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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9화 (29/303)

29화

솔직히 좀 많이 늦긴 했다.

흑웅이 처음 왔을 때 그의 신상 명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일까? 묻지도 않는데 혼자 난 이런 놈이라고 흑웅이 떠벌리는 건 그거대로 웃기니.

혼자 생뚱맞게 한자 이름을 쓸 때부터 무슨 비밀이 있을 거라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그러고 보니 남미 스타일의 외모에 한자 이름이라, 뭔가 이런 인물이 또 있었던 것도 같은데…….

하긴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니까.

“대수림이 위기에 처해있다면 제가 그곳으로 돌아가 상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곳을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인 거 같으니까요.”

“그래주겠나?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군.”

카인이 흑웅의 요청을 바로 승낙했다.

로빈으로서도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저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D-Day가 그리 멀지 않았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가능하면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흑웅이 어떤 정보를 전해주든 간에 최악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야 할 거 같다.

흑웅은 카인이 허락하자마자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며 방법을 생각하는 걸 테지.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수들이 대규모로 습격하는 것을 피하고자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다는 모야족. 그런 만큼 대규모 습격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방어하기 편한 곳에 모두 모여 사는 것이 낫지 않나? 관문 같은 것에 의존해서 말이야. 차라리 남쪽 마을 같은 곳에서 목책을 쌓아놓고 사는 게 더 안전할 텐데.

잠깐, 모야족을 모두 이끌고 나와서 남쪽 마을에 거주시킨다?

그럼 대수림은 비게 될 테고 마수들이 대수림을 넘어오기도 힘들 것이다. 그곳에는 무슨 결계 같은 것이 있다니 아마 그렇겠지? 우린 영지민이 늘어나서 좋고.

아, 제국의 황제에게 박해를 당했다니 역시 그건 힘들려나? 자신들도 제국의 귀족이니 그들 입장에선 믿기 힘들지도.

“아무래도 모야족이 전부 마수들에게 당하고, 마수들이 남쪽 마을까지 습격한다는 가정하에 대비를 해야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로빈은 폴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상념을 멈추고 다시 회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력의 여유가 되겠습니까? 북쪽 관문을 지키는 것도 벅찰 텐데요.”

“곤란하긴 하지만……. 어쨌든 해봐야죠. 기사단만큼은 아니지만, 치안대의 에이스들도 어느 정도 마수를 상대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입을 마법 갑옷을 제작할 수 있을까요?”

“히센 님께 여쭈어봐야 할 테지만. 기사들 것처럼 만드는 건 무리일 겁니다. 최상위 마수의 가죽들은 이미 다 사용했으니까요.”

“아, 그래요? 좀 많이 남았을 줄 알았는데…….”

“남은 가죽들도 다 갑옷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기존 기사들의 갑옷이 급박한 순간에 망가질 수도 있고, 추후에 기사단의 수가 늘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갑옷을 치안대원에게 주기는 조금……. 아마 그 성능을 다 끌어내지도 못할 거라서요. 자칫하면 마나가 폭주할 수도 있고요. 오히려 그들에게는 적당한 수준의 마법 갑옷이 더 유용할 겁니다.”

마나량이 적은 치안대원들이 너무 고성능의 갑옷을 입으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최대한 빨리 몇 벌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네요. 치안대에서 하급 마수와 상대할 만한 병사들은 몇이나 있나요?”

“목책을 앞세우고 상대한다면, 한두 마리를 상대할 병사가 수십 명 정도는 되는군요. 마나를 느꼈지만 기사급이 되지 못한 병사들입니다.”

확실히 더럽게 가난하지만, 무력만은 수준급이었다. 물론 수백 명의 기사를 보유한 황실이나 공작령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경험이 풍부한 기사가 수십에, 마수를 상대할 만한 병사도 수십이라니.

저 병사들도 조금만 더 수련하면 기사급이 되는 거 아닌가?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상황이 급하니 저 병사들도 모두 전력으로 활용해야 했다. 히센 님이 마지막까지 고생하시겠구만.

