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턱부터 시작해 갑옷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어깨, 그리고 팔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빛나는 늑대 문신이 그가 지금 모든 힘을 집중해 푸가를 상대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푸가의 사지 중 한쪽이 거칠게 찢겨 나갔다.
“역시… 최고 전사. 정말 강하긴 하네.”
로빈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옆에 있던 린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응. 우리 아빠가 최고야. 나도 저런 전사가 될 거고.”
“그래, 뭐. 너 정도면 가능하겠지.”
악역 꿈나무인데 어련하시겠어? 재능도 짱짱하고. 못 할 게 뭐겠어?
그나저나 이 녀석의 워너비가 백랑인 모양인데 진짜 백랑이 죽어서 흑화한 건가?
로빈이 그런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말을 꺼낸 린이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족에서는 아무리 백랑의 딸이라도 여자인 자신이 최고 전사가 되겠다고 하면 힘들 거라고, 포기하고 엄마처럼 좋은 주인 만나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는데, 이 귀요미 소영주는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여준 것은 처음이라 미묘한 기분이었다.
로빈은 린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전투 장면만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푸가를 상대하는 전사와 기사들의 수는 대략 열다섯.
많이 다쳤다더니 다친 상황에서 여기까지 들어오느라 모든 힘을 쥐어짠 나머지 전사들은 모두 탈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거나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범람 기간은 대략 2일.
오늘 정도로만 하급 마수가 달려 나와도 기사가 대략 20명이나 추가된 상황이니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자신의 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 꺼림칙함의 이유는 아까 말하다 만 백랑의 이야기 때문이겠지? 하……. 대체 뭘까?”
로빈은 불안한 눈으로 마지막 남은 푸가의 목을 베는 백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사들이 돌아왔지만, 방어를 책임지던 총책임자 루이가 마나 탈진으로 쓰러진데다가 예상치 못한 중급 마수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그리고 로빈은 백랑을 불러 자세한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다.
“하하. 사실 대수림을 떠돌아다니며 하급 마수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놈들이 계속 벌떼처럼 달려드니 쉬거나 뭘 먹을 시간도 없더라고.”
하긴 그랬다. 전사로서 히센이 만든 마법 갑옷으로 무장한 채 하급 마수를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말처럼 끊임없이 달려드는 그들의 수였을 거고.
하급이라도 방심하면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쉬거나 먹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로빈이 그들을 걱정한 이유도 바로 그런 거였고.
“그래서 꾀를 내봤지. 랩터 놈들이 달려들 때 그놈들을 달고 그 하마 같은 놈의 서식지로 들어간 거야. 제국에서는 키마렌이라고 부른다지?”
키마렌.
늪지에 사는 중급 마수 키마렌은 거대한 입을 가진 하마를 닮은 마수였는데, 랩터의 천적으로 그들을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랩터는 당연히 키마렌의 서식지에 잘 접근하지 않는다.
아마 백랑은 키마렌의 서식지로 들어가 달려드는 랩터들을 잠시 떨어트려놓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 미친 녀석들이 거기까지 따라 들어오더라고. 자신의 서식지에 랩터들이 득실거리자 당연히 키마렌이 몰려나와 랩터들을 잡아먹기 시작했지. 덕분에 그 틈을 타 도망친 우리들은 잠시지만 쉴 수 있었어.”
“음…….”
마수 범람의 특수성을 이용해 마수끼리 싸움을 붙였다는 건가?
생각보다 영리한 방법인데? 이 얼빠진 남자가 그런 방법을?
“한 번 재미를 보니 딱 길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마수들을 끌고 중급 마수의 서식지에 들어가 그 수를 줄이고 있었는데, 재수 없게 출산 준비 중인 푸가를 건드리게 된 거야.”
고릴라처럼 생긴 푸가. 이놈들은 출산 시기에 더욱 예민했다. 암컷이나 수컷 모두 말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 자신의 보금자리가 위협당하면 죽을 때까지 따라가 상대를 죽이는 습성이 있는데, 재수 없게 지금이 그 시기였나 보다.
