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건… 그렇군요. 치안대나 기사단을 운영하기도 편해질 거 같고. 적어도 2년은 걸리는 일이니 우선 시작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그렇죠. 이게 요새 건설처럼 한 번에 돈이 왕창 드는 게 아니거든요.”
“대신이라기는 뭐 하지만, 기사들의 마법 갑옷이 많이 상했습니다. 마법 재료가 없어서 보수가 힘들다는데 그 일을 우선적으로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건 그래야죠. 지온 님, 그 정도 여유는 있죠?”
“네, 도련님. 히센 님과 의논해 보겠습니다.”
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건설은 뒤로 미뤄졌지만, 기사들의 마법 갑옷은 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소기의 성과는 얻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럼 영지민 이주를 최우선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주를 우선 과제로 정하고 나서려는데 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백랑이 왔다 갔는데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로 기사단을 꾸리고 싶다더군요.”
“아, 그래요?”
아무래도 자신을 만나러 오기 전 폴과도 면담을 가졌나 보다. 이거 은근히 부지런한 인간일세.
“네. 기사단을 꾸리고 흑웅의 검은 곰 기사단과 함께 남쪽 방면을 주기적으로 순찰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괜찮군.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그렇게 먼저 나서주면 오히려 고맙지.”
기사단 창설과 기사단 업무 일정 관리. 확실히 그런 일이면 폴에게 먼저 보고하고 의견을 구하는 게 옳은 순서였다.
그나저나 앞뒤 안 가릴 거 같은 백랑이 생각보다 위아래가 분명한가 보다. 부족 전체가 이제 그레이츠 영지의 영지민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거 같고.
“하얀 늑대 기사단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백랑과 그를 따르는 전사들을 포함해 모두 37명이죠. 그리고 이번 전투를 통해 전사급으로 성장한 예비 전사들이 몇 있는데, 그들은 적당히 교육한 후 검은 곰 기사단 쪽으로 붙이겠답니다.”
“아, 그래요? 폴 경의 기사단은 어떤가요? 그쪽도 결원이 있지 않나요?”
“네, 그런데 저희 쪽도 치열한 전투 때문인지 무언가 깨달은 녀석이 몇 됩니다. 도련님이 데려갔던 녀석들도 그렇고요. 그 녀석들을 교육해서 기사로 임명하려고 합니다.”
확실히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상당수의 병사가 기사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았는가.
완벽한 기사가 되려면 제법 훈련을 받아야겠지만 그건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새로운 기사를 위한 무구들도 만들어야 하니 어쨌든 상당 금액은 그쪽으로 돌려야 할 거 같았다.
그나저나 하얀 늑대 기사단이라. 그 인간, 은근히 흑웅의 검은 곰 기사단이 부러웠던 건가?
그렇게 기사단에 대한 보고까지 마무리되고 오늘 회의는 종료되었다.
로빈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이주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니 제법 성과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니 저택에서는 예전 남쪽 마을에 살던 주민 몇과 촌장이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야족 부족민이 대피할 때 다 같이 북쪽으로 대피했는데 대부분 다른 마을로 아예 거주지를 옮겼고, 촌장을 비롯한 몇 명은 아직도 모야족의 임시 거주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모야족도 아니면서 왜 모야족 천막에서 같이 살고 있었던 거야? 무슨 용가리 통뼈인가? 이 한겨울에 천막에서 지내게?
하여간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 년이나 대수림의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않은 촌장은 사정을 파악한 후 적당히 벌을 주거나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건 엄밀히 말하면 엄연한 직무 유기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크게 처벌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걸 바로 카인이나 폴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고 자신이 만나는 건 뭔가 묘한 느낌이 있어서였다. 그 당시에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로빈의 부름을 받고 불려온 촌장은 연신 굽실거리며 로빈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는데…….
