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자신의 이야기에 감탄하는 적호를 보니 이 사람들은 아직도 박해받던 200년 전의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나 보다. 그레이츠 영지 정도는 아니라도 모야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만한 영지가 분명 있을 텐데.
사실 벌써 200년이나 지난 이야기인데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지 않을까?
이런 오해가 호재일지, 악재일지.
“우선 적호 언니의 발언이 다소 무례했다는 것에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 모야족은 제국과 다르게 상대가 족장이라고 반드시 존칭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부족에서 존칭하는 건 위대한 전사들뿐이니까요. 그러다 보니 전사 계급인 적호 언니는 존칭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당장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는 더욱 주의할 테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월아의 사과에 조금 불편한 기색이던 루이와 하워드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적호는 ‘나 또 무슨 사고 친 거야?’라는 얼굴로 월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적호의 발언이 반말로 이어져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거 같았다. 정작 로빈은 적호의 말 속에 담긴 그들의 심리를 읽고 고민하기에 바빴는데.
“네, 괜찮습니다.”
로빈이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이자 월아는 슬쩍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저희는 죽을 때까지 싸우다 대수림에서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었습니다. 마수의 수가 점점 늘어나 어쩔 수 없이 모든 부족민이 한곳에 모인 것이 재앙의 시작이라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흑웅이 저희에게 다른 길을 알려주었죠. 이 마을과 거래한 동쪽 끝 마을의 원로들도 그 의견에 찬성했고요.”
“그 길이란 게…….”
“네. 그레이츠 영지에 의탁하는 것이었습니다. 흑웅과 원로들은 그레이츠령이라면 저희를 편견 없이 봐줄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는데, 오늘 소영주님의 반응을 보니 믿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흑웅과 이 마을과 거래했던 모야족 부족민들의 추천(?)으로 의탁을 결심했다는 이야기.
물론 좋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몇몇 단어가 로빈을 자극했다.
“잠깐만요. 마수가 늘어나서 부족이 모두 한곳에 모였다고요? 그 말씀은 마수가 늘어난 시기가 근래가 아니란 뜻인가요?”
“아, 네. 대수림에 마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8년 전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허……. 그러니까 마수들이 대수림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요? 원래 마수들은 대수림을 꺼리지 않았나요? 무슨 결계 비슷한 것이 있다던데요.”
“예, 예전에는 분명 그랬습니다. 하지만 8년 전부터 그 결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수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고요.”
“결계가… 없다고요? 8년 전부터 마수가 대수림에…….”
이러면 계산이 완전히 달라진다.
대수림이 마수 자생지가 되었다면 이곳 자체가 마수 범람의 시작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마수 산맥에서 내려온 마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그 규모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가능성이 컸다. 대수림과 밀접한 다른 영지들의 부담도 당연히 늘어날 테고.
아니, 대체 왜 이걸 몰랐지?
설마 아까 촌장이 보여준 꺼림칙한 태도는 이것 때문이었나?
8년 동안이나 마수가 살았으면 이 마을 사람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주에게 알리지 않은 거야?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는 바람에 로빈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변수가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 계산하기 위함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거나 벌주는 것은 우선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긴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로빈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가 당황스러워 계산이 바로 서지 않아 모야족의 계획부터 물어보았다. 이렇게 부족민을 모두 이끌고 나서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이런 행동이 있으려면 그들 나름대로 어떤 계획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야족은 결국 어떻게 하기로 한 건가요?”
“흑웅의 의견대로 저희는 이곳으로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전사들은 마을에 남았죠. 흑웅이 설명하던 마수 범람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마수들을 목숨 걸고 막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대수림을 탈출한 그 경로를 배회하면서 말이죠.”
모야족이 탈출하면서 잔뜩 남긴 흔적들 때문에 모일 마수들을 전사들이 게릴라전으로 처리하겠다는 의견.
확실히 부족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나쁜 의견은 아니었다. 다만 대수림에 고립된 전사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일 뿐.
하, 그래서 ‘옥쇄’라고 메시지를 보낸 건가?
“모야족의 전사라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죠? 흑웅 님이랑 비교하면요. 그리고 수는 얼마나 되는데요?”
“흑웅은 상급 전사에 근접한 중급 전사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부족의 상급 전사가 둘뿐이라 실질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입니다. 부족에 전사는 정확히 43명이고요. 부족민을 호위하는 데 13명이 따라나섰으니 그곳에는 30명이 남았습니다.”
아무래도 모야족의 전사는 기사급 무위를 가진 자들을 이야기하나 보다.
대단하네, 모야족. 기사급 전력이 43명이나 된다고?
하긴 그러니 점점 마수 서식지화되어 가는 대수림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았겠지.
모야족이 이쪽으로 탈출하면서 필연적으로 많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기에 상당수의 마수가 이쪽으로 몰릴 테지만, 만약 30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필사적으로 막는다면 이쪽으로 나오는 마수의 수를 상당수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부족민을 보호하기 위해 옥쇄한다는 심정으로 막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모야족의 전사들 13명과 검은 곰 기사단 16명, 도합 29명의 기사와 마수를 상대한 경험이 많은 병사 80명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 물론 30명이나 되는 전사의 생사는 당연히 장담할 수 없을 테지만.
단순히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그게 가장 효율적이긴 한데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모야족을 욕심낸 것은 맞지만 이 일이 이렇게 틀어진 건 사실 그것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8년 전부터 마수가 대수림에서 살고 있었고, 영지의 안전에 대하여 고민하다 대수림에 모야족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된데다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이미 흑웅이 이들을 이곳으로 보내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 퀘스트 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대로 북부의 관문만을 집중적으로 막았다면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자신들이 대수림에 마수가 산다는 걸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곳에서는 모야족과 마수와의 목숨을 건 살육전이 벌어졌을 것이고, 아마 대부분의 모야족이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새어 나온 마수가 남부 마을 여러 곳을 습격해 사람들이 여럿 죽거나 다쳤겠지.
