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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34화 (34/303)

34화

수십 마리의 랩터 떼, 열댓 마리의 우라이 시체를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특히 랩터 떼의 시체가 목책 앞에 쌓이면 목책이 목적을 다하기 어려우니 서둘러 치워야 했다.

루이는 랩터의 시체를 숲 입구에 버려놓아 놈들의 진로를 조금이라도 방해하려고 했다. 인간만을 목적으로 달려드는 마수 범람이 아니라면 다른 마수들을 유인하는 꼴밖에 안 되겠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장애물을 만드는 것도 유효했다.

“네 분이 돌아가셨다고요?”

“네. 방패병만 네 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는 여섯 명이고요.”

첫 습격에서 방패병만 네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로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패병의 수는 총 50. 목책 뒤에서 방패를 들고 촘촘하게 방어하려면 대충 20명이 필요하단 걸 생각해 보면 두 조 정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마수가 시간을 정해놓고 쳐들어오는 건 아니기에 방패병은 계속 전방을 지켜야 하므로 부득이하게 2개 조로 돌리는 것이었다. 물론 여유만 있다면 3개 조나 4개 조로 만들어 돌리겠지만.

어쨌든 앞으로도 상대의 공격을 직접 방어하는 방패병들은 계속 피해가 누적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부드럽게 방어했는데도 사상자가 나오다니.

죽은 사람이 네 명이고 부상자는 여섯 명이었으니, 실제로는 20%의 전력이 손실된 것이었다.

“하……. 앞으로 몇 번의 공격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데…….”

“처음이지만 랩터의 수가 27마리, 우라이가 13마리였습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선전한 것이죠. 기사들이 달려들었으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겠지만, 기사의 마나는 무한한 것이 아니고 적이 더 늘어날 경우를 대비했어야 하니까요.”

“그건 알고 있지만…….”

알고 있어도 답답한 건 답답한 거였다.

그렇게 여러 번의 습격이 계속 이어졌다.

가장 흔한 랩터부터 들소처럼 돌진하는 루터카우, 기습적으로 돌을 던지는 우라이, 혓바닥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루디프러그까지. 정말 다양한 마수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다.

계속된 공격에 가만히 지켜보던 로빈마저 지칠 지경이었다.

대충 걸러서 오는 놈들이 이 정도라니, 도대체 북쪽 방벽이나 대수림 안에서 마수를 상대하는 기사들은 얼마나 거친 사투를 벌이고 있을까? 마나의 힘으로 회복력이 월등한 기사라지만 얼마나 힘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괴로운 것은 로빈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예비대로 마수만 치우던 모야족 예비 전사들이 다치거나 쓰러진 방패병들에게서 방패와 갑옷을 이어받아 상대의 공격 흘려 막는 연습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다치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 편하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았다. 여자들이 활을 쏘면서 활약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그런 거 같았고.

미친 듯이 연습하던 이 남자들.

비록 연습 시간은 짧았지만, 이 야생 남자들은 순발력과 힘, 그리고 민첩성까지 모든 신체 능력이 발군이었다.

그리고 첫 투입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크아아!”

오늘 마을을 습격한 건 다름 아닌 루터카우.

소처럼 생긴 이 마수는 생긴 것처럼 강력한 돌파력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방패병도 혼자서 이놈을 막을 수 없었다. 두세 명이 달라붙고 등 뒤에서 다른 병사가 보조하면서 경우 밀어낼 뿐이었고.

하지만 오늘 방패를 든 야생 남자들은 이 묵직한 놈들을 혼자서 막아내고 있었다.

“하… 무슨 힘이……. 그래도 조금씩 밀리네. 역시 무리인가?”

로빈도 그 모습에 감탄을 터트렸지만 이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자 역시 무리인가 싶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까스로 버티다가 루터카우에게 조금씩 밀리던 야생 남자의 얼굴에서 안 보이던 문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더니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마나를 먹고 빛나는 것처럼 은은하고 몽환적인 빛이었다.

그렇게 마나를 먹고 자란 문양은 울부짖는 호랑이의 모습을 완성하고도 계속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는 문양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다시 한 번 괴성을 터트린 남자는 자신의 힘만으로 루터카우를 밀어 넘어트렸다. 이어 뒤쪽에 대기하던 창병들이 날카로운 창으로 꼬치로 만들어버렸고.

처음 돌진만 막아내면 수월히 공략할 수 있는 초식형 마수의 최후였다.

