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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35화 (35/303)

35화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곳에 새겨진 문신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크게 저으며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월아 님도 오늘 예비 전사들의 문신이 빛난 이유는 정확히 모르신다는 거네요.”

“네, 그건 그런데…….”

로빈의 의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월아는 뭔가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생각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합니다.”

“오호, 그래요?”

“네. 평소에 빛나지 않던 문신이 갑자기 빛났고, 평소와 오늘이 달랐던 것은 사실 마법 갑옷의 착용 여부뿐입니다. 마나를 끝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마수와 싸우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마법 갑옷이라…….”

“사실 돌아오자마자 실험을 좀 해봤는데 마법 갑옷을 벗고 마나를 끌어올려도 문신이 빛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갑옷을 착용하니 문신이 빛났고요.”

“명확하네요.”

“네, 아무래도…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모양입니다.”

“좋네요. 진작에 말씀하시지.”

이렇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 말을 흐리다니, 이 여자도 참……. 설마 생긴 거답지 않게 은근히 구박받으면서 살았던 거 아냐? 전생이었으면 진짜 여왕님 취급받고 살았을 여잔데.

에이, 그건 아니겠지. 하긴, 그랬으면 애초에 남편을 대신해서 대표로 교섭에 나서지도 않았을 거고.

그냥 모야족 내에선 여성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 자체가 조금 드문 일이라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거 같았다.

어쨌든 원리는 나중에 히센 님의 도움을 받아 파악하기로 하고 중요한 건 호재를 잘 이용하는 거였다. 특히 피로가 많이 쌓인다니 적당히 잘 조절하는 것도 중요했다. 왠지 저 모야족 예비 전사들은 은근히 앞뒤 안 가리는 스타일인 거 같으니 말이다.

만약 무작정 온 힘을 다해 탈진했는데 뒤이어 마수들의 추가 공격이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지 않은가.

로빈은 영지에 여기사가 없어 여성용 갑옷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만약 여기사용 갑옷이 있었으면 모야족 여전사 셋에게 갑옷을 입히고 순간적인 화력을 기대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없는 건 없는 거고, 당분간은 이 전력을 잘 이용해 마수를 막아야 했다.

“잘 알았어요. 어쨌든 좋은 일이니 잘 이용해야죠. 월아 님도 예비 전사들에게 잘 당부해 주세요. 너무 기분 내다가 탈진이라도 하면 곤란해진다고요.”

“네, 엄중히 경고하겠습니다. 다만 부족의 예비 전사들에게는 제 말이 가벼울 수 있으니 소영주님의 권위에 의존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셔도 돼요. 특히 문제가 생긴다면 그 자체만으로 부족에 큰 해를 입히는 거라고 여러 번 강조하면 효과가 괜찮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는데 조금만 더 힘내요.”

월아는 조금만 더 힘내자는 로빈의 말에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막사를 떠났다.

“후……. 지금은 한가해서 좋은데, 이렇게 끝나지는 않겠죠?”

“네, 그럴 겁니다. 지금이 4일 차고, 마수 범람은 대부분 6~7일 정도는 지속되는데…….”

“막바지에 이를수록 점점 더 많은 놈이 튀어나오죠. 지금은 전사들이 활약하고 있어서 수가 많이 준 거 같은데 끝에 다가갈수록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숫자의 마수들이 공격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도련님의 지시대로 상황이 안 좋아지면 복귀할 겁니다. 모야족은 부족에 대한 애정과 충성이 대단한 거 같으니 도련님의 협박을 가볍게 여기진 못할 테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 * *

한편 자신의 막사로 돌아간 월아도 한숨을 쉬며 앞날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딸인 린과 적호가 같이 머물고 있었다.

“꼬맹이 소영주가 뭐래?”

“하, 언니. 이제 말을 조심해야 한다니까요. 꼬맹이가 뭐예요?”

“에이, 꼬맹이는 맞잖아. 귀엽게 생긴 꼬맹이. 린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던데, 뭘.”