그렇게 되면 훗날 새로운 마수 서식지와 마주하게 되는 영지 남쪽의 사정, 그리고 대수림에 인접해 있는 다른 영지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지금 당장은 피해가 적을 수도 있었다. 모야족 모두의 피를 제물로 삼아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파고든 덕분에 모야족이 이쪽으로 대피했고, 그래서 더욱 위험해졌다.
딱 봐도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듯한 모야족.
전사가 아니라도 건장한 성인이면 어느 정도 무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노약자들은 마수들의 먹이가 되면서 마수를 공격할 틈을 만들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수천에 달하는 모야족이 지옥도를 만들어가며 막아낼 마수들의 공격을 이제 로빈 자신이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저지하지 못하면 대수림의 사정을 전혀 모를 때, 모야족이 희생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마수가 영지 곳곳으로 퍼져 나가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것이다.
어쨌든 일이 이상하게 꼬이다 보니 당장은 이곳의 실상을 모를 때보다 훨씬 위험해졌지만 로빈은 자신이 남부 지역에 대하여 고민한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한 해만 살 것도 아니고 만약 모야족이 모두 죽어버린 후, 그레이츠 영지민만으로 새로운 마수 자생지인 대수림과 마주한다면, 생각보다 더 큰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에서 최우선으로 지키는 북쪽 관문 같은 곳이 한 군데 더 늘어난다는 의미였으니 지금보다 훨씬 피곤해질 수밖에.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역 꿈나무 같은 린도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 일이 잘 풀린다면 훗날 세계에 악영향을 끼칠 거로 예상되는 인물이 하나 줄어드니 그만큼 세상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나서서 세계 평화(?)를 지킬 생각은 전혀 없지만 뭐, 이렇게 기회가 될 때 악역 꿈나무 하나 주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실비아와 비견할 만한 린의 능력이 탐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다. 흠흠.
어쨌든 지금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당장 안전하게 위기를 모면하는 것만을 고민할 수는 없었다. 전사들의 희생으로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건 앞으로도 대수림의 마수와 계속 상대해야 한다는 것까지 계산하면 그리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부 관문을 무난히 지키기 위해 기사들이 무려 50이나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관문도 없는 이곳에서 대수림의 마수들을 견제하는 데 얼마나 많은 전력이 필요할까?
지금 영지에 그런 여유가 있는가? 영지에 늘어난 전력이 검은 곰 기사단 17명 정도뿐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중 가장 중요한 전력인 흑웅은 이미 대수림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다.
차라리 전사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여 다 같이 방어해 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수많은 마수가 바로 흔적을 따라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고 쌓이는 마수 시체만으로도 목책이 무력화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겠지.
모야족이 전사들을 대수림에 남기고 게릴라전을 계획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최대한 전사들의 전력을 보전한다라.
결국 모험을 해야 하나?
그런데 나 지금 다섯 살인데 이게 말이나 되냐? 너무 빡빡한 거 아냐?
하, 진짜 욕 나오네. 봉구야, 네가 만든 세상은 대체 왜 이따위냐?
로빈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 나름대로 심사숙고 후 내린 판단이었다.
“후……. 그렇군요. 하워드 경, 저희가 챙겨온 마법 갑옷이 몇 벌이나 되죠?”
“기사용 갑주가 26벌, 병사용으로 제작한 갑주가 28벌입니다. 이곳으로 출정한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것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도련님의 지시대로 이번에 만든 걸 모조리 가져왔습니다.”
“하, 히센 님이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 짧은 시간에 100벌을 넘게 만드셨으니…….”
“아마 탈진 상태이실 겁니다. 영지 차원에서 예비로 구입했던 마법 재료들도 모두 소진했고요. 그나마 병사용으로 제작된 것에는 한 가지 마법밖에 들어가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인 로빈은 진지한 눈으로 월아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월아 님, 이곳에 따라온 전사들이 열세 분이라고 하셨죠? 아무래도 그분들은 다시 대수림으로 돌아가셔야 할 거 같네요.”
“돌아가라……고요?”
전사들을 모조리 사지로 내모는 듯한 로빈의 말에 월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갔다.
그 모습에 로빈은 그녀가 자신의 말의 오해한 거 같아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분들을 희생시키려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흑웅 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국의 기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보조하는 방어구를 착용해요. 그리고 저희가 이번 마수 범람을 대비해 상당히 우수한 방어구를 갖추게 되었고요. 대수림 내부에서 싸우실 전사 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모두 가져가세요.”
“흑웅이 입고 있던 그 검은 가죽 갑옷인가요?”
“네, 그것과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전투에 도움이 되는 튼튼한 녀석들입니다.”
“아…….”
월아도 흑웅이 입고 있던 그 검은 가죽 갑옷을 본 적이 있었다. 모야족 주술사들이 강해진다면서 성인이 된 부족민들에게 새겨주는 아무 능력 없는 주술 문신과 달리 실제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급 마수들의 이빨에는 흠집이 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갑옷이었다.
그런 기물을 모야족인 흑웅에게 맡겼다는 사실도 그레이츠 영지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줬었지. 그런 갑옷을 수십 개나 모야족 전사들을 위해 내어준다니.
“하워드 경, 경은 대수림을 지원할 기사들을 추려보세요. 수는 열 명. 임무는 흑웅 님을 도와 영지 쪽으로 나오는 마수를 막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모야족 전사들과 무사히 이곳으로 대피하는 겁니다.”
“하지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