쁜 시간, 로빈은 가벼운 걸음으로 아버지가 가꾸는 정원으로 향했다. 물론 손에는 색색의 다양한 물감과 미술 용품이 가득 들려있었다. 아버지만을 위한 로빈의 선물이었다.
정원에서 한가롭게 나무를 가꾸던 윌리엄은 로빈이 무언가를 잔뜩 챙겨 들고 오자 무슨 일인가 싶어 천천히 다가왔다.
“이게 뭐니, 로빈? 게다가 이 시간에 웬일이고. 지금 한창 세이랑 놀고 있을 시간이잖아?”
“잠깐 아빠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내게?”
윌리엄은 익숙하지 않은 아들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빈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황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했을까? 로빈이 이야기를 끝내자 윌리엄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꺼워했다.
“하하. 그러니까 내 그림이…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는 거구나. 황제 폐하까지 내 그림을…….”
그렇게 기뻐하던 윌리엄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렇게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즐기는 윌리엄이었지만 한때는 분명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화가가 되었든, 아니면 유명한 음유 시인이 되었든지 말이다. 그러니 세상에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저렇게 기꺼운 것이겠지.
잠시 감회에 젖어있던 윌리엄이 눈을 뜨자 로빈은 이렇게 물었다.
“아깝지 않으세요? 지금이라도 아빠가 윌이라는 걸 알리면 수많은 찬사가 다 아빠의 것이 되잖아요.”
하지만 윌리엄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글쎄. 그럴까? 아마 아닐 거야. 그들이 열광하는 건 살아있는 윌리엄이 아니라 죽은 윌일 테니까.”
그렇게 쓸쓸한 한마디를 남기더니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뭐, 그래도 내 그림이 좋으니까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거겠지? 그걸로 됐어. 그리고 사실 그런 건 다 의미 없지. 나의 행복은 이곳에 있으니까. 너와 마리, 세릴 그리고 세이가 내 행복이란다.”
윽, 아들인 자신에게 이런 화려한 미소 공격이라니.
솔직히 저건 좀 반칙이었다. 저러니 두 어머니 모두 아버지한테 맥을 못 추지.
로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아빠, 그럼 마지막으로 윌의 화려한 솜씨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으세요?”
“응?”
로빈은 제 생각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은근히 예술가적 기질로 똘똘 뭉친 윌리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하면서 말이다.
여러 가지 양념으로 그림의 가치를 올려서 한몫 챙기자는 자신의 말에 반감을 품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윌리엄은 더 적극적으로 로빈의 의견에 찬동했다.
“흠… 그건 그렇구나. 그림은 내가 그렸는데 돈은 딴사람이 챙긴 꼴이지 않느냐. 지금 영지 상황도 안 좋은데 만약 그림을 팔아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거 같구나. 가족들을 위해서 그 정도야…….”
“뒤탈 없이 딱 한 번 만 팔고 빠질 테니까요. 아빠도 진짜 최선을 다해서 명작을 만들어주셔야 해요.”
“알았다, 요 녀석아. 내가 심혈을 기울여 걸작을 한번 뽑아보마.”
그렇게 다짐을 받은 로빈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미술 도구를 건네주고 자리를 떠났다. 연금술 공부를 시작해 바쁜 실비아를 대신해 세이라와 놀아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은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가는 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걸작이란 말이지. 흠…….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볼까?”
오랜만에 다시 화구를 손에 쥐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진짜 온 힘을 다해 인생작을 한번 그려볼 생각이었다.
* * *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또 지나갔다.
지난 한 달간 가장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건 역시 기사단이었다.
기존의 기사단과 이제는 검은 곰 기사단이 된 검은 곰 용병단.
살아온 환경과 생각이 전혀 다른, 힘깨나 쓰는 남자들이 모였으니 한 번쯤 충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우열을 가리기 위해 시작된 대결에서 몸을 완전히 추스른 흑웅은 놀라운 무위를 보여주었다. 영지에서 제법 이름 날린 기사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영지의 대들보인 폴과도 대등하게 싸웠으니 말이다.
물론 마지막에는 폴이 흑웅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로빈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더 대단한 무위였다.
