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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33화 (33/303)

33화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있기도 하고.

“월아야, 하지만…….”

다만 옆에서 당황하는 적호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월아가 여성 궁수들을 직접 지휘하는 건 모야족의 시선으로는 드문 일이긴 한가 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거로 실랑이하는 건 곤란하지.

“어쨌든 그쪽은 그런 거로 알겠습니다. 그럼 서두르죠. 부족민들은 빨리 북쪽으로 보내주시고, 저희 기사들과 같이 물자를 옮기고 대수림에서 활약할 전사 분들도 보내주시죠. 하워드 경은 대수림에 흑웅 님을 찾아갈 기사들도 모집해 주시고요.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물자에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마법 갑옷도 소중하지만, 전사들이 더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네, 도련님.”

“알겠습니다, 소영주님.”

로빈의 해산 선언에 다들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막사를 떠나갔다. 부족민 쪽을 관리하는 월아와 적호, 기사들을 추릴 하워드, 심지어 병사들을 점검할 루이까지 말이다.

유일하게 막사에 남은 건 로빈과 린뿐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남았지?

이거……. 설마 진정한 미인계는 요 녀석인가?

로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부대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존에 남아있던 영지민들과 목책을 보수했던 치안대 역시 모야족과 함께 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루이가 지휘하는 정예병 80, 모야족의 남성 예비 전사 50, 모야족의 여성 예비 전사 120. 그리고 모야족의 여성 전사 셋과 로빈을 호위할 검은 곰 기사단 여섯이 전부였다.

로빈은 물자를 챙겨 대수림으로 들어가는 20명의 전사, 기사들을 배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무사히 기존의 전사들에게 합류할 수 있겠죠?”

“그럴 겁니다, 도련님. 무장도 철저하고, 대수림 지리에 밝은 전사들도 열 명이나 같이 가니까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해준 갑옷을 받고 그나마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할 것이고.

“대수림에서 마수들이 정신없을 정도로 분탕질을 치고……. 얼마나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요? 모두 살아오길 바라는 건 역시 무리겠죠? 너무 욕심 부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쓸쓸한 로빈의 목소리에 루이도 쉽게 대답하진 못했다. 그도 모두가 살아서 돌아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살아올 수 있을 겁니다. 도련님이 미리 당부한 말도 있으니까요.”

“후……. 그래야죠.”

로빈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원래 이런 곳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렇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자신의 지시에 열 명의 기사가 사지로 들어갔고, 루이를 포함한 일곱 명의 기사와 80명의 병사가 마수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모야족을 제외하고 가족 같은 영지 병력만 계산해도 그 정도였다.

물론 자신의 지시가 아니라도 저들은 그렇게 준비하고, 언제나처럼 마수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은 왠지 저들이 목숨을 거는 것이 전부 자신의 잘못 때문인 거 같았다.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란 것을 자신만 알고 있기 때문일까?

오히려 자신이 좀 더 뻔뻔한 사람이었으면 마음이 편했을까?

물론 로빈은 자신이 제법 뻔뻔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 가질 만한 소소한 뻔뻔함이었다. 나만 배부르고 등 따듯하면 장땡이라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사지로 내몰 정도의 몰상식이 아니라.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거 같아 로빈은 억지로 웃으며 루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월아라는 분, 엄청 예쁘지 않던가요?”

그냥 가볍게 농담조로 이야기한 것인데 루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엄청난 미인이었습니다. 남자라면 무조건 달려들어 자빠트리고 싶을 정도로요. 정말 박음직한 최상급의 엉덩이였죠. 저분이 모야족 족장의 처라는데, 아마 처녀 적에 한 번 따먹어보려고 달라붙은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남자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결국 족장이 차지한 것이겠지만요.”

“음…….”

그냥 예쁘다는 대답 정도가 들려올 거로 생각했는데 뭔가 음담패설이 다소 섞인 대답이 들려와 살짝 당황스러웠다.

하… 여긴 원래 이렇지. 내가 잠시 잊었다. 내가 잘못했네.