“아니, 그건 맞지만…….”

하긴 사실 자신도 대표라고 딱 나선 다섯 살 아이의 모습에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었지. 물론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그런 생각을 바로 고쳐먹었지만. 그러니 적호같이 단순하게 사는 사람은 가볍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빼고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아냐.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기분 나쁘게 할까 봐.”

“후~ 그건 그렇죠. 기분 상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긴 하니까요. 언니는 존댓말에 익숙하지 않으니…….”

“그나저나, 꼬맹이 소영주는 내가 알던 제국 귀족이랑 너무 다르던데. 흉악하고 잔인하다고 하지 않았어? 내 눈에는 귀엽기만 해서 내가 당황했잖아. 게다가 네가 사과할 때는 내가 또 무슨 큰 사고를 친 줄 알고 살짝 얼었는데 그건 또 가볍게 넘어갔고. 옆에 기사들의 분위기 때문에 난 목이라도 달아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랬죠. 언니가 실수한 건 맞지만 당사자가 그냥 가볍게 넘어갔으니까요.”

월아는 처음 로빈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부족의 안전과 정착을 허락받기 위해 대표자를 만나는 자리.

그리고 놀랍게도 상대는 몹시 귀여운 아이였다. 소년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어린, 말 그대로 그냥 아이. 여섯 살짜리 자신의 딸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으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제국의 귀족이 얼마나 흉포하고 모야족을, 특히 모야족 여성들을 경멸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하여 어른들에게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월아는 상대가 어린아이라고 해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아이라서 어디로 튈지 몰라 더 긴장했었다.

하지만 상대는 상상 이상으로 합리적이고 말이 통했다. 딸인 린을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자신들의 입장과 사정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협상 상대가 또 있을까?

게다가 전해진 바와는 다르게 자신들을 혐오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흑웅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흑웅이 인정받았다지만 그는 엄연한 전사. 세상 어디서도 인정받는 전사였고, 자신들이 데려가는 건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부족민이 아니던가. 최악의 경우에는 바로 노예가 되거나 그 자리에서 바로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잘 풀려 이렇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마수와 싸우고 있었다. 특히 대수림에 남은 전사들을 위해 귀한 방어구를 모두 전해주고 영지의 기사들까지 추가로 지원해 준 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모야족으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전사들을 강제로라도 끌고 나오란 말에는 깊은 감사를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주인은 정말 그런 곳에서 죽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었기에.

확실히 제국의 귀족은 정말 대단했다. 도대체 어떤 종자들이길래 저 나이에 이런 전장에서도 저렇게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

제법 말괄량이라 모야족 최고의 전사가 되겠다며 방방 뛰어다니던 린도 상황이 급박하게 변할 때면 말수가 줄어들고 의기소침해져 두려움에 떠는데, 귀족이라는 저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상황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존재를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괴물이라 부를까?

월아는 그래서 로빈이라는 존재가 더 꺼려졌고,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보다 더 파격적이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여자들을 마수들과 싸우는 전장에 세운 건 좀 대단했지.”

“그러게요. 소영주가 특이한 건지 아니면 원래 제국은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저희도 부족과 영지를 위해 한 손 보탤 수 있었죠.”

모야족은 여성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물론 보호받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보호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만큼 제한도 많았다. 그리고 그 제한에서 벗어나는 건 오직 전사가 되는 방법뿐이었다.

“전사라고 다 자유로운 건 아니지. 난 부족을 지키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없으니까.”

모야족은 전장에서 부족을 지키고 전사로서 죽는 걸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남성 전사뿐이었다. 로빈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그게 모야족의 전통이었다.

“하……. 주인님은 괜찮으시겠지?”

“그럼요, 언니. 모야족 최고의 전사시잖아요.”

