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물론 이유 따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냥 마수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거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수 범람만을 생각한다면 그레이츠 영지가 없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완전히 비워진 이곳 분지와 대수림이 제국의 천연 방파제가 되어 제국 북서쪽이 마수 범람으로부터 안전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만약 그레이츠 영지가 없다면 이곳도 마수의 자생지가 되었을 테고, 이곳으로부터 마수 범람이 시작돼 인접한 영지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으니까.
즉, 이곳에 영지를 세운 초대 황제가 그레이츠령을 만든 건 이곳에서 마수 산맥의 길목을 막아버려 마수의 자생지가 확장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제국 내에는 그레이츠 영지와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영지가 총 다섯 곳 있었다. 물론 대수림과 마수 산맥, 그리고 바다를 낀 그레이츠 영지의 위치가 가장 절묘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초대 황제 놈도 개쓰레기잖아? 이딴 곳에 영지를 만들어놓고 기껏해야 자작한테 던져주고는 자기는 신경 껐다고? 인성 하고는…….”
물론 이런 곳에서 영지만 지키고 산 자신의 조상들도 참 어지간하지만.
그런 성격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곳 영지를 준 건가?
하긴 상급 마수 같은 천재지변만 아니면 살 만한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그놈들은 마수 산맥 깊숙이 들어가야 겨우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그리고 대수림.
로빈도 책으로 봤기 때문에 대수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곳은 영지 남쪽에 맞닿아 있는 거대하고 울창한 밀림이며 사람들의 출입이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들어가면 거의 길을 잃는 곳이라 약초꾼들조차 접근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상하게 마수들도 대수림은 조금 껄끄러운지 굳이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비밀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사람이 전혀 살지 않으니 마수가 범람해도 그쪽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즉, 마수 범람 시기에는 이곳이 천연 방벽이 되어주는 거였다.
대수림의 일부가 마수 산맥과 접해있음에도 방비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게다가 대수림은 엄청나게 넓었는데 마수 무리가 그곳을 타고 그레이츠 영지까지 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대수림 남쪽에 위치한 다른 영지로 내려간다면 몰라도.
“분명 이론적으론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흠…….”
만약 마수가 다른 경로로 들어와 영지민을 해친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경로는 세 가지 정도였다.
첫째. 비행 마수가 절벽을 넘어 들어온다.
하지만 비행 마수들은 중급 이상의 것들뿐이라 마수 범람에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자신의 둥지를 잘 떠나지 않기 때문에 기각. 만약 이놈들이 범람해 영지로 쏟아진다면 방비고 뭐고 그냥 멸망이었다.
둘째. 바다 쪽을 타고 새로운 마수들이 헤엄쳐 들어와 남쪽의 마을들을 덮친다.
이건 그냥 불가항력 아닌가?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도 이건 좀.
마지막. 마수 산맥에서 마수들이 내려와 대수림을 타고 남쪽에 있는 마을을 기습한다.
지금까지 천 년 동안 대략 열댓 번의 대규모 범람이, 백 번도 넘는 소규모 범람이 있었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대수림에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런데 만약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대수림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면? 그리고 150여 년 만에 발생한 대규모 범람으로 늘어난 마수들이 사람의 냄새를 맡고 내려와 대수림의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고 그 여세를 몰아 그레이츠 영지까지…….
물론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방비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저거였다. 대수림에 사람이 사는지 확인만 해보면 되니 말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방비할 수도 없는 천재지변 같은 일이고.
물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영지 회의에 참석한 로빈.
그리고 자기 생각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럴 리가 있겠냐고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단 한 사람, 흑웅만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이번 마수 범람이 대규모로 발생할 거고, 만약 대수림에 많은 사람이 산다면 그쪽이 위험해진다는 말씀입니까?”
잔뜩 인상을 쓴 흑웅의 반문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아, 그러고 보니 흑웅은 이곳 회의가 처음인가? 마수 산맥 수색이나 훈련 때문에 바쁘긴 했지. 그래서 이번에는 무조건 회의에 참석하게 한 거고.
다만 저렇게 거칠게 반응하니 좀 의아하긴 했다.
“이치상으론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마수가 이 시기에는 이상하게 인간이 많이 모인 곳으로만 달려드니 말이야.”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일 겁니다. 대수림은 금지 중의 금지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니까요.”
폴과 지온의 이야기까지 들은 흑웅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수림에도… 사람이 삽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대수롭지 않은 주제로 회의를 시작했다며 가볍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흑웅의 한마디에 싸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후 폴이 거칠게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곳에 사람이 산다니! 확실한 건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곳에서 살다 밖으로 나온 사람이니까요.”
흑웅의 이야기에 로빈은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 이런 식으로 지뢰가…….
기가 막힌 건 로빈만이 아닌지 다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마 각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그럴 테지. 대수림에 사람이 사는 경우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자신만의 시나리오도 생각해 봐야 할 테고.
하지만 흑웅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빈은 마수가 그곳을 쓸어버리고 영지 남부에까지 진출할 거라는 사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피해의 수치를 보면 그렇게 심각하게 진행되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다만 사람 목숨이란 건 숫자로 파악되는 것 이상의 무게감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어쨌든 대수림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플랜을 세울 수 있을 거 같았다.
“뭐, 다 좋은데요. 흑웅 님은 왜 거기에 살았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요? 흑웅 님의 개인 사정을 캐려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설명을 좀 해주셔야 할 거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저도 꼭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니까요. 저희는 모야족이라고. 원시 시대부터 대수림에서 살아가던 부족입니다.”
“부족? 그런 곳에 부족이?”
