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마 이 문제는 북부 관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돈도 문제였다. 이번에 마수 범람을 막기 위해 영지의 모든 돈을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거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관문을 보수하고, 남쪽에 마을까지 다시 만들어야 한다니. 또 저 많은 모야족이 당장 지낼 곳은 어쩐단 말인가.
그나마 겨울을 보낼 식량을 넉넉하게 사놓았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
폴에게 영주 저로 끌려와 강제로 휴식에 들어가게 된 로빈.
자신의 침대에 누워 혼자 고민하던 로빈은 이 답 없는 현실에 한숨만 내쉬었다.
“하……. 진짜 엿 같네. 엿 같은 다섯 살이야.”
“응? 뭐라고, 로빈?”
“아. 아니에요, 엄마.”
거지꼴로 돌아온 로빈의 모습에 기절한 마리아나는 그 시간부터 로빈이 침대에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해서 보냈더니 온갖 중급 마수에 가메라까지 뛰쳐나온 장소에 로빈이 있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는 로빈도 엉덩이 팡팡을 피하지 못했다. 하긴 안전하다고 큰소리치고 간 건데 그렇게 죽을 뻔했으니 용서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심지어 마리아나는 카인에게 더 이상 로빈에게 영지의 일을 맡기지 말라고 따지기까지 했다.
어린 손자의 위기에 죄책감을 느낀 카인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다 왠지 그건 힘들 거 같아 기지를 발휘해 영주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로빈은 결국 일주일간의 강제 침대형을 선고받았다.
하루 이틀 정도는 피곤한 몸을 쉬면서 괜찮았는데 이게 3일이 넘어가자 로빈도 좀이 쑤셔 방을 탈출할 계획을 꾸몄지만, 집중 마크하는 마리아나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로빈도 ‘그래, 어른들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에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심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강제 침대형이 끝난 후.
다시 관저로 나선 로빈은 좋은 소식 몇 가지를 접하게 되었다.
“와, 진짜요? 그런 게 있어요?”
“그렇다는군요. 원래 용도는 질병으로 폐사한 가축들을 처리하는 것인데 그걸 조금 변형했다고 합니다.”
우선 쓸데없이 쌓여있던 하급 마수들의 시체를 어떤 약품으로 모두 처리했다는 소식이었다.
원래 이 약품은 도리아 여사가 예전에 발명했던 가축 처리용 약품이었다고 한다.
전생의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처럼 이곳에도 가축들을 상하게 하는 여러 가지 질병이 있었고, 종종 그런 질병에 대량으로 사육하던 가축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렇게 죽은 가축들을 한꺼번에 묻어서 처리하면 전염병이 돌 수도 있기 때문에 처치가 곤란했고, 도리아 여사는 그런 가축을 한 방에 녹여 비료로 바꾸는 약품을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가축과 마수는 완전히 달랐으니 상당 부분을 변경시킬 필요가 있었다.
“헤… 실비가요?”
“네. 물론 작업은 도리아 님이 하셨지만, 처음에 의견을 낸 게 실비아였다는군요.”
그리고 그 물약을 보완해서 사용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 실비아였단다.
히센과 마법 갑옷을 만드느라 실비아를 돌볼 시간이 없었던 도리아는 자신이 만들었던 여러 물품에 대하여 적어놓은 책을 실비아에게 남기고 작업에 열중했다고 한다. 실비아는 당연히 그 책에서 저 약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리고 마수 범람이 끝나고 뒤처리에 고민하고 있던 도리아에게 혹시 그 약품을 이런 경우에 쓸 수는 없냐고 물어 도리아로 하여금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걸 상기시켰다는 거였다.
사실 도리아 여사는 실비아가 그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전혀 그 물건을 떠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지금까지 발견하고 발명한 물건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이 물건은 워낙 초창기에 발명한데다 사실 특별한 가치도 없는 발명품이었기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바로 쓸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를 수정해서 가축에서 마수로 대상을 바꾸는 건 도리아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경된 약품이 수많은 쓰레기를 녹여 비료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이 물건을 이번 마수 범람의 대상이 된 다섯 개 영지에 판매했습니다.”
“오… 그래요?”
