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다시 다음 날.
오늘은 새벽부터 숲이 아주 조용했다.
마수 범람은 이제 끝인 건가?
로빈은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왠지 느낌이 좀 싸했다.
“이거…….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거 같은데…….”
“에이, 소영주님.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데. 은근히 입이 방정인 거 아냐?”
갑자기 멈춘 마수의 습격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백랑은 이내 심심해졌는지 로빈의 막사를 찾았다.
차라리 자신을 애타게 그리던 두 아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생산적일 텐데 굳이 이곳을 찾다니. 확실히 백랑도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다.
“아후,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랑 님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은데요. 차라리 월아 님한테나 가지 그러세요. 계속 싸우기만 하느라 대화할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요.”
“응. 그건 안 돼. 지금은 기운을 아껴놔야지. 혹시 모르니까. 월아는 너무 맛있어서 불끈 달아오른단 말이야. 아무리 내가 생각이 없어도 지금은 참아야지.”
“아… 생각은 있었구나.”
하긴 남자들이 피를 보고 광기에 물들면 성욕도 급증한다고 했던가? 며칠 동안 계속 전투의 연속이었으니 확실히 달아오르긴 했을 거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월아 정도의 미인 아내가 옆에 있으면… 확실히 참기는 힘들겠지.
전혀 방음이 되지 않는 막사라 해도 거리낌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막사에서 섹스 좀 한다고 누가 뭐라 그럴 사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참는 걸 보니 족장이라는 자각이나 아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인식은 있나 보다. 그냥 기분대로 막 사는 사람 같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뭐, 좀 족장 같다.
“전투만 끝나면 일주일 내내 따먹을 거야. 여우도 같이.”
“네, 네. 그러세요. 즐거운 밤 되십시오.”
“아니! 밤낮 모두!”
참 대단한 정력가 나셨다.
로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로빈의 걱정이 무색하게 온종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 튀어나오는 마수들도 없었고.
마나 탈진에서 겨우 회복되어 간신히 거동할 수 있게 된 루이도 진지한 얼굴로 마수 범람의 끝을 고민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막사에서 고민하던 로빈은 은은한 진동을 느끼며 벌떡 일어섰다.
로빈이 막사를 튀어 나가자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느꼈는지 병사들과 기사들, 전사들까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미세하게 점점 강해지는 진동, 땅 울림에 루이가 신속하게 병사들을 대피시켰다. 만약 그의 느낌대로라면 이건 절대 병사들이 상대할 녀석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모두… 마을 밖으로 나가! 부상자들을 챙겨라. 모두 대피해!”
그리고 그때 숲 한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맙소사.
로빈은 당황하며 자신 옆에 있던 듀발, 린과 함께 루이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마을 밖으로 도망쳤다.
“크~아!!”
숲 멀리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쿵쿵,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빈이 책으로만, 그리고 가죽과 뼈로 확인했던 그 가메라였다.
놈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 거대한 몸을 이끌고 바로 마을로 돌진했다. 바로 자신의 새끼를 공격한 백랑이 있는 곳이었다.
“진짜… 미쳤네. 괴수 대전이야. 무슨 고질라냐?”
가메라는 거대한 몸으로 마을의 목책을 한 방에 찢어버리고 꼬리로 마을 자체를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마을의 집들을 장애물로 삼으려 했던 백랑과 전사들의 의도를 한 번에 봉쇄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급 마수라도 꼬리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집이 박살 난다니. 로빈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도마뱀 새끼가 여기까지 따라왔냐? 질척거리면 인기 없어, 이 자식아. 오늘 도마뱀 한 마리 잡아보자!”
하지만 그 경악스러운 모습에도 백랑의 투지는 전혀 문제가 없나 보다. 저렇게 전사들을 독려하며 가메라에게 달려드니 말이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분명한지 모든 힘을 끌어낸 듯 얼굴에 선명한 늑대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백랑, 그를 보조하는 전사들과 기사들.
온몸이 무기이며 강력한 꼬리 치기로 전사들을 공격하는 가메라.
