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니, 얘들 왜 이래? 원래 이렇게 계속 쏟아져 나오진 않았잖아요.”
“그렇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루이의 대답에 로빈도 사태의 심각함에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쩌지? 계속 이렇게 쏟아지면……. 진짜 어제의 휴식이 최후의 만찬 같은 거였나?
로빈은 급격히 안 좋아지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하여 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전방에 마수가 너무 쌓여 동쪽으로 우회하는 놈들이 생겨나고 그놈들을 기사들과 예비로 남아있던 방패병까지 달라붙어 막아야 할 상황이 되자 루이는 슬슬 로빈을 데리고 탈출할 계획을 점검했다. 듀발은 능력도 안 되면서 로빈의 뒤를 끝까지 지키며 목숨을 걸 각오로 방패를 움켜쥐고 있었고.
눈치 빠른 로빈이 이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할 리는 만무했고 그 자신도 시시각각 급변하는 상황에 어찌 대처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더 강하게 밀어! 밀리면 죽는다!”
“쏴! 계속 쏴라! 우리 뒤에는 부족민들이 있다. 우리가 쓰러지면 그다음은 그들 차례다!”
“한 놈이라도 더 죽여! 영광스러운 죽음이 머지않았다!”
“뒤져라, 이 새끼들아! 우리 마을론 못 가!”
하지만 처절하게 외치며 혼신을 다하는 모야족과 영지 병사들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자신과 루이가 빠진다면? 전선이 지금처럼 유지되지도 못할 것이다. 특히 앞에서 거북이처럼 버티고 있는 저 모야족 예비 전사들은 마수와 같이 죽자고 달려들 테지?
그러면 바로 진영이 붕괴되고…….
내 목숨도 소중하지만… 이들도 다른 사람의 귀한 아버지요, 아들딸일 텐데.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리아나와 윌리엄,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망가야 할 텐데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다.
하, 나 진짜 이런 놈 아니잖아? 네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냐?
순간 루이와 눈이 마주쳤다.
다섯 살의 어린 도련님을 강제로라도 끌고 가려고 했던 루이는 로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느낌. 평소에도 신기한 도련님이지만 오늘은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영지의 병사들을 두고 절대 혼자 도망갈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 그리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각오.
저게 정녕 다섯 살의 눈빛이란 말인가?
잠시 로빈과 눈으로 대화하던 루이는 그의 눈빛이 끝까지 변하지 않자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잦아들었다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
이건 또 더럽게 운치 있었다.
만약 도련님을 챙겨서 도망가지 못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도련님보다 먼저 죽어야겠지.
어차피 완전히 난전 상황이 되어 뭐라고 명령할 필요조차 없는 전선을 바라보며 루이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동쪽 전선으로 몸을 날렸다.
로빈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최후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던 루이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폭발시키자 그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차기 기사단장. 선봉 돌격 기사.
지금은 치안대를 맡고 있지만, 지금까지 최전선에서 온갖 마수들을 상대했던 루이는 검은 곰 기사단의 다른 기사들보다 마수를 상대한 경험이 월등했다.
빠르고, 강하게 무조건 목을 베어 나간다.
루이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여지없이 마수들이 쓰러져갔다. 힘의 분배, 뒤를 보는 조심성 따위는 전혀 없이 저돌적으로 상대를 죽이겠다는 치명적인 공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마치 오늘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루이… 경.”
로빈은 루이의 타이틀을 확인한 후 지금까지 폴보다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틀만이 다는 아니라는 듯 지금 저렇게 엄청난 무위를 선보이고 있다니.
오늘 루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왔던 폴보다도 더욱 강해 보였다. 아마 지금 저렇게 루이가 미친 듯이 날뛰지 않았다면 방책도 없는 동쪽 전선이 먼저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루이가 모든 걸 바쳐 날뛰며 조금씩 안정화되어 가는 동쪽 전선.
하지만 남쪽 전선의 목책 앞은 아직도 난장판이었다.
정말 이대로 무너지나?
하지만 더 이상 버틸 도리가 없어 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병사들이 악을 쓰며 버티고 버티다, 전선에 쌓여가는 마수들을 공격하는 화살이 점점 뜸해지고 창수들의 손길도 점점 둔화될 때.
방패를 든 예비 전사들이 지쳐 천천히 무릎 꿇어갈 때.