게다가 한 구역의 푸가가 동시에 출산해 공동으로 새끼를 키우는 습성이 있는데다가 계절을 정해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보금자리 근처에 자리 잡고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인근의 푸가 전체가 출산 중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사실 좀 복불복 같은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아까 뒤쫓아온 그 푸가가 잘못 건드린 그 푸가인가? 하급 마수를 다 상대하고 전사들마저 잡으러 달려왔다든지.
“그런데 어쩌겠어. 푸가의 수가 한둘이 아닌데 그놈들만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푸가가 상대하기 힘든 놈의 구역으로 푸가들을 끌고 들어갔지.”
로빈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러다가…….
“그래서 급한 대로 가메라의 구역으로 들어갔어. 그놈은 새끼만 안 건드리면 그런대로 얌전하잖아? 인간 정도는 그냥 지나가는 개나 고양이 정도로 취급하고. 그런데 문제는 이 푸가 놈들이 진짜 눈이 뒤집혔는지 가메라의 구역까지 따라 들어온 거야.”
맙소사, 지금 입고 있는 가죽의 주인인 그 가메라? 상급 마수 가메라라고?
그놈이 여기에도 있었나. 마수들이 자리 잡은 지 8년밖에 안 됐다더니 별놈들이 다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대체 얼마나 푸가의 구역에서 분탕질을 쳤으면 그놈들이 감히 가메라의 구역까지 따라 들어갔을까? 설마 새끼를 밴 암컷이라도 잡은 건 아니겠지?
로빈이 경악하는 와중에도 백랑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로빈의 표정은 점점 불안함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딱 때맞춰 가메라가 달려들어 주면 푸가를 그쪽에 떨궈 주고 내빼려고 했는데 가메라가 전혀 반응하지 않더라고. 딱 보니 새끼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았어. 하지만 그래선 이곳까지 도망 오는 의미가 없잖아.”
“음…….”
“어쩔 수 있나. 우선 가메라를 좀 자극해 보려고 마나를 쏟아부어 도끼를 던졌는데……. 그만 새끼가 맞아버린 거야. 아, 진짜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그래서요?”
“당연히 가메라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푸가는 가메라한테 피떡이 됐지만, 그놈이 또 새끼를 건드리면 집요해져서…….”
새끼만 안 건드리면 그럭저럭 안전한 상급 마수. 인간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가메라의 구역으로 도주한 것은 칭찬할 만했다. 열 받은 푸가라도 웬만하면 가메라의 구역은 피할 테니까.
문제는 푸가가 웬만큼 열 받은 것이 아니라서지.
단지 자극만 하기 위해 던진 도끼가 하필이면 새끼를……. 이건 솜씨가 좋은 건지, 재수가 없는 건지.
얌전한 놈이 열 받으면 더 무서운 것처럼 새끼가 다치면 가메라는 우주 끝까지 상대를 쫓아온다고 전해진다. 예전부터 가메라를 유인할 때면 그 방법을 썼었고.
그런데 대체 가메라는 어떻게 하고 여기로 무사히 돌아온 거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진짜 똥줄 빠지게 도망갔어. 역시 가메라가 나만 쫓아오더라고. 우선 전사들은 잠시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하고 나만 가메라를 끌고 대수림을 돌아다녔지. 겸사겸사 하급 마수들이 모인 곳을 짓밟으면서 재미도 좀 봤고. 아마 순간순간 문신이랑 공명하지 못했으면 지금까지 숨 쉬고 있지도 못했을 거야.”
하……. 진짜 이런 돌은 자를 봤나. 그 와중에 또 가메라로 하급 마수를…….
하지만 그 순발력만은 참 높이 살 만했다. 어제 하루 우리가 쉴 수 있었던 것도 저런 분탕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도망만 다녀서는 답이 없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트리플헤드가 좋을 거 같더라고.”
이 사람, 진짜 뉴 타입 트러블 메이커네.
점점 커지는 스케일, 어쩔 거냐고.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상급 마수 트리플헤드는 이름 그대로 머리가 세 개인 히드라를 의미했다.
머리가 아홉 개도 아닌 놈을 히드라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이놈을 달리 표현할 방법도 없었다. 마리가 세 개뿐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그냥 히드라 그 자체니까.