지온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물건이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그레이츠령처럼 마수의 습격을 받은 영지로 찾아가 구입 의사를 타진해 본 것.
많은 마수의 시체를 썩기 전에 태우려 했지만 잘 타지도 않아 전전긍긍하던 다섯 영주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를 결정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챙긴 돈이 영지별로 1천 골드였는데, 사실 그 시체들을 다 태우는 데 소모되는 여러 가지 재원을 생각하면 그리 큰돈도 아니었다.
“변방 영지 사정이 어차피 뻔해서 더 많이 받지 못한 게 안타깝군요.”
“아니에요. 어차피 다 없는 살림인데요. 만약 더 비쌌으면 안 샀을걸요.”
그리고 또 다른 수확은 거대한 가메라와 트리플헤드의 시체를 얻게 된 거였다.
가메라의 사냥이 끝난 직후.
로빈은 영지로 돌아오기 전 백랑을 찾아가 가능하면 트리플헤드의 시체도 가져올 수 있으면 가져와달라고 요청했다.
“하… 그래, 밥값은 해야지. 내가 잘못 건드려서 다 골로 갈 뻔했으니까. 소영주님, 내가 잘못한 건 트리플헤드 시체 찾아오는 걸로 퉁 치는 거다? 나중에 두말하기 없기?”
“네. 좋아요. 찾아오기만 하세요.”
백랑은 전사들과 예비 전사들까지 동원해 가메라에게 당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트리플헤드의 숨통을 끊고 그대로 영주 성으로 운반했다.
덕분에 가메라에 트리플헤드까지 연구 재료로 얻은 히센의 얼굴은 화색으로 가득했고. 막판에 갑옷을 만드느라 실신했던 히센이었는데 그나마 이런 보람이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5천 골드라……. 지금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돈은 이게 다인데…….”
“가장 문제는 역시 모야족의 마을이군요. 그 수가 무려 8천여 명. 남쪽에 그들이 기거할 마을을 다시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들지…….”
“단순히 만드는 것만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남쪽 대수림에 마수가 자생하게 되었으니 그쪽에는 최소한 요새 정도는 지어야 해요.”
“끙…….”
이제 남쪽도 북쪽 방벽처럼 굳건한 방벽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고.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그렇게 돈 때문에 머리 빠지게 고민하던 중,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네? 황실의 조사관이요?”
바로 이번 마수 범람에 큰 피해를 본 영주들을 위무하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황실에서 조사관을 파견했다는 정보였다.
이번 마수 범람은 150년 만에 발생한 대규모 범람이었고, 실제로 그레이츠 영지뿐만 아니라 마수 방어를 위해 요지에 자리 잡은 다섯 개 영지, 그리고 대수림과 밀접한 세 개 영지까지 총 여덟 개의 영지가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실은 그 정확한 피해를 점검하고 그 피해를 복구하는 걸 지원을 하겠다는 거였다.
물론 뒷북 중의 뒷북이라,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도움을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도와준다니 이게 어딘가.
“오… 지원이요?”
로빈이 지원이라는 소리에 눈을 반짝였지만, 지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저희는 힘들 겁니다. 제가 다른 영지를 둘러봤는데 그쪽은 아주 난리였으니까요. 저희는 큰 피해 없이 막았으니 저희보다는 그쪽에 지원이 집중되겠죠.”
그건 그랬다. 사실 그레이츠 영지가 받은 피해라 봤자 병사 몇에 기사 몇이 사망하고 남쪽 마을 하나가 파괴된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적은 피해는 아니지만 수천의 영지민이 몰살당한 곳도 있다고 하니 그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래도 억울한데요. 음…….”
“그렇긴 하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저희가 쓴 돈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피해를 보고 복구 비용을 받는 것보다 영지민이 다치지 않고 잘 넘어간 게 낫긴 합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냥 우리가 받은 피해에 대한 것만 지원받도록 하자. 괜히 머리 쓰지 말고. 복구 비용은 멀쩡한 우리 영지보다 다른 영지가 더 절실할 테니.”
영주인 카인이 이렇게 선언하자 로빈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려나.
카인의 선언이 있었지만 로빈은 눈빛으로 지온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떻게든 많이.
