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전 그 사업의 에이스였습니다. 정식으로 활동한 지 두 달 만에 무려 25%까지 정산 비율을 높일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이 좋은 사업을 소개해 주고, 비위를 맞추면서 투자받는 건 저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죠.”
하, 추가로 20%가 늘어났으면 200명? 한 달에 100명씩이나? 와, 이 사람.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네.
“그렇게 단꿈에 젖어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에 근위 기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이 사업을 지휘하던 그 형은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처형이요? 그 자리에서? 아무리 경제 사범이지만 그게…….”
아무리 상대가 평민에 현행범이라도 즉결 처분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네. 처형당했습니다. 재판도 없이. 상대는 황제, 히로시 대공 전하였으니까요.”
바로 황족이다.
황제 히로시 대공이라.
여기서 황제는 황제의 동생이라는 황제(皇弟)였는데 대공 히로시는 3황자를 가장 아꼈고 진정한 황태자는 3황자가 되어야 했다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비록 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소설에는 등장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로빈도 그에 대해서는 황태자와 3황자가 대화하는 부분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것이 다였다.
다만 황태자의 말에서 그의 성품을 유추해 보면 그는 권위적이며 멍청하고 거만하지만, 죄인을 판결 없이 즉결 처분할 정도로 정의롭지도, 포악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건 뭔가 뒤가 구리다는 건데.
“하지만 전 예전에 들었습니다. 형님이 이 사업의 주인이 아니란 걸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투자금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면 이익금을 제때 나눠 주지도 못할 텐데, 평민이 이런 사업을 시작한다니요. 형님은 그렇게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목숨 아까운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람은 심하게 좋았지만…….”
“하긴, 그건 그렇네요.”
경제 사범은 거의 사형인 세상인데 평민이 자기 생각으로 그런 큰일을 벌이진 않겠지.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귀족이 사주하고 투자금으로 수익을 내준다고 했고, 그 말을 믿었다면 확실히 그런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투자금이 순조롭게 모이던 어느 날. 술에 취해 기분이 거나하게 오른 형님은 힐데 후작의 부탁으로 투자금을 모은 거고, 그분이 이 돈으로 사업을 해 돈을 벌어 그 수익금을 감당하고 있는 거니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힐데 후작…….”
힐데 후작은 로빈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3황자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황태자와 강하게 대립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읽은 소설에서 힐데 후작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냥 양아치였다. 욕심이 많아 자신의 이익에 물불을 안 가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양아치.
그런데 그런 양아치 힐데 후작이 평민들을 위해 그런 사업을 할 리가.
“그리고, 형님이 죽은 그날 히로시 대공 전하를 사무실까지 안내해 온 사람이 바로 힐데 후작이었습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전형적인 토사구팽. 아무래도 그 형님이라는 남자는 순진하게도 힐데 후작의 말만 믿고 있다가 배신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사무실에 있던 동료들은 모두 잡혀가서 적당히 고초를 치른 후 사형.
투자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데다 그날 외부로 영업을 나갔던 존을 비롯한 몇 명만 겨우 목숨을 건졌고, 그들은 지명 수배자가 되었다.
아마 투자금은 당연히 힐데 후작의 뱃속으로 얌전히 들어갔을 테고.
힐데 후작이 꼬리를 자르기 위해 히로시 대공을 이용한 모양인데, 그가 힐데 후작의 충동질에 속았는지 아니면 그 조차도 힐데 후작과 한패였는지 알 수 없지만, 참 더럽긴 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힐데 후작다운 양아치 짓이라고 해야 할까?
“전 그저 뒤에 귀족이 있으니 투자금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사업을 소개해 준 것뿐이었는데…….”
확실히 자신의 돈까지 모조리 잃은 존이 큰 잘못을 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형님도 마찬가지고. 귀족의 권위가 인정되는 세계였으니 귀족의 명예를 믿을 수밖에.
문제는 힐데 후작이었다. 실제로 돈을 챙긴 것도 그놈이었으니.