“하……. 모야족, 대체 뭐야? 계속 생각지도 못한 게 튀어나오네. 무슨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어? 진짜 미치겠군.”

로빈은 아직도 남자의 얼굴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호랑이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주술사가 있다더니, 무슨 주술 문양인가? 저거 설마 생명력을 갉아먹으면서 폭주한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로빈의 의구심은 깊어만 갔다.

하지만 만약 저것이 무슨 자폭 문양 같은 것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모야족은 생각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었나 보다.

* * *

모야족 예비 전사들이 방패병을 보조하며 그들의 짐을 나누자, 진영은 더 단단해졌다. 방어가 굳건해지면서 공격하는 창병들과 궁수들까지 안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내부에서 활동하는 전사들이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지 3일 차에 접어들면서 습격 빈도도 뜸해지고 있어서 상황을 정비하며 4일 차엔 잠시 휴식할 여유까지 얻게 되었다.

비록 이 여유가 얼마나 이어질지 알 수 없었으나 3일 만에 얻게 된 휴식은 모두에게 꿀맛 같았다. 아무리 잘 훈련된 병사라도 기계처럼 계속 싸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부상병의 상황은 어떤가요?”

자신의 막사에서 로빈은 루이를 불러 병사들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치료사들이 만들어놓은 약들이 제법 효과가 좋아서 부상자 중에는 더 이상 사망자가 나올 거 같진 않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거동이 힘들겠죠.”

“그래요? 불행 중 다행이네요.”

부상자들의 병세가 더는 악화하지 않을 것 같다는 루이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빈은 이런 상황에서 약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현대도 아니고 판타지 세계인데, 이럴 때 제대로 된 신관이라도 있다면 별다른 후유증 없이 회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지에 신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우리 영지에 없는 것이 너무 많아 가슴이 아프네요.”

“신관이 있으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격전지에 신관을 데리고 올 순 없었을 테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특히 사지 중 하나가 끊어진 경우라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교단에 따라 압도적인 외상 치유 능력을 갖춘 곳도 있긴 하지만…….”

“교단 사이에서도 차이가 심한가요?”

“네, 특히 외상 쪽은 사랑과 봉사의 여신 쪽이 압도적이랍니다. 신성력으로 끊어진 사지까지 회복시켜 준다니까요.”

“허……. 그건 진짜 대단하네요. 저희 영지에도 신전이 들어왔으면 좋겠지만, 무리겠죠?”

“그곳이 장소를 가리는 교단은 아니긴 합니다. 좀 애매한 이유로 영주들이 싫어하는 경우는 있다지만요. 다만 그래도 최소한 신전 정도는 지어줘야 할 텐데…….”

“그렇군요.”

외상 치료에 특화된 교단이라니, 솔직히 조금 탐났다.

하지만 교단도 돈이 있어야 굴러가는 거고 그레이츠 영지처럼 돈이 안 되는 곳에 신전이 생겨나길 바라는 건 조금 무리였다. 솔직히 지금은 신전을 만들어줄 돈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안타까운 부상자들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 막사로 월아가 들어섰다. 모야족 예비 전사들의 상태와 갑작스럽게 드러난 이상한 문신에 관하여 묻기 위해 로빈이 청한 것이었다.

“절 찾으셨다고요?”

“네, 월아 님. 우선 지금까지 방어하는 데 부족의 궁수들이 큰 몫을 해주었어요. 영지를 대표해서 감사드릴게요.”

“아니에요. 이제 저희도 영지민인데요. 당연히 해야 할 바를 다한 거죠. 그리고 보내주신 약으로 다친 예비 전사들도 빠르게 회복하고 있습니다. 소영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자신들도 영지민이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월아의 말에 로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떠봤는데 저렇게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 다행히 모야족 내부에서도 그레이츠 영지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정이 나긴 했나 보다. 혹시 이 위기를 넘기고 전사들까지 상당수 살아오게 된다면 다른 계산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사람은 돌발 상황에서 본심이 나온다고 했으니 지금 저 자연스러운 대답에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 묻어있을 것이다.

아, 차라리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적호를 부를 걸 그랬나? 하지만 뒤에 있을 물음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을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월아를 불러야 했다.

“그런데 오늘 엄청 놀랐어요. 예비 전사 분 얼굴에서 이상한 문양이 빛나는 바람에…….”

“아, 예. 그러게요.”

방긋 웃으며 묻는 로빈의 질문에 월아는 조금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뭐지, 이 이상한 반응은?