게다가 평소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저렇게 대답하니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하긴 이곳은 여자들이랑도 저 정도 수위로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니 그냥 루이 경답게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한 거려나?

음담패설 한 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자꾸 이런 거로 이 세상이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란 걸 확인하고 있다는 건 좀 웃겼지만 말이다.

정신이 든 로빈은 가장 먼저 북부 관문 쪽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그곳은 지금도 전쟁터일 수도 있으니 언제 이 글을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알리긴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상황 급변. 정리 후 지원 바람]

안 좋다고만 하면 북부 관문의 전력을 빼 이곳으로 지원 올까 봐 정리 후 지원해 달라고 했는데, 설마 진짜 당장 달려오거나 그러진 않겠지?

로빈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다고 믿으며 메시지를 날렸다.

* * *

그날 늦은 밤.

부족민들이 이동한 흔적을 따라 싸우겠다는 모야족 전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이 이곳과도 그리 먼 곳은 아니니 아마 지금쯤이면 서로 합류해서 장비를 보급받았을 것이다.

하급 마수의 가죽으로 대충 얽어맨 가죽 갑옷을 입다가 우리 영지에서 정성껏 만든 마법 갑옷을 입고 아마 신세계를 느끼고 있겠지.

로빈이 상념에 잠겨있을 때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병사 하나가 막사를 열었다.

“도련님, 마수입니다.”

“알았어요. 당장 가요.”

드디어 나타났나 보다. 아무리 기사들이 분탕질을 치고 있어도 새어 나오는 놈들은 있겠지. 그 대단한 북쪽 관문에서도 마법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으면 마수를 놓쳐버리니까.

로빈은 허겁지겁 막사를 나서 방어선 쪽으로 뛰어갔다.

로빈이 이곳에 남지 않고 그곳으로 간 이유. 그건 솔직히 거기가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곳이 무너지면 살아날 방도가 전혀 없고, 모든 병사가 싸우러 간 와중에 혼자 있다가 눈먼 마수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여기에 숨어있겠다고 하면 기사들이 자신을 지키겠지만, 가장 강력한 전력인 기사를 데리고 혼자 숨어있는 건 솔직히 너무 꼴불견이라서 기사들을 이미 그쪽으로 보내놓은 후였다.

처음에는 이곳을 지키겠다던 기사들도 로빈이 마수가 등장하면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자 이곳에 죽치고 있지 않고 전선 쪽에 합류했다.

로빈이 현장에 등장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숲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수십 마리의 랩터 떼가 달려드는 것이었다.

하늘에는 하얀 눈이, 정면에서는 랩터 떼가.

로빈은 문득 지금 하늘에서 내려와 병사들의 체온을 떨어뜨리는 눈송이와 저 앞의 랩터 모두, 전생에서의 군 복무 시절 새벽 연병장에 끝없이 떨어지던 악마의 똥 가루처럼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눈은 같은 눈이긴 한가?

슝~!

그 순간 한 여성이 늠름한 자태로 활시위를 놓았고, 그 뒤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수많은 여성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월아의 신호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슝~슉~슉~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100여 개의 화살이 일제히 랩터를 향해 날아가 그들의 몸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제법 명중률이 높은지 랩터가 비틀거리는 모습만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나를 다룬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정말 좋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도 마나의 도움을 받아 상대를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저 정확한 사격도 아마 마나의 도움이 제법 컸을 것이다. 기사들은 이 와중에도 랩터가 몇 마리나 상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테고.

이곳에서 유일, 아니 거의 유일하게 마나를 느끼지 못한 로빈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고 집중하고 있었다.

몇몇은 쓰러지고 살아남은 랩터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들이밀며 방패를 들고 선두 열을 지키는 병사들과 강하게 충돌했다.

“찔러!”

선두 열의 병사들이 랩터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며 버티자 루이가 이어 후열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했다. 대기하던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방패의 틈 사이로 날카로운 창끝을 밀어 넣어 랩터를 공격했다.

푹! 푹! 케~엑!