“돈을 잃었지만, 그건 어차피 상관없습니다. 제가 속은 거였으니까요. 하지만 형님은 진짜 사람들을 위해 일한 거였는데……. 게다가 제가 소개해 준 그 많은 사람도 모두 돈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음…….”
그간 속앓이가 심했는지 봇물이 터지듯 억울함이 터져 나오나 보다.
“그리고 제 아이랑 아내는 어떡합니까? 사기꾼의 가족이라고 아직도 손가락질받으며 살고 있을 텐데.”
가족까지 있었나 보다. 하긴 결혼이 빠른 세상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10년 전이라고 해도 이 남자는 20대였을 테니 말이다.
“진짜 아내나 아들을 한 번만… 볼 수 있었으면…….”
한동안 한을 풀 듯 넋두리를 늘어놓은 존은 이제 진정이 되었는지 작게 한숨을 토하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 이제 다 끝났어요. 그냥 황도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가족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자수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로빈은 존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주를 시작한 게 10년 전, 그리고 이곳에 정착한 게 7년 전.
3년 만에 변장의 대가와 도주의 달인을 획득한 재원. 게다가 두 달 만에 200명을 다단계의 늪으로 밀어 넣은 능력자를 어떻게 쉽게 포기한단 말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남자의 활용처까지 결정한 로빈에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빈은 분연하게 일어섰다.
“그게 말이나 돼요? 죄를 지은 건 그놈인데 왜 존 씨가 처벌을 받아요? 벌은 죄를 지은 놈이 받아야죠. 그리고 가족들이 그리우면 이곳으로 불러오면 되잖아요? 제국이 연좌제를 인정하지는 않으니 그들이 죄인인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왜 그들을 이곳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7년이나 됐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고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족을 부릅니까? 그건 너무 몹쓸 짓이잖아요. 하층민이지만 수도에서는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사는데.”
“그건 그렇네요.”
아, 맞다. 여기는 재수 없으면 굶기도 하는 곳이었지.
“존 씨, 어때요? 저랑 일 하나 하지 않겠어요? 그럼 제가 가족들을 불러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악마처럼 달콤한 제안을 던지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
로빈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저를 신고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와주신다고요?”
“아, 도와준다기보다 존 씨는 제가 맡긴 일을 처리하고, 전 그에 맞는 보수를 지급하는 거죠.”
“음…….”
너무 좋은 조건이라 존은 오히려 쉽게 허락할 수 없었다. 이미 귀족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다시 귀족을 위해 일한다니.
존이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로빈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그래요. 쉽게 믿을 수 없겠죠? 그럼 제가 당신께 부탁할 게 뭔지부터 말해볼게요. 이걸 들으면 제가 당신에게 나쁜 짓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당신을 제거할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로빈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존에게 이야기했다. 왜 존이 필요하고, 그가 무슨 일을 해줘야 하는지. 그리고 그가 받게 될 보상도 덧붙였다.
“고작 그런 일을 하는데 가족들까지 데려와준다고요?”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 있죠. 그리고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고요. 존이 생각하기에는 별로 이익이 없는 일이지만, 그 일은 저에게 큰 이익이 된답니다.”
“음…….”
“그리고 가족들 말인데,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게 존 씨에게 이익인 것만은 아니에요. 그 가족들이 족쇄가 되잖아요. 존 씨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 변장에 능한 존 씨인데 저도 그 정도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허튼짓 못 하게 가족들을 인질로 잡겠다는 로빈의 이야기에 존은 오히려 그를 믿을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을 속일 생각이었으면 저렇게 사실을 밝히지 않고 무조건 좋은 소리만 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할 일도 무슨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은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돈이 생기자마자 결혼했고, 신혼이 끝나기도 전에 아내를 떠났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들을 본 것도 손가락 안에 꼽았다.