실제로 재앙급 마수에 나인헤드가 있으니 저 트리플헤드가 성장하면서 머리가 점점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가메라와 트리플헤드를 싸움 붙이는 건 차라리 쉬웠지. 가메라가 자신의 구역에 들어오는데 인간 따위가 눈에나 들어오겠어? 가메라야 날 더 죽이고 싶겠지만 트리플헤드가 달려드니 지도 살려면 놈과 싸워야 했고.”
“하…….”
“어쨌든 그게 오늘 새벽에 일어난 일. 그런데 말이야. 문제가 생겼어. 상급 마수 두 놈이 미친 듯이 싸우니 생각보다 여파가 크더라고. 그 근처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가며 거칠게 싸우는데…….”
“설마…….”
“덕분에 근처의 중급 마수나 하급 마수까지 폭주해 숲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어. 아마 오늘 갑자기 늘어난 마수 떼나 아까 나타난 중급 마수도 그 때문인 거 같아.”
“역시… 그런가요?”
“응. 미안해.”
이런 산뜻한 또라이 같으니라고.
쿨하게 사과하는 백랑에게 로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으니 말이다.
사실 로빈은 뭐라고 할 자격도 없었다. 무조건 살아오는 걸 최우선으로 하라고 한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물론 상급 마수에게 도끼를 던진다는 또라이 짓은 그의 계산에는 전혀 없었겠지만 백랑 나름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였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전사들이 왜 그렇게 다친 거예요?”
“아, 트리플헤드랑 가메라가 싸울 때 근처 중급 마수들이 폭주했는데 전사들이 그쪽에 있었다더라고. 그놈들이랑 싸우느라 좀 다친 거지.”
피해는 또 쓸데없는 이유로……. 차라리 그냥 중급 마수 정도만 이용해서 서로 싸우게 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어쨌든 좋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생각이세요?”
원인은 대충 알았으니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
만약 두 괴수의 싸움 때문에 계속 중급 마수들이 폭주해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하급 마수가 꾸준히 튀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뭐, 방법이 있나. 우선 튀어나오는 놈들을 정리하면서 상황을 보는 거지.”
“만약 가메라가 트리플헤드를 이긴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응. 알지. 그놈은 날 잡으러 여기까지 나올 거야. 그러면 물론 곤란하긴 한데……. 하지만 생각해 봐. 두 놈은 서로 대등한 상급 마수고, 한 놈이 다른 놈을 압도적으로 이길 수 없잖아? 만약 운 좋게 트리플헤드가 이긴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고 말이야. 그리고 가메라가 이긴다고 쳐도 그놈이 정상일 리가 없지. 트리플헤드의 주 무기가 뭔지는 알고 있지?”
“독이죠, 독.”
“그래. 독. 그러니 가메라가 이기더라도 독에 해롱대고 있을 거란 말이지. 만약 그놈이 여기까지 나오면… 그때는 그놈을 잡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백랑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나사 빠진 사람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계산은 빠른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막말로 그놈이 트리플헤드를 잡아먹고 푹~ 쉬다가 튀어나오면 어쩐단 말인가? 한 번 찍은 놈의 냄새는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게 가메라인데.
하지만 로빈은 이미 다 벌어진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이 남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빠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전사 전력이 많이 보충됐으니 확실히 더 잘 버티긴 하겠지. 휴식을 취하면 그 전사의 수도 더 늘어날 테고.
로빈은 그냥 가메라가 트리플헤드와 싸우다가 늪에 나자빠져 있기를 바랐다. 그게 최선이었으니 말이다.
“하……. 어쨌든 수고가 많으셨네요. 또 언제 중급 마수 놈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백랑 님도 우선 쉬세요.”
“하하. 그럴까? 그럼 중급 마수가 나오면 부르라고.”
하지만 불행히도 백랑이 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하급 마수의 공격에 방진이 무너질 위기가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원래 우리가 겪어야 했을 마수 범람의 실체겠지? 아마 전사들이 마수들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았으면 첫날부터 이 정도의 마수를 계속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틈틈이 튀어나오는 중급 마수들은 전사들도 지치게 했다. 중급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들뿐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도 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전사들을 쉬게 하고 싶었던 로빈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업자득이기도 했으니.
부상자가 속출하고 모두가 지쳐갔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막아 나갔다. 모두가 집념과 열정을 바쳐서 말이다.
그렇게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