창날이 몸에 박히는 소리와 랩터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트렸고 거칠게 공격하는 랩터와 온 힘을 다해 막아내는 방패병, 그리고 필사적으로 찔러대는 창병의 사투가 한동안 이어졌다.

처음 목격한 야만스럽고 잔인한 전투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몸을 떨고 있는 로빈의 시종, 듀발이 있었다.

자신의 몸통보다 큰 방패를 든 듀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로빈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안심하십시오, 도… 도련님. 제가 목숨 걸고 막겠습니다.”

아니, 네가 더 떠는 거 같은데. 고작 여덟 살이 누굴 지키겠다고 그래. 그리고 여기까지 마수가 오면 그건 이미 게임 끝 아냐?

긴장하던 로빈도 자신을 지키겠다면서 더 긴장한 듀발의 모습이 너무 황당해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고 말았다.

경험도 좋지만, 이 녀석까지 여기에 따라올 필요가 있었나? 물론 자신을 지키겠다는 각오 하나로 바득바득 우겨서 따라온 거지만.

하지만 자기도 무서울 텐데 여덟 살 주제에 누굴 지키겠다고 앞을 막아선 듀발의 마음만은 고마워서 부드럽게 그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래. 믿어볼게.”

“네!”

그리고 이곳에는 린도 함께였다.

요 녀석은 대체 왜 안 데려간 거지? 그냥 보내기는 조금 꺼림칙해 굳이 데려가라고 하진 않았지만 좀 이상하긴 했다.

전투력이 전혀 없는 세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는 어이없는 장면 너머로 전투의 양상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일발 사격 후, 틈틈이 뒤쪽의 랩터를 공격하는 모야족 궁수.

굳건하게 랩터의 충돌을 버티고 공격을 막아서는 방패병, 그리고 뒤쪽에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가는 창병.

물론 하급 마수를 상대할 때밖에는 쓸 수 없는 전략이지만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불행히도 랩터만이 아니었다.

“컥!”

어디선가 날아온 돌덩이 하나가 방패병의 방패에 충돌하며 병사는 그 충격에 순간 주저앉고 말았으니까.

“돌이다! 병사들은 충격에 대비하라! 우라이다! 나무 위에서 놈을 찾아라!”

루이의 명령이 전달되자마자 창수들은 재빠르게 방패병 뒤로 몸을 숨겼다.

우라이. 원숭이랑 비슷하게 생긴 이놈은 나무나 언덕 위에서 자신의 긴 팔을 이용해 돌이나 무거운 물건을 던져 상대를 공격한 후, 쓰러지면 다가와 잡아먹는 영악한 놈이었다. 물론 영악한 만큼 몸의 가죽은 두껍지 않아 쉽게 잡을 수 있긴 했지만.

다만 이렇게 난전이 시작된 후 돌 공격을 받으면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우라이를 사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빠르게 발견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밤, 어두울 때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 병사들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의 명령을 들은 전사들, 이곳에 남은 세 여성 전사들은 랩터를 타고 넘어 숲 쪽으로 내달렸다. 그 선두에는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적호가 있었고.

적호는 숲 쪽에 접근하자마자 적을 발견했는지 자신의 도끼를 날려 한 놈을 나무 위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수십 발의 화살이 근처로 빗발쳐 하나둘씩 놈들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세 전사는 떨어진 놈들을 수확하듯 베어 넘기고 있었고.

첫 습격이 랩터로만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한 기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방패병이 버티는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 랩터들을 빠르게 제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근처에 더 이상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기사들은 아낌없이 마나를 쏟아부었다. 지금까지 랩터를 상대했던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듯이 말이다.

마수 범람이 시작된 첫날밤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 * *

첫 습격은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마수와 직접 충돌하는 공포를 이겨내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 방패병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피해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돌을 맞고 주저앉은 병사를 시작으로 몇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니 말이다.

상대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수 떼였고 병사들의 수는 정해져 있으니 이런 식의 소모전이 계속된다면 결국 방어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예비대로 남아있던 모야족 예비 전사들은 서둘러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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