하지만 영지의 위기였으니 이번에는 히센 님에게 많이 의존해야겠다.

* * *

촉박한 시간이 며칠 더 흘렀지만 대수림으로 떠난 흑웅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이번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크게 벌어지긴 한 모양이다.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는데 가져간 메시지 노트가 하나뿐이라 뭔가 확실해지면 보낼 생각인가?

이 세상에는 무려 양방향 통신구가 있었다. 물론 전화기처럼 여러 사용자와 통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쌍으로 제작되어 서로에게만 연락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어쨌든 편리한 기구였다.

다만 그 가격이 매우 비싸서 그레이츠 자작령에는 없었다.

하지만 서로 간에 연락이 필요한 경우는 많았고, 그럴 경우에는 메시지 노트라는 조금 저렴한 물건을 사용했다.

이건 일방적으로 정보를 알리는 전보 같은 기능을 하는 기구였는데, 메시지 노트에 내용을 기록하면 다른 노트에 그 내용이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물론 일회용이었고.

그리고 흑웅은 한 장의 메시지 노트를 가져갔다. 물론 대수림의 상황을 빠르게 알려달라는 의도였다.

그런데 전혀 소식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

어쨌든 영지는 영지대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히센과 도리아는 최대한 많은 마법 갑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따로 남부 지역을 방어할 병사들의 편제도 정비했다.

폴의 의도대로 얼마 전 치안대의 대장으로 임관한 루이는 그 편제에서 제외된 병사들을 데리고 남부 마을로 이동해 지금도 방어 시설 구축에 한창이었다. 비록 관문처럼 단단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고, 첫눈이 내리는 날까지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자 영지 측에서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제 로빈이 예상한 D-Day가 정말 며칠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전 회의에서 로빈이 남부 쪽으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회의장이 뒤집어졌다.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된다.”

그래, 나도 알아. 진짜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

모두가 한입으로 반대하자 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진짜 자신도 가고 싶지 않았다. 위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따라가는 것이 병사들에게 큰 짐이 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열 살만 되었어도 갑옷이라도 입을 텐데 지금은 몸에 맞는 갑옷조차 없는 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따라가면 병사들은 자신에게 신경이 분산되어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 테고.

뭐, 여러 소설이나 사료를 보면 군주나 왕, 왕자가 전장에 합류해 사기를 증진시킨다지만, 그건 그놈이 싸울 수나 있을 때의 이야기고 다섯 살 아이가 따라 나오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자신이 가야 했다.

“저도 물론 영지에서 안전하게 승리를 기원하고 싶죠. 그런데… 상황이 좀 그렇네요.”

“대체 뭐가 문제냐?”

“후……. 할아버지는 아마 북쪽 관문으로 나가시겠죠? 마수 범람이 일어날 때마다 영주는 그곳을 지켰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저희 영지의 유일한 의무고요. 할아버지가 직접 그곳으로 나가는 건 기사들이나 영지민들의 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테고요.”

“그렇단다.”

항상 마수와 밀접하게 살아가는 이곳이었지만 이런 큰일이 있을 때면 영주가 앞장서 기사들을 이끌었다. 물론 직접 싸우진 않았지만 말이다.

영지민들도 영주가 직접 출정하면 영지에 큰일이 일어났지만, 영주가 직접 나설 만큼 방비가 잘 되어있다고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모든 영지민이 마수 범람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많이들 불안해하기 때문에, 카인이 직접 북쪽 관문으로 출동하는 이런 쇼가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지금 남부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최종 결정권자가 한 명은 가야 해요. 만약 통신구가 한 쌍이라도 있었으면 제가 굳이 안 가도 되었겠지만요.”

“하지만 그쪽은…….”

“그래요. 루이 경이 있죠. 제가 루이 경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병사의 지휘는 당연히 루이 경이 하실 거고요. 하지만 만약 모야족이 다 도망쳐 나왔다면 이들을 받아들일지 말지, 그들이 위급하다고 도움을 청한다면 도울지 말지, 이런 문제들을 루이 경이 바로바로 결정할 수 있을까요? 한시가 급한 상황이잖아요.”