이거 왠지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당황했다는 반응인데. 모야족의 비밀 무기가 아닌 건가?

그렇게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월아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월아의 대답에 로빈도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희 모야족에서는 예비 전사나 전사가 성인이 되면 루피렌이라는 투명한 액체로 문신을 새긴답니다. 다산과 행복, 그리고 힘을 기원하는 그런 주술 문신이죠.”

힘은 그렇다 치지만 다산과 행복인데, 호랑이에 곰, 사자 문양을 새긴다니 이 부족도 뭔가 좀…….

로빈은 오늘 본 문신의 종류가 다 맹수뿐이었는데 그 문신이 저런 의미였다는 게 조금 어이없었다. 게다가 투명한 액체로 그 정도로 정교한 문신을 새겼다니, 이거 은근히 대단한 거 아닌가?

“그런데 원래 그 문신이 오늘처럼 빛나면서 특별한 힘을 주는 문신은 아니랍니다. 그냥 안 보이는 상태로 남아 은연중에 자신의 몸을 지켜주는 미신과 같은 건데, 오늘은 대체 왜 그렇게 빛났는지…….”

“그러니까 월아 님도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는 거네요.”

무슨 모야족의 비밀 병기일까 싶어 혹시나 했는데 괜한 기대였나 보다. 아니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있으니 상관없지 않나?

갑작스럽게 문신이 빛나면서 힘을 준 이유라.

“오늘 방패를 든 예비 전사들의 상태는 어떤가요? 그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셨겠죠?”

“네, 몸속의 모든 마나를 쥐어짰는데 서서히 마나가 문신으로 모이는 기분이더니 갑자기 힘이 났다고…….”

“혹시 몸 상태가 안 좋아지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그런 느낌은 아니라고 해요. 힘도 평소보다 2할에서 3할 정도 배가된 기분이었다고 하고요. 아, 전투 후에는 평소보다 좀 더 피곤하긴 하다는데…….”

그 정도 수치면 대단하긴 해도 생명을 불태울 정도는 아닌 거 같았다. 평소보다 더 피곤한 정도로 다른 후유증은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체 갑자기 무슨 조화인지.

“그 문신이란 게 모야족 전사면 모두 새기는 건가요? 남녀 상관없이요?”

“네. 부족의 주술사가 루피렌을 만들어서 직접 새겨주니까요. 사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문신을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새겨야 한다는 건 조금 안타까웠는데 오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 수혜를 입었네요.”

“어차피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는 문신인데 새기는 게 꺼려질 이유가 있나요?”

“그… 문신을 새기는 과정이 좀 고통스러워서요. 아무래도…….”

하긴. 대수림에서 살아가는 모야족이 의약품을 넉넉하게 갖추고 있을 리도 없고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마취제 비슷한 걸 만들긴 하겠지만 전문적인 약품처럼 효과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월아 님도 문신이 있나요?”

“네. 여성들도 새기니 저도 있습니다.”

“헤… 오늘 보니 대부분의 예비 전사가 얼굴에 문신을 새겼던데 원래 그곳에 새기는 건가요? 얼굴이라서 더 아플 거 같아서요.”

로빈의 물음에 월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 전사들은 얼굴이나 어깨, 그리고 등. 이렇게 세 군데 중에 자신이 선택해서 문신을 새기는데 대부분 가장 고통스러운 얼굴에 문신을 새기죠. 대체 왜 그러는지…….”

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월아의 어조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남자의 쓸데없는 허세가 또 이런 식으로…….

왠지 남들이 다 얼굴에 새기니 나도 질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굳이 아픈 곳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월아는 그걸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거고.

하지만 문신을 새기는 위치가 정해져 있는 거 같은데 그럼 여자는 어디에 새기는 거지?

“그럼 여자 분들은…….”

“여성들은 가슴이나 엉덩이, 허벅지 깊숙한 곳, 아니면 배꼽 아래 깊숙한 곳 둔덕에 새기는데, 특별히 선호하는 곳은 없고 자신의 취향대로 새기게 됩니다.”

“끙……. 혹시 여성분들도 호랑이 같은 걸 새기나요?”

“아뇨, 여자들은 대부분 꽃이나 나비 같은 미적으로 아름다운 걸 새기죠. 가장 인기 있는 건 역시 꽃이고요.”

아니, 등이나 팔같이 좋은 곳이 많은데 왜 하필 그런 이상한 데다가 문신을 새기는 거야? 아무리 안 보인다지만 참 어이가 없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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