월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짓는 적호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눈앞의 적호는 셋뿐인 모야족 여전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전사가 된 것은 자신의 주인이자 모야족 족장인 대전사 백랑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어렵게 전사의 자리에 올라 지금까지 백랑의 옆을 지킬 수 있었지만 정작 부족의 성쇠가 달린 이번 전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단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랑과 함께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 전사가 된 적호가 작전에서 배제되었을 때 느낀 상실감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로빈이 이곳에서라도 날뛰게 해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화병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최고 전사. 우리 주인님이 최고 전사지.”

쓴웃음을 짓던 적호는 옆에 있던 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린~ 여자가 주인을 지키려면 최고 전사가 되어야 해. 이 큰엄마처럼 평범한 전사밖에 못 되면 이렇게 멀리서 구경만 하는 거야.”

“응, 큰엄마! 린은 무조건 노력해서 최고 전사가 될 거야. 그래서 내 주인은 내가 지킬 거야.”

“그래그래, 린. 넌 그럴 수 있어. 넌 나보다 더 재능 있는 아이니까.”

월아는 린과 적호의 대화를 듣고 한숨지었다. 도대체 린은 자신의 딸인데 왜 큰엄마인 적호랑만 저렇게 죽이 잘 맞는지. 게다가 자세히 살피라고 로빈의 옆에 데려다놓았더니 보라는 건 안 보고 쓸데없는 것만 보고 온다.

“귀요미가 큰엄마가 도끼 던지는 걸 보고 감탄했어.”

“엄마랑 언니들이 쏜 화살이 뭐로 만든 건지 궁금해했어. 생각보다 파괴력이 있다면서.”

“부상병에 관심이 많은지 틈만 나면 병동으로 들어가 환자를 살펴보고 있어.”

소영주인 로빈이 귀엽게 생겼다며 그가 나중에 알면 뒤집어질 저런 애칭으로 부르던 린은 초반에는 이런 제법 괜찮은 정보를 건네줬었는데.

“귀요미가 오늘 엄마의 엉덩이를 세 번, 가슴을 네 번 쳐다봤어.”

“활을 거칠게 쏘다가 요희 언니의 허리끈이 풀리는 바람에 치마가 내려갔는데 귀요미가 멍하니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어.”

“귀요미 옆에 있던 허약이는 맨날 언니들을 힐끔힐끔 쳐다봐.”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구전과는 달리 제국 남성이 모야족 여성을 혐오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성들의 수가 남성들보다 훨씬 많은 모야족의 입장에서는 이 점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사히 살아 나갈 수만 있으면 이곳에 모인 부족의 예비 여전사들이 제국의 예비 전사들(병사들)과 눈이 맞아 짝을 지을 수도 있었으니까.

오늘따라 더욱 주인이 보고 싶었다. 부디 무사히 대수림에서 벗어났으면 좋으련만.

계속 싸울 때는 이런 잡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한가해 이런 생각이 자꾸 든다.

월아는 상념을 지우고 부족의 예비 전사들을 찾아 로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월아의 이야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예비 전사들도 로빈의 협박에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부족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남자들에게 로빈의 협박 섞인 호소는 쥐약과 같았으니 말이다.

* * *

마수 범람 5일 차인 다음 날, 새벽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온다는 말처럼, 전날 잠잠했던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듯 많은 수의 마수들이 숲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그 뒤로도 계속 마수가 튀어나왔다.

수도 수지만 종류까지 다양해 막는 데 까다롭기 그지없었는데 그래도 그나마 방패병 역할에 충실한 모야족 예비 전사들 덕분에 간신히 막아내고는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끊임없는 공격이 반복되면서 모든 병사가 서서히 지쳐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날 쉬긴 했지만 그전의 3일 동안 쌓였던 피로로 만만치 않았고, 지금처럼 계속 마수가 쏟아져 나오면 사실 답이 없었다.

게다가 목책 앞에 쌓이는 마수들의 시체도 문제였다. 그걸 치우지 못해 목책이 제구실을 하기 힘들어졌고, 상대적으로 높이에서 우위를 점한 마수들은 더 편하게 방패병을, 심지어는 창병까지 공격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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