로빈은 흑웅과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기사에 대하여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그레이츠 영지의 기사들이 대인전에서는 생각보다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곳의 기사들이 상대하는 것은 주로 마수였고, 마수를 상대하는 것과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두꺼운 가죽을 뚫고 마수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영지의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동작이 크고 힘을 쥐어짜서 상대를 공격했다.
물론 필살의 일격도 좋지만 이런 습관은 사람과 싸울 때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싸움만 봐도 기사들의 정직하고 강력한 한 방을 흑웅이 요리조리 피해가며 농락하지 않았던가.
이런 이야기를 폴에게 꺼내자 폴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흑웅, 그 친구가 물건이긴 하더군요. 용병 일을 오래 해서 그런지 변칙적이고 섬세했습니다. 변칙적인데다가 완력까지 탁월하니 강할 수밖에요. 다만 정식으로 검을 배운 건 아닌지 기본기는 조금 부족해 보이더군요. 만약 이 부분만 보완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흑웅을 평가한 폴은 기사들의 대인전 능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동안은 저희 영지가 다른 영지랑 충돌할 일이 없었고, 영지 내에 도적들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라 기사들이 상대해 본 게 마수나 다른 기사들뿐이라 그럴 겁니다. 하지만 도련님의 말씀도 확실히 일리가 있죠. 저희가 언제나 마수랑만 싸울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다행히 이번에 들어온 검은 곰 녀석들은 대인전에 능숙하니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 좋겠군요.”
이렇게 기사단의 갈등은 서로에게 장점을 배우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사내아이들은 싸우고 나면 친해진다고 했던가? 그렇게 한 번 크게 싸운 이후로 두 집단은 놀랍도록 사이가 좋아졌다.
아니, 내부적으로 서열 정리가 완벽하게 끝나서 그런 건가? 이유야 어떻든 로빈의 입장에서 나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 후로 기사단의 훈련은 거칠어졌다. 기사단 사이에서 훈련하던 로빈의 시동 듀발의 훈련 역시 그랬고.
그리고 히센.
수많은 고급 마수 가죽에 눈이 돌아간 히센은 그날로 바로 마법 갑옷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심지어 실비아를 가르치는 도리아까지 끌고 들어가 고생시키고 있었는데,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가메라 가죽이라서 연금술사의 보조가 필요해서 그렇단다.
어쨌든, 실비아에게만 집중하고 싶어 하던 도리아에게는 안 좋은 상황이었다. 다만 영지 입장에서 볼 때는 더 좋은 갑옷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였으니 정말 좋은 소식이었지만.
영지가 이렇게 바쁘게 움직일 때 로빈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려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칠 정도로 미친 듯이.
이렇게 로빈이 이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며칠 전.
로빈은 평소처럼 오전에는 관저를 기웃거리고 오후에는 세이라와 놀아줄 계획이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지극히 다섯 살다운 일과였다. 큰일은 대충 해결되었고, 당분간은 이런 생활이 이어질 거라고 믿었기에 로빈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어차피 돈도 거의 다 써 영지 차원에서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로빈은 우선 이번 위기를 넘기고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판 후, 그 돈으로 영지를 정비할 생각이었으니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영지민들을 몇 곳에 모아 관리하는 것도 그 정비의 한 갈래였다. 그러니 북쪽 방벽에 대한 대비를 거의 마친 지금은 한가할 수밖에.
하지만 호기심이 문제였을까?
폴이 완성된 마법 갑옷을 방벽에서 근무 중인 기사들에게 가져다준다는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고 말았다. 새로운 마법 갑옷을 받고 즐거워할 기사들의 늠름한 모습이나, 방어 시설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북쪽 방벽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에서였다.
따라가고 싶다는 로빈의 이야기에 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폴까지 저렇게 허락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위험한 일은 아니다 싶어 로빈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로빈과 폴이 함께 관문으로 출발했다.
평소에는 장검으로 무장하고 있는 폴이었지만 관문으로 떠날 때는 창대 끝에 거대한 검날이 달린 무식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위용이 정말 대단했다.