“모야족이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아! 생각났습니다. 광황(狂皇) 마티아누스! 백색 광증을 앓고 있던 마티아누스 황제가 학살한 그 부족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온의 설명을 들어보니 예전에 백색에 이상할 정도 집착한 미친 황제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 황제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모야족에게 이유 모를 증오를 느껴 잔인하게 학살할 것을 명했고.
제국의 역사가 천 년이나 된다더니 그 긴 시간 동안 정상적이지 못한 황제도 몇 있었나 보다. 피부색이 조금 다르다고 학살하라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참…….
“그런데 흑웅 님의 피부색은 그리 검지 않으신데요.”
흑웅. 처음 봤을 때부터 이곳 사람과는 묘하게 다르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확연하게 다른 느낌인 것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백인이 아니다 뿐이지, 황인이나 흑인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라틴계 혼혈 백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저런 사람들을 보고 피부색을 논하며 살육한 황제가 있다니, 그놈은 눈이 어떻게 된 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 혼혈이니까요. 물론 순수한 모야족이라고 해도 피부색이 아주 어둡진 않습니다.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요.”
모야족은 제국이 팽창하던 히바론 황제 때 제국에 투신해 제국민이 되었다고 한다.
히바론 황제는 제국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원주민 부족들도 제국민으로 받아들인 정복 황제였는데, 원주민도 세금만 낸다면 자랑스러운 제국민이라는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였다.
아마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모야족도 제국민이 된 것이겠지. 그리고 순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걸 보니 제대로 정착해 잘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다만 그 뒤로 이상한 황제 놈이 나타나서 문제였던 거고.
“저희는 마티아누스에게서 도망쳐 다시 저희가 살던 대수림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 모두를 이끌고요. 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 살육당했으니까요.”
“멸망했다고 전해지는 모야족이 대수림에…….”
거지 같은 황제 놈 하나 때문에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모야족.
물론 가슴 아픈 사연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모야족이 언제부터 살았으며, 얼마나 살고 있느냐가 문제 아니겠는가? 게다가 모야족은 금지 중의 금지라는 대수림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던 거고.
로빈이 침착하게 현재 모야족의 상태가 어떤지 묻자 흑웅은 숨김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이야기했다. 비록 자신이 그곳을 떠나기 전인 10년 전의 정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모야족이 대수림에 다시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0여 년 전. 지온이 이야기했던 광황 마티아누스의 제위 시절과 맞물린다.
그러면 150년 전쯤에 발생했던 마수의 빅 웨이브도 겪었다는 건데.
“처음 대수림에 정착한 부족민의 수가 대략 3만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우와, 3만……. 정말 많이도 도망쳤다. 이건 이거대로 대단한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정착한 지 몇십 년 만에 큰 재앙을 만나 많은 가족을 잃었죠.”
딱 시기가 맞다. 정착 후 50년이 지난 시기에 빅 웨이브가 발생했으니까. 빅 웨이브 때 많은 마수가 모야족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고, 큰 피해를 보았지만 결국 완벽하게 퇴치하긴 한 모양이었다.
마수들이 대수림을 타고 밖으로 나오지 못한 건 바로 모야족이 그들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마수들이 대수림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족의 주술사는 예언했습니다. 모야족이 대수림에 사는 동안 큰 무리를 짓게 되면 다시 재앙이 찾아올 거라고요. 그리고 그때부터 모야족은 한 마을에 100명 이상 모이지 않았습니다.”
인구 분산이라.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저 주술사란 놈이 예언한 재앙이란 것이 마수 범람이라면 모이는 사람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 안전하겠지. 마수들 입장에선 아무래도 수천 명도 넘게 모여있는 그레이츠 영지의 에보니 마을이 마수 산맥 근처에 있었으니까. 마수들의 눈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적은 수의 마수들은 여전히 대수림으로 들어갔겠지만 그건 알아서 퇴치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빅 웨이브, 대규모의 마수 범람이 아닐 때의 이야기고, 만약 150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 범람이 발생하면 아무리 인구가 분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위험했다.
아니, 어쩌면 분산되어 있기에 더 위험할지도. 포위당해 공격받을 가능성마저 있었으니 말이다. 마을당 인구가 적으니 방어 시설을 확충할 방법도 없었고.
그래도 참 대단하긴 했다. 마수 범람이 있을 때마다 대수림으로도 마수가 계속 들어갔다는 건데 분산된 상태로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처리하다니.
덕분에 지금까지도 대수림에 사람이 산다는 걸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은 대충 얼마나 남아있나요?”
“마을이 워낙 흩어져 있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만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끙……. 생각보다 많긴 하네요.”
아무리 대수림이 넓다지만 그 정도의 수가 살고 있었다니. 하긴 처음에는 3만이었다니 많이 줄어들긴 했다만.
“그런데 대체 모야족은 어떻게 대수림에서 살 수 있었죠? 원래 대수림에 들어가면 방향 감각이 없어져서 무조건 길을 잃어버린다는데요.”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원래부터 그곳에 살았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그렇다는데, 저희는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음… 그래요?”
역시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인가? 하긴 자신들도 이유를 모르고 있으니.
“아, 그런데 전설 비슷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대수림에 무언가 대단한 물건이 있고, 그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숲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배제한다는 전설이죠. 무슨 결계 같은 거라고 하던가요? 저희는 처음부터 숲에 속해있는 존재고요. 물론 저희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냐, 저 스케일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그 넓은 지역에 결계가…….
갑자기 이렇게 스케일 커지면 어쩌라고?
하, 난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 대수림 쪽이 안전하지 않다는 거군요. 도련님의 예상대로요.”
“예상이라기보다는 혹시나 한 거지만요.”
“대수림의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대비책을 세울 테니까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