이름 : 찰스 (존 리어)
성향 : 소심함. 신중함 (복수심. 그리움)
타이틀 : 없음 (변장의 대가(SR). 도주의 달인(R))
이거 봐라?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전에는 분명 찰스로밖에 안 보였는데 이게 뭐지? 설마 찰스인 척하는 존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린을 만난 날 퀘스트 보상이라고 뭔가 받긴 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의 등급이 상승된다고 했던가? 깊이 생각할 틈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이건가 보다.
변장의 대가라. 지금 변장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성향까지 속일 수 있다니. 이게 대체 어떤 원리지?
“촌장님, 대체 왜 대수림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지 않으신 거죠? 대수림에 원래부터 마수가 살지 않는 건 촌장님도 잘 알고 계셨을 테고. 마을에 특별한 징조를 발견하면 무조건 영주 성에 알리는 것이 촌장님의 의무이실 텐데요.”
촌장, 찰스(존)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몰랐습니다. 대수림에는 원래 마수가 사는 줄로만…….”
“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제가 이 마을에 도착해 촌장이 되기 전부터 마수가 살고 있어서 전 당연히 그냥 사는 건 줄 알고……. 그래서 영주 성에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언제 정착하셨는데요.”
“그, 7년 전쯤입니다. 제가 원래 이 근처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그러면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월아가 알려준 마수의 출몰 시기는 8년 전쯤. 그리고 저 촌장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시기가 7년 전.
저 촌장이 그레이츠 영지나 이곳 근처에 살던 주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뜨내기라면 대수림에 대하여 모를 수도 있긴 했다.
“다른 곳에서 오신 분인가 봐요?”
“아? 예, 남부 지방에서 살다가…….”
남부 지방이라. 저 말이 사실이라면 또 모야족에 대하여 편견 없이 다가간 것도 이해가 간다. 남부 지방에는 검게 탄 사람이 많아 모야족보다 검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너무 잘 짜여있는 기분이라 오히려 좀 미심쩍었다. 정말 그게 다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지.
특히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게 가장 크고.
대체 뭘까? 로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그냥 정면 돌파가 정답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정말 그게 다인가요? 찰스… 아니, 존이라고 해야 하나요?”
로빈의 말에 순간 멈칫한 존은 아무 말 없이 로빈을 내려다보았다.
굳게 다문 입과 차가운 눈빛.
조금 전까지 굽실대던 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게다가 천천히 굽어있던 허리를 곧게 펴니 환갑은 넘은 거 같은 노인이 건장한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저런 건가? 어쩐지 이 추운 날씨에 저렇게 품 넓은 옷을 입은 게 이상하더라니.
어? 잠깐. 이거 위험한 거 같은데.
“…알고 계셨군요.”
로빈은 존이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순간 아차 싶었다. 그냥 호기심에 찔렀는데 진짜 무슨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이었나 보다.
로빈이 찰스(존)를 이곳에 부른 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 벌로 당분간 모야족 사람들과 같이 지내주기를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고 아직도 모야족과 지낸다니 사이도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모야족에게 영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아도 남쪽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편견 없이 봐줬다고 했었고.
찰스(존)의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괜히 직무 유기로 처벌받는 것보다는 안면 있는 모야족과 같이 몇 년만 살면 되니 이 얼마나 가벼운 벌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만 새로운 정보에 호기심이 도져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만약 저 남자가 무슨 흉악범이고, 정체를 들킨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신을 인질로 도주극을 벌인다면?
게다가 영주 저는 평소처럼 정문을 지키는 병사 둘뿐이지 않은가. 집 안에는 메이드들뿐이라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로빈은 떨리는 동공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호기심으로 일을 이상하게 만들었지만 로빈도 솔직히 할 말은 있었다.
그와 독대를 결심한 이유는 자신도 어리지만, 상대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충분히 도망갈 순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 한창 뜀박질에 매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영지의 모든 사람이 바쁜데 이런 작은 일에 다른 인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한 거였다.