그리고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는 지온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 * *
며칠 후, 그레이츠령에도 황실의 조사관이 도착했다. 그리고 지온은 그를 데리고 남쪽 마을로 향했고.
로빈은 자신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마리아나가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는 바람에 영주 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로빈은 영주 저의 정원으로 트리플헤드를 운반한 후 영주 성에 눌러앉아버린 백랑과 월아를 초대해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왜인지 린과 실비아, 도리아, 히센까지 합류해 버렸다.
아니, 왜 이렇게 규모가 커져버린 거야? 굳이 저 사차원 꼬맹이는 왜 데려온 거고? 아니지. 차라리 다행인가?
“어쩔 생각이세요, 백랑 님은?”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가라는 데로 가야지.”
“끙…….”
역시 이 남자, 아무 생각도 없나?
하지만 월아는 다른 생각인지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영주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야겠지만… 가능하면 부족이 한곳에 모여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되겠어? 아무리 그래도 8천 명이나 되는 부족민들이 한곳에 모여 사는 건 영주님 입장에서도 부담일 거라고. 우리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처리하기 곤란하잖아? 원래 항복한 포로들은 한곳에 모으지 않는 법이야.”
아직 모야족의 거주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모여있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 마을로 흩어져 살아야 할 수도 있었고.
물론 로빈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모야족과 관련된 일은 처음부터 로빈이 거의 주도하고 있었으니 그의 생각대로 될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월아의 대답에는 오히려 백랑이 나서서 반박했다. 로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지만 포로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 남자는. 전쟁 중도 아닌데 포로는 무슨…….
아, 혹시 그건가? 그 미친 황제의 명령으로 모야족 사냥이 한참 있었고 그 뒤 어떠한 결론도 나지 않았으니 아직 모야족과 제국이 대립 중이라고 생각한 건가?
자신들이 대수림에서 영지로 나온 건 결국 자신들이 항복한 거로 생각한 거고?
그들의 사고방식이 200년 전 상황에서 멈춰있으면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아무래도 모야족은 한군데 모여서 다 같이 사는 게 좋겠어요.”
“오호, 다 같이 살게 해준다고?”
로빈의 말에 백랑이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풍습도 많이 달라 보이고. 바로 제국에 적응해 살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서요. 나중에는 서서히 융화되어 제국민이 되어야겠지만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요? 은근히 제국민, 특히 귀족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이 많아 보이니까요. 그런데 제국의 영주가 악독하다는 그 잘못된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거예요?”
“뭐, 예전에 도망치면서 부족민이 많이 죽었잖아. 그때의 일이 전해져서 그래. 좀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지.”
“뭐……. 그건 그렇겠네요. 그때는 황제가 양아치라서 그런 거고. 지금은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요.”
하긴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멀쩡히 잘 살다가 엄청난 박해를 받고 대수림까지 도망쳤으니 감정의 골이 깊을 수밖에.
아무래도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보다.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려나.
“그럼 지금 부족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예요?”
“뭐, 남쪽의 황무지지. 겨울이 한창이라 먹을 걸 구하기도 어렵고 난감했는데, 그래도 영주님이 식량을 지원해 줘서 이번 겨울은 어떻게 나겠어.”
“아… 그래요? 근데 남쪽 황무지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그냥 허허벌판이던데. 거기에는 집도 없잖아요? 괜찮은 거예요?”
“뭐, 노숙은 익숙하니까. 추위는 별문제도 아니고. 문제는 오로지 식량뿐이야. 대수림이 이상해지면서 올해는 비축해 놓은 식량도 별로 없는 바람에…….”
확실히 그렇긴 했다.
수렵 부족인 모야족은 그나마 풍성한 가을에 식량을 비축해 겨울을 나는데, 올가을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마수 때문에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피난까지 계획하느라 사정이 더 안 좋아졌으리라.
“뭐라도 해보려고 하는데 지금은 답이 없어. 대수림의 생태계도 완전히 뒤틀어졌잖아? 그러니 당장은 사냥을 하러 들어가기도 곤란하고…….”
네네, 근데 그건 백랑 님 때문이죠.
하긴 꼭 그렇다고 보긴 힘들려나?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을 테니까. 좀 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모두를 위해 고생한 사람에게 잘못을 미루진 말아야겠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