로빈이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낙담할 때.
바로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마수들이 득실대는 숲의 입구에서 수십 개의 인형이 튀어나와 마수들을 도륙하며 격전지로 달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왔다! 자랑스러운 모야족 전사들아! 모두 돌격!”
지극히 중2스러운 대사를 외치며 달려오는 남자.
이마부터 대각선으로 난 긴 상처가 인상적인 이 남자는 마수를 그야말로 분쇄하며 남쪽 목책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로 수십의 남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익숙한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이곳 출신이자 검은 곰 기사단의 단장이 된 흑웅.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대수림으로 파견한 검은 곰 기사단이었다.
눈앞의 남자들은 대수림에 남았던 모야족 전사들과 기사단인 모양인데 다행히 그 수가 거의 줄지 않았다. 생각보다 자신의 협박 섞인 부탁이 큰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막무가내로 보이는 모야족 전사들이 자신을 추스르고 이곳까지 후퇴한 걸 보니 말이다.
마수들을 분쇄하다시피 결딴내고 자신의 앞까지 당도한 모야족의 전사들과 기사들.
특히 선두에 선 남자는 명랑하게 웃으며 로빈에게 손을 흔들었다.
“소영주님? 난 모야족의 족장 백랑이야. 우리 부족을 받아줘서 고마워.”
뭔가 가볍지만, 알 수 없는 무게감을 가진 남자. 바로 모야족의 최고 전사라는 백랑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로빈이 느낀 감정은 어이없게도 ‘살았다’였다.
* * *
대수림에서 활동하던 전사들이 전선으로 복귀하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긴 로빈은 백랑에게서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가 입은 갑옷에 진득하게 말라붙어버린 마수의 피. 군데군데 파손된 갑옷의 모양만 봐도 얼마나 거친 나날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저 갑옷은 웬만한 충격으로는 흠집도 가지 않는다는데 얼마나 많은 마수에게 공격을 당했길래 저렇게 걸레가 된 건지.
“하하. 원래 부족을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가 영광스럽게 죽으려 했는데. 저기 기사가 그러더라고. 만약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들의 소영주가 남자들은 사지를 잘라 꼬치로 꿰어 마수 먹이로 주고, 여자들은 돼지우리에 가둬 두고 가축으로 쓰겠다고 말이야. 그러니 내가 죽을 수가 있어야지. 하하하.”
아니, 내가 언제? 하워드,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엄청난 날조를……. 내가 무슨 악마냐?
그런데 이 사람도 진짜 웃기네. 지금 그게 웃을 일이야?
하긴 저 사람도 믿지 않으니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하긴 그럴 만해. 영주라면 이곳의 지배자잖아? 지배자인 제국 영주가 지키란 걸 대놓고 거역하면 그런 벌을 받을 만도 하지.”
이 사람이, 대체 어느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영주가 괴물인 줄 아나.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면서 자기는 또 반말로 말하고 있으니 이게 대체 농담인지, 진담인지. 어쨌든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로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백랑을 바라보니 그는 크게 웃으며 로빈의 어깨를 두드렸다.
“와, 근데 이거 끝내주던데. 문신이랑 공명까지 하면서……. 이거 때문에 목숨 여러 번 건졌어.”
확실히 전사들도 사선을 넘으면서 마법 갑옷과 문신이 반응하는 것을 분명히 느꼈나 보다.
“피해 상황은 어떤가요?”
“우리 부족 전사는 다섯 명 사망.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으니 낙원으로 갔을 거야. 그쪽 기사단은 모두 무사하고. 난 우리 전사들보다 숲에서 더 잘 도망가는 기사들은 처음 봤다니까. 싸울 때는 무섭게 싸우다가 도망갈 때는 또 번개같이 빨라서 나도 좀 배웠어.”
후, 검은 곰 기사단. 목숨을 지키기 위한 빠른 도주, 칭찬한다. 그래, 용병 출신답게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챙겨야지.
로빈은 무조건 살아서 돌아오라는 자신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한 검은 곰 기사단을 마음속으로 강하게 칭찬했다.
백랑은 죽은 전사들이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확신하며 크게 가슴 아파하진 않았다.
문화가 그만큼 다른 거겠지? 저들에게는 저들만의 애도 방식이 있을 테니.