덕분에 마을은 이미 박살이 난 지 오래였고 병사들은 그저 멀리 떨어져서 전사들의 승리를 기원할 뿐이었다.
사실 저런 놈을 상대로는 활 공격도 의미가 없어 예비 전사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괜히 전사들의 집중력이나 흐트러트리겠지.
그리고 잠시 후 부상자들과 병사들을 모두 대피시킨 루이가 로빈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인 듯 보였다.
“우선 부상자들 위주로 다 대피시켰습니다. 저 가메라가 백랑 님을 따라온 거라죠?”
“네. 근데 이런 경우 가메라가 백랑 님만 잡고 그냥 돌아갈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한창 흥분한 상태니까요.”
“역시 그렇죠?”
로빈은 거칠게 싸우고 있는 백랑과 전사들, 그리고 그야말로 괴수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가메라의 사투를 바라봤다.
하……. 결국 이렇게까지 되다니.
가메라는 백랑의 말대로 확실히 정상적인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아무리 부족의 대전사인 백랑이라도 저 가메라가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저렇게 상대하고 있지도 못했을 거다.
원래 가메라를 잡을 때는 기사 수준을 넘어선, 그야말로 마스터급 기사들이 수두룩하게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마법 갑옷이 없을 때 기록된 자료라 지금과는 조금 사정이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그만큼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리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저 가메라가 지친 만큼 영지의 전사들도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어제도 계속된 습격 때문에 끝없이 싸우지 않았던가.
백랑의 예상이 벗어난 건 이런 점이었다. 가메라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들도 쉬지 못할 거라는 것.
덕분에 전투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날렵하게 가메라의 공격을 피하며 시선을 끌고 있는 백랑, 그리고 그 틈을 타 신속하게 공격을 퍼붓는 전사들과 기사들.
그들은 정말 잘 싸우고 있었다. 저런 괴수를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공격이 가메라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크억!”
저렇게 예상치 못한 꼬리 공격에 한 명씩 리타이어되고 있었다.
“하……. 상급 마수를 상대해 보지 않아서 타격을 주는 요령이 부족하군요.”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던 루이도 심각함을 느꼈는지 작게 한탄하고 있었다.
예전에 폴이 대형 마수를 상대할 때는 모든 힘을 다한 일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몸에 밴 영지의 기사들이 대인전에 취약한 이유이기도 했었고.
하지만 반대로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하급 마수 정도만 상대했던 검은 곰 기사단이나, 마수를 경험한 경력이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모야족 부족들이 저 긴박한 순간에 그런 공격을 퍼붓는 건 무리인가 보다.
자신의 도끼질에 별다른 타격이 없는 가메라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백랑의 모습을 보니 딱 그랬다.
당장은 저렇게 실랑이하며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앞으로는 어쩐다.
“그래도 저놈이 지금 정상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정상이라면 저렇게 꼬리에 맞는 순간 피떡이 됐을 테니까요.”
꼬리 휘두르기 한 번에 죽지 않고 리타이어만 했다는 이유로 저놈이 정상이 아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냐.
“하……. 몸이라도 성했으면…….”
루이는 자신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도저히 저 전투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그럴 만도 했지만, 그때 그가 나서지 않았으면 진작에 전선이 밀렸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다시 한 명이 꼬리에 처맞고 나뒹구는 모습에 로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 진짜. 왜 이따위야? 방법이 없나? 어?
로빈이 머리를 감싸고 대책을 고민하는 사이, 저 멀리 어디서부터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말발굽 소리.
이제 그 소리가 확연히 귀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고, 뿌연 먼지를 뒤로하고 바람을 가르며 말과 함께 질주하는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수십의 기마대.
“폴!”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바로 폴과 그 뒤를 따르는 영지 기사단이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벌써?
언젠가 지원이 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곳이나 저곳이나 마수 범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끝날 테고 그쪽을 정리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다고 마음을 접었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기사단이 등장하다니.
혹시 주인공이세요?
오늘 로빈에게 폴은 황태자보다 더 주인공 같았다.