솔직히 이제는 복수심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다. 아직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복수심이 들끓기는 했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그리움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제국민에게 관심이 없는 모야족들과 함께라면 황도의 수배령 따위와는 상관없이 잘 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게다가 영지의 차기 지배자인 소영주가 자신을 숨겨준다면?
어차피 이래도 끝이고 저래도 끝이라면 가족들과 최후를 맞이하리라.
마지막으로 아내를 봤을 때 그녀도 무조건 자신을 데리고 가라고 했었으니 비록 이것이 이기적인 결정이라도…….
“조… 좋습니다.”
캬~ 오늘도 하나 낚았다.
지온을 재무관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오늘 존을 낚은 것은 그냥 거저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나둘씩 낚아가면 언젠가는 자신도 일을 다 떠넘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겠지.
“저, 소영주님. 사실 그 사건에 연루된 게 저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혹시 아직 모야족 주거지에 눌러앉아 있는 그 사람들인가요?”
“네. 아무래도 다른 마을로 함부로 가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서.”
“우리 영지에 황도에서 내려온 수배령 따위를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인정할 만하네요. 하긴 그러니까 아직까지 안 잡힌 거겠지만요.”
확실히 조심성이 대단하긴 하다. 이런 구석 영지에서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게다가 자신은 변장 능력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저런 능력을 갖추고도 가장 남쪽의 허름한 마을에서 살던 건 같이 도망 온 사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의리도 있는 건가? 이 와중에 그들도 챙기는 것도 그렇고.
“네, 그렇습니다.”
“뭐, 좋아요. 다 같이 해보세요. 대가는 치를 테니까요. 혹시 그 사람들도 가족이 있나요?”
“대부분 홀몸인데, 몇몇은 가족이 있습니다.”
“명단을 주세요. 다들 황도에 사는 건가요?”
“네, 황도 토박이라…….”
“잘됐네요.”
사실 수가 늘어나면 아무래도 신경 쓸 일이 많아지긴 한다. 하지만 가족이 뒤에 남으면 피곤해지는 건 당연한 사실. 가족은 무조건 데려와야 하긴 했다.
이번에 지온이 황도로 나가기로 했으니 지온과 상의해 봐야겠다. 어쩌면 그 사건의 내막을 저 존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지시하신 일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모야족 마을에 남은 녀석들은 다 제 동생 같은 녀석들이라 제 말을 잘 들으니까요.”
“잘됐네요. 그럼 부탁할게요.”
“네, 그럼. 부디…….”
“걱정 마세요.”
존은 자신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다섯 살 로빈에게 여러 번 고개를 숙이고 다시 찰스로 변해 그의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찰스로 변한 그의 놀라운 능력에 로빈은 혀를 차며 감탄할 뿐이었다.
“하, 그런데 진짜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영주 저를 나선 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생들부터 찾아갔다. 끝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하나 품고 말이다.
찰스(존)가 떠나자 로빈은 바로 지온부터 찾았다.
“음, 그 사건 말이군요. 오래전의 일이지만 워낙 큰 사건이라 저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피해 금액이 몇십만 골드는 될 거고요. 피해자도 수만 명은 된다고…….”
그리고 오늘 존을 만나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자 지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민이 벌이기엔 너무 큰일이었고, 갑작스럽게 히로시 대공이 나서서 처결하는 바람에 뒤에선 말이 많았죠. 하지만 힐데 후작이라면 차라리 더 말이 되는군요.”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는 로빈의 부탁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지온은.
“10년이나 지났으니 가능할 거 같습니다. 황실 수사대는 5년이 지나면 주변 인물에 대한 감시를 중단하고, 10년이 지나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종결하는 것이 내부 규정이니까요. 특히 찔리는 게 많은 힐데 후작이 더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겠죠. 그 사람들이 잡혀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한다면 곤란할 테니. 그러고 보니 잡혔던 사람들도 지나치게 빠르게 사형에 처해졌다고 하더군요.”
“오, 그래요?”
“네, 아무래도 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접근하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