똥 밟았다. 괜히 나댔어! 송충이면 송충이답게 솔잎을 먹었어야 하거늘, 무슨 아는 척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난무했지만 로빈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그나마 일을 크게 키우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상대도 생각이란 게 있는데 너무 궁지로만 몰지 않으면 사형이 확실한 소영주 납치 따위를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로빈은 최대한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뇨, 몰랐어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존?”
“제 이름까지 아시는데 제가 누군지 모르신다고요?”
“몰라요. 제가 아는 건 당신이 숨기는 게 있다는 것과 이름이 존이란 것뿐이에요. 도대체 뭐죠? 당신, 무슨 반역죄라도 지은 건가요? 아니면 존속 살해? 연쇄 살인마예요?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우선 진정해요. 여긴 영주 저택이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영주 저택에서 무슨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 그건.”
로빈은 상대가 적어도 그런 흉악범은 아니기를 기도하며 뻥카를 마구 날렸다.
처음에는 잔뜩 긴장되었지만 입을 떼고 마구 지껄이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내가 원래 이런 성향이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담백한 어조로 협박하는 로빈의 말이 통하긴 했는지 존도 이성을 찾은 듯 흉포한 느낌이 많이 잦아들었다. 덕분에 로빈도 더욱 안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고.
“설명이 좀 필요하지 않겠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당신이 저희 영지에 숨어있었는데.”
“…당신, 진짜 다섯 살 맞습니까?”
로빈의 지적에 존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드디어 이런 걸 물어보는 정상적인 사람이 나오는군.
솔직히 나도 내가 다섯 살 아닌 줄 알았다니까. 노동 환경이 하도 가혹해서. 오죽하면 내가 다른 다섯 살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고 착각했을까. 마을에 가보니 딴 애들은 그냥 코흘리개더라고.
힘의 균형이 다시 자신에게 넘어온 거 같아 더욱 힘이 난 로빈은 이제 여유 있게 자신의 신세까지 한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든 이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다.
“다섯 살 맞죠. 좀 영리한 다섯 살이지만. 자,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어때요? 만약 당신의 사정이 딱하다면 내가 듣고 도움을 줄 수도 있어요. 뭐, 역적이나 흉악범만 아니면요. 그건 좀 곤란하잖아요? 이제 이야기할 기분이 들지 않나요?”
로빈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상대가 그런 범죄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으면 정체를 들킨 순간 진짜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을 납치해 탈출을 시도했겠지.
그리고 이렇게 로빈이 이 남자에게 질척대는 이유.
변장의 대가라더니 생각보다 너무나 대단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몸까지 변해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니.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화장으로 주름을 만들긴 했지만 30대 정도의 건장한 남자로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영락없는 촌로였는데.
그러니 왠지 이런 사람 하나 정도는 알고 지내는 게 앞으로의 일에 제법 도움이 될 듯 보였다.
“전 지명 수배자입니다. 황도에서 도망쳐 이곳저곳을 맴돌다가 이 영지에 자리를 잡았고요. 변장을 하고 있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음, 죄목은 뭔데요?”
“…사기입니다. 하지만 전 정말 억울합니다.”
사기라. 사기를 칠 정도로 영악해 보이진 않는데.
물론 사기꾼이 사기꾼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진 않겠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무슨 누명이라도 쓴 건가?
존의 이야기는 이랬다.
황도에서 가난하지만 평범하게 살던 존.
그는 10년 전 우연히 어떤 사업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투자금을 넣으면 매달 투자금의 5%를 수익금으로 돌려준다는 사업.
2년만 투자하면 원금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황금 알을 낳는 오리 같은 사업을 말이다. 게다가 그 사업은 열 명의 투자자를 모을수록 수익금 정산 비율이 1%씩 늘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의심하며 적은 금액을 투자했지만, 자신이 믿고 있던 친한 형이 적극 추천한데다가 두 달이나 정상적으로 수익금이 돌아오자 전 재산을 그곳에 투자하게 되었단다.
“…왠지 좀 익숙한데, 설마 다단계 피라미드냐? 하, 진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