아마 저것이 폴의 대마수용 무기인 모양이었다. 물어보니 그 무기의 이름은 ‘에셋’. 폴이 직접 이름 붙인 그의 전용 무기였다.
검술의 달인인데 저 무식한 놈도 검에 속하는 건가?
드디어 도착한 북쪽 관문.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관문의 모습은 자신이 퀘스트 보상으로 보았던 영상 속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다소 허름하고 아무것도 없이 밋밋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모든 부분이 단단하게 보수되었고, 그 위에 발리스타 비슷한 큰 무기까지 달려있었다. 아마 자신이 황도로 떠났을 때 보수는 이미 시작했었나 보다.
그 후 히센이 들러서 마법진을 손봤고.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일을 좀 하긴 했다.
“오……. 이놈입니까? 장난 아닌데요.”
현재 관문을 지키고 있던 선임 기사, 루터는 폴이 건네주는 마법 갑옷을 살펴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은은하게 고급스러운 묵빛을 띤 마법 갑옷. 가메라의 가죽을 통으로 사용해 질기고 튼튼했으며 히센의 마법으로 여러 가지가 보완되었다.
히센의 말에 따르면 견고함, 마나 효율 증가, 신체 능력 향상, 이렇게 세 가지 보조 마법이 걸려있다는데, 이 말을 전해 들은 폴의 놀란 표정을 봤을 때 정말 대단한 물건이긴 한가 보다.
루터는 당장 자기가 입고 있던 갑옷부터 벗었는데 예상대로 매우 허름한 놈이었다. 이런 걸 방어구라고 입고 영지를 지키고 있었다니.
아무리 뻔뻔한 로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이제라도 바로잡았으니 다행이지, 이대로 마수 범람이 시작되었을 거로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고 참담했다.
기사들이 희희낙락하며 갑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폴은 로빈을 데리고 관문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다.
“이건 마수들의 시선을 끄는 장치입니다. 마수들이 관문을 넘어가는 걸 방지하는 거죠.”
가장 신기한 건 관문 안쪽에 위치한 강철 통이었는데, 이게 그 비싼 아르마늄 합금으로 된 통이란다. 물론 아르마늄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통의 용도는 일종의 어그로를 끄는 거였는데, 근처의 마수들을 자극해 관문을 넘지 않고 이 통 쪽으로 유인한단다. 마수들이 관문을 넘기 시작하면 기사들도 이쪽으로 모여 통 주변을 지킨다나?
도대체 무슨 마법으로 마수를 자극해 유인하는 건지 신기하긴 했다. 아마도 자신이 본 그 영상에서 작동하지 않았다는 마법진이 저것에 관련된 마법진인 모양이었다.
물론 마수들이 관문을 넘지 않게 잘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 만약을 위해 저런 보험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사람 일은 생각한 대로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특히 이곳을 넘어가면 바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오니 더욱 조심할 수밖에.
“삐~! 삐~!”
그렇게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는데 날카로운 경보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수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아…….”
말을 마친 폴은 바로 경보가 울린 쪽으로 뛰어나갔다. 상황이 궁금했던 로빈 역시 자신도 모르게 뒤따르고 있었고.
관문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자 그 아래에서는 여러 마리의 마수가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허… 저놈들이 굳이 내려가서……. 아마 새로운 갑옷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나 봅니다.”
폴은 허탈하게 웃으며 혀를 찼다.
마수의 종류는 가장 흔하다는 랩터.
흔히 아는 이족 보행 공룡 랩터와 거의 비슷한 마수였다. 파충류 형태라 고기도 취급하지 못하고 가죽도 그리 단단하지 않아 별로 얻을 것도 없지만, 그만큼 상대하기도 쉬운 마수였다. 다만 그 수는 많은 편이라 물량은 주의해야 하지만.
그런데 웬일인지 이곳에 내려온 수는 그리 많지 않아 금방 해결될 것 같았다.
폴의 이야기를 듣고 기사들의 얼굴을 확인했는데 표정들이 밝은 게 마법 갑옷의 성능에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로빈도 조금 뿌듯해졌다.
그러나 그때.
저쪽에서 거대한 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