로빈은 어쨌든 영지를 위해 그렇게 용감하게 목숨 바친 다섯 명의 이름 모를 전사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들이 말하는 낙원에서 영원히 안식하라고.
“죽진 않았는데 다들 상태가 정상은 아냐. 지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랑 흑웅 포함해서 열댓 명에 불과하거든. 우선 쉬면서 치료할 곳이 필요해서 이곳으로 돌아왔어. 그런데 생각보다 더 잘 버티고 있네. 대단한데.”
“병사들과 모야족 예비 전사들이 대단한 거죠.”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 막사가 열리더니 월아와 적호가 들어왔다. 대충 전장을 다 수습하고 백랑을 만나러 온 모양인데.
“주인님!”
말없이 과묵하게 마수만 썰던 차가운 여자, 적호가 울먹이며 백랑에게 달려들었다.
저 여자가 저런 표정도……. 그나저나 주인님? 내가 아는 그 주인님이야?
“응응, 내 여우. 잘 있었니? 울지 마, 넌 울면 못나 보여. 너는 월아와는 다르잖아.”
달래는 건지 핀잔주는 건지,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더니 웃으며 적호를 떼어놓는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고맙지. 수고했어.”
그리고 이내 살아줘서 고맙다는 월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월아와 적호의 남편이라고 했던가?
로빈은 다시 백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데다 저 얼굴의 상처와 단단한 근육 때문에 야성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슬쩍 정보 창을 보니 성향도 호방하고 타이틀은……. 우두머리 늑대(SR). 이건 무슨 타이틀이지? 게다가 탁월한 전투 감각(UC).
흠, 마을의 최고 전사라더니 이 정도라고? 역시 타이틀이 전부는 아닌 건가? 아까 보여준 루이의 무위도 그렇고. 참…….
어쨌든 이 남자도 은근히 다 가진 남자였다. 저 대단한 월아의 남편, 심지어 주인님이라고 불리고 있다니.
계속 위급한 상황이 이어져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저 월아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여자였다. 무려 절색(R)과 희대의 명기(U)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명기, 내가 아는 그 명기가 맞겠지? 타이틀이 다양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런 것도 타이틀에 나올 줄이야.
캬~ 부러운 놈. 항상 행복했겠어.
로빈이 사이좋은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해후를 마친 백랑은 로빈이 깜짝 놀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선 부상자들은 치료해야겠는데 그럴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어. 지금 상황이 별로 좋지 않거든. 아, 소영주님이라도 내가 편하게 말해도 되지?”
이미 다 말해놓고 인제 와서……. 역시 뭔가 참, 이 사람은.
“그러시죠. 왠지 백랑 님께 존칭을 들으면 두드러기가 날 거 같거든요.”
“하하. 뭘 좀 아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든 상황이 급박해. 오늘 갑자기 하급 마수들이 미쳐 날뛴 것도 그거 때문이고.”
“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 그러니까…….”
그렇게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가려는 백랑, 하지만 밖에서 난리가 나면서 설명은 뒤로 미뤄지고 말았다.
“도련님! 큰일입니다. 푸가입니다. 푸가 일곱 마리가 숲 입구에 나타났습니다.”
푸가? 그때 폴이 한 방에 갈라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중급 마수라는 그놈?
아니, 중급 마수가 대체 왜?
“아, 씨. 벌써 나왔어? 설명은 이따가 할게. 우선 저놈부터 처리해야 하니까.”
백랑은 혀를 차며 막사를 박차고 나갔다. 로빈과 두 여자도 바로 뒤따랐고.
로빈이 막사 밖으로 나갔을 때 벌써 달려 나간 백랑은 다른 전사들과 푸가를 상대하고 있었다.
푸가를 가장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폴이 했던 것처럼 모든 마나를 집중해 일격에 보내버리는 거였다. 푸가처럼 가죽이 단단한 중급 마수들은 그만큼 자체 회복력도 강해 자잘한 공격 여러 번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급 마수와 달리 중급 마수부터는 루이가 훈련시킨 병사들이 무용지물인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러니 오직 하급 마수만을 위한 진용을 갖추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중급 마수의 존재는 로빈을 더욱 긴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전사들은 착실히 푸가를 제거해 나갔다. 그중에 백랑의 활약은 발군이었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