폴과 기사단은 상황을 살필 새도 없이 즉각 전장에 합류했다. 영지 기사단의 기본 장비인 대마수용 사슬과 삼단으로 접혀있던 거대 작살까지 손에 쥔 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준비성이라니. 모든 것이 거지 같지만 마수 사냥만은 완벽한(로빈의 평가) 그레이츠 영지의 기사단다웠다.
“모야족 전사들이 잘못 싸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원래 저런 놈을 상대할 때는 백랑처럼 앞에서 시선을 끄는 아웃스탠더가 필요하니까요.”
기사단이 등장하면서 안심이 되는지 루이의 목소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저렇게 어태커들이 꾸준히 공격해 힘을 빼놓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백랑과 전사들이 꾸준히 공격한 것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다만 끝을 낼 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 후, 놈이 서서히 지쳐가면… 바인더가 대마수용 사슬로 놈의 움직임을 억제합니다.”
루이가 말을 마칠 때쯤 대마수용 사슬을 든 기사들이 사방에서 사슬을 던져 가메라의 몸을 얽어매기 시작했다.
쌩쌩한 상태였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숲에서 트리플헤드와 싸우고 전사들에게도 자잘한 타격을 계속 받아서인지 사슬 한 가닥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마나까지 쓰며 당겨대자 놈도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커가 한 방에 끝장을 냅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화려하게 빛나는 거대한 ‘에셋’을 거머쥔 폴이 놈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허망한 이빨질을 가벼운 몸짓으로 피한 후 한 방에 놈의 목을 꿰뚫는 폴.
폴의 에셋은 놈의 목을 관통해 그대로 머리끝까지 박혀 들어갔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콤비네이션이었다.
이게 진짜 그레이츠 영지의 마수 사냥인가?
그리고 로빈은 듣고 말았다. 자신의 옆에서 중얼거리는 린의 혼잣말을.
“…개멋져. 크고… 아름다워.”
이런 어이없는 사차원 꼬맹이 같으니라고.
너 설마 폴 경한테 반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저분이 저래 봬도 할아버지뻘이거든.
그러니 제발 그러진 마라.
그리고 그렇게 가메라가 쓰러지며 마수 범람은 마무리되었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주인공처럼 등장해 로빈을 구하고 가메라까지 처단한 폴은 놈을 쓰러트리자마자 로빈에게 달려왔다. 그의 몸에도 굳어버린 마수의 피와 거친 먼지로 가득한 걸 보니 정리를 할 새도 없이 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덕분에 로빈과 다른 목숨까지 구할 수 있었으니 참 숭고한 노력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폴 경.”
며칠간의 고초로 통통했던 젖살까지 많이 빠져버린 로빈의 모습에 폴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곳은 크게 위험한 곳이 아닌데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게다가 이런 곳까지 가메라가 나타난 것도 어이가 없었고.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빈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불안한 마음에 한껏 서두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폴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행을 추스르고 전장을 정리했다.
“살았다!”
“만세!!”
“영주님! 만세!”
“그레이츠여, 영원하라!!”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살아남은 것을 기뻐했다.
일주일간의 사투가 드디어 끝났으니까.
아니, 그런데 저렇게 영지 병사들 사이에서 은근슬쩍 ‘영주님 만세’를 같이 외치는 모야족, 당신들은 정말…….
너희들은 모야족 만세나 족장님 만세를 외쳐야 하지 않냐?
하……. 뭐, 아무려면 어떠냐. 이렇게 살았는데.
많은 사람이 다치고 상했지만 그래도 큰 인명 피해 없이 마수 범람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특히 마지막에 가메라가 날뛰며 마을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것이 가장 컸다. 원래 이곳을 모야족의 터전으로 삼으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변에 무수히 쌓여있는 마수들의 시체.
몇몇 중급 마수들은 적당히 쓸 만한 곳이 있지만, 저 많은 하급 마수들은 그야말로 짐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마수를 한곳에 묻는 건 전염병의 우려까지 있다니 태우거나 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거기에 매달릴 사람들의 노력도 그렇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