“음…….”

카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자 폴이 바로 반박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야족을 완전히 포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희 영주민도 아닌데요. 대수림으로 습격해 올 마수의 수가 제법 많다고 해도 저희 영지 쪽으로 공격해 올 놈들은 그리 많지는 않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그냥 포기하기에는 모야족의 가치가 생각보다 커요. 생각해 보세요. 유일하게 대수림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저희 영지의 수입원이 뭐가 있나요? 기껏해야 마수 산맥 초입의 약초들과 마수 전리품뿐이잖아요. 만약 그들을 영지민으로 받아들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곳의 자원들을 우리가 독점할 수도 있는 거라고요.”

솔직히 모든 것은 로빈의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욕심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돈 나올 구멍이 거의 없는 영지의 희망이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빈도 아무 계획 없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폴 경의 말처럼 대수림으로 마수들이 들어와도 저희 쪽으로 나오는 놈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대수림 남쪽에도 다른 귀족의 영지가 있잖아요. 마수 놈들이 인간들을 향해서만 질주한다면 저희 쪽보다는 그쪽으로 더 많이 가지 않을까요? 거기 인구가 훨씬 많으니까요. 그러니 생각보다 많이 위험하지는 않을 거예요. 북쪽 관문보다는 확실히 안전하겠죠.”

게다가 로빈은 자신이 퀘스트 창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믿었다.

최악의 경우 30%의 피해.

이 말은 남부 쪽에서 나타나는 마수의 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란 뜻이었다. 만약 많은 마수가 등장하면 영주 성 인근에 있는 영지민을 제외한 50% 정도의 영지민이 피해를 봤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위험할 우려는 거의 없었다.

“후…….”

로빈의 단호한 태도에 폴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로빈의 말대로 일이 풀린다면 작은 도움으로 모야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테고, 영지에 도움이 됨은 확실했다.

문제는 오로지 로빈의 안전이었는데.

“검은 곰 기사단도 남부 쪽으로 배치하기로 했잖아요? 그러니 오히려 북부 관문보다 더 안전하죠. 마수가 얼마나 이쪽으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위험할 일은 없어요. 다들 제 나이가 어려서 상황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돌발 행동을 막을 사람도 필요하고요.”

검은 곰 기사단의 이야기가 나오자 결국 폴도 입을 다물었다.

“제가 어리지만, 영주 일가고 차기 영주가 될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한가롭게 지내도 이런 일이 있을 때는 앞장서는 것이 그레이츠 영지의 영주라고 전 배웠습니다. 할아버지처럼요. 제 나이만 보지 마시고 제 위치를 봐주세요.”

검은 곰 기사단은 남쪽으로 배치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상황을 봐서 단장인 흑웅을 구할 생각일 것이다.

어쩌면 막무가내로 대수림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들의 끈끈한 정은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로빈이 남부를 고집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만약 그들이 무작정 대수림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말리겠다고 말이다.

남쪽 마을을 총괄하는 루이는 영지에서 알아주는 재원이었지만 결국에는 그들과 같은 기사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강제로 명령할 위치가 아니었고.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사람은 영주인 카인, 소영주인 로빈, 그리고 기사 단장인 폴과 흑웅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현재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은 로빈뿐이었다.

“후……. 좋다. 대신 위험하면 무조건 도망치는 거다. 그건 아마 루이가 알아서 하겠지만……. 로빈, 너의 말대로 넌 차기 영주다. 그러니 널 말리지 않겠다. 영주에게 나이란 건 아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대신 네가 차기 영주고 네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영지민 전부라는 걸 절대 잊지 말아라.”

“네. 할아버지.”

그렇게 로빈마저 남쪽 마을로 출발하게 되었다.

로빈이 남쪽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전직 기사였던 세릴은 자신도 같이 가 로빈을 지키겠다고 검을 빼들다가 폴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고, 엄마 마리아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다만 윌리엄은 로빈의 책임감을 높게 사면서 대신 무조건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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