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하긴 오히려 5년이나 주변 인물을 감시하는 걸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하려나?
“그나저나, 그 남자도 대단하군요. 혼자도 아니고 동생들까지 데리고 10년이나 도망을 다니다니요. 물론 힐데 후작이 추격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대단한 거 같군요. 힐데 후작이라면 수사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들을 먼저 죽이려 했을 테니.”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짱 박히는 장소 선택도 탁월했고요.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데 괜히 나중에 힐데 후작에게 복수한다고 설치지는 않을는지.”
“아, 그래서 가족들까지 데리고 오는 거거든요. 책임질 게 있는 사람은 가볍게 움직일 수 없죠.”
“과연…….”
지온은 로빈의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결국 실비아 때문에 이 영지에 몸담게 된 거 같은데. 이 도련님은 역시 생각보다…….
인질은 인질인데 뭔가 인질답지 않게 대접해서 조금 헷갈린다고 해야 하나? 매일매일 행복해하는 실비아도 그렇고. 게다가 이번엔 린이라는 아이도.
뭐, 상관없으려나.
“어쨌든 그 사람들에게 징표가 될 수 있는 물건만 구해주십시오. 이번에 황도로 갈 때 해결하겠습니다.”
“네, 그래주세요. 그리고 주노 상단에 들러서 이번 방문을 조금 당겨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그러려고 합니다. 저나 저희 병사들이 운반할 수 있는 물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앞으로 몇 번은 주노 상단에 신세를 져야겠죠. 주노 님께 너무 신세를 지는 거 같아 조금 답답하군요. 영지 상황이 이래서 주노 님께 이익을 드리질 못하니.”
“그래서 이번에 제가 작은 보답을 하려고요.”
“오…….”
“하하.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그냥 작은 보답이니까요.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
* * *
며칠 후, 지온은 검은 곰 기사단과 치안대 수십 명, 그리고 루이와 함께 황도로 떠났다. 마법 물품과 영지민 이전을 대비해 물자를 구입하기 위함이었다. 봄이 되면 서서히 영지민을 이전해야 했으니 주노가 영지에 들를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영주 저는 아이들과 그들의 보호자로 오랜만에 북적이고 있었다.
영주 저에서 살게 된 아이들은 모야족 아이 여섯과 린, 그레이츠 영지민 아이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 여덟 명과 조부모 다섯 명까지 총 25명.
모두 이번 사태에서 가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사망한 수에 비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적은 것은 가족이 없는 젊은 남자들이 많았고, 부모가 있는 남자 중 다른 부양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제외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은 따로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카인의 자비를 칭송했다고 한다. 이럴 때는 또 은근히 손이 큰 카인이었으니 충분히 보상을 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카인은 영지 내에 떠도는 아이들을 위해 큰 보육원을 세웠다.
히센이 카인에게 직접 부탁한 것이었는데 당장 그 정도 돈은 있었기에 카인도 흔쾌히 허락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히센도 자신이 낸 의견이라면서 재산 일부를 지원하고 있었고 말이다.
사실 히센은 황도에 있을 때도 어려운 아이들을 많이 지원했다고 한다. 도리아도 마찬가지고.
그러고 보면 히센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 왜 아직까지도 짝이 없는지.
4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이번 생에선 포기해야 하려나? 히센의 마나 양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테니 아직은 마지노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백랑은 영주 저로 두 명의 주술사를 보냈다. 히센의 요청대로 모야족의 주술 문양을 연구하기 위함이었는데.
“반갑습니다. 모야족의 주술사 요랑.”
“진랑입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쌍둥이 자매가 주술사랍시고 영주 저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또 살짝 미묘한 게 그녀들은 로빈이 기대했던 주술사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로빈에게 있어 주술사는 망토로 몸을 감추고 음흉하게 웃으며 저주나 시약을 연구하는 마녀 비슷한 이미지였는데, 지금 이 진랑, 요랑 자매는 모야족 여성 특유의 훤칠하고 미끈한 몸매에 짐승 가죽으로 몸의 중요 부분만 가리고 긴 창을 든, 그야말로 아마존 여전사 같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뭐 하나 예상이 들어맞는 게 없는 모야족이었다.
게다가 둘 다 제법 미녀임에도 욕구 불만이라는 성향과 30년 묵은 처녀(R)라는 희한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뭐…….
로빈도 처음에는 어이없었는데, 이왕 온 김에 영지에서 짝이나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냥 웃어넘기려 했다.
“모야족의 주술사로서 제국의 귀족에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제국의 귀족들은 여성을 제압할 때 특별한 포박법으로 저항 의지를 꺾는다고 했어. 뭐더라? 귀갑 묶기? 그걸 당하면 아무래도…….”
“나도 들었어. 진랑,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방심하면 그날로 바로 육변기나 가축이 될 수도 있어.”
“…그건 오히려 괜찮을지도?”
이런 식으로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이놈의 편견은 대체. 게다가 내용도 너무 매니악하지 않나?
광황이 모야족을 증오해 살육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육변기나 가축이라니.
그러고 보니 백랑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가?
그런데 막상 아이와 같이 온 어머니들이나 조부모들은 특별히 귀족들이나 제국을 무서워하는 거 같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월아가 모야족의 전통이나 구전은 주술사들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고 했던가? 그러니 이 어이없고 잘못된 정보의 뿌리도 어쩌면 저 주술사들일지도.
어쨌든 저렇게 주술사가 영주 저에 머물기로 했으니 자세히 관찰해 봐야겠다.
그렇게 한곳에 모인 아이들의 사이는 당연히 서먹서먹했다. 게다가 영지 아이들은 듀발이, 모야족은 린이 대장처럼 되어버리며 갈등을 빚고 있는 거 같기도 했고.
하긴 원래 듀발이 그 골목의 골목대장이랬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덟 살 듀발이 여섯 살 린에게 처참히 제압당하며 모야족 아이들이 영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 듀발, 여섯 살짜리 린에게 밀리는 넌 대체. 물론 린이 좀 유별난 녀석이긴 하지만 너무하지 않니?
그러나 그런 다툼도 로빈이 등장하면 순식간에 평정되었다.
“주… 주인.”
이상하게 로빈에게 맥을 못 추는 린 때문이었다.
이 녀석, 저번에 만났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백랑이 떠나면서 무슨 말을 한 건지 행동이 좀 이상하다. 덕분에 모야족의 다른 아이들도 로빈을 두려워하는 거 같았고.
어쨌든 듀발은 린에게 무너진 이후, 더욱 이를 갈며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결국 영지 아이들은 졸지에 대장을 잃은 상황. 그러나 듀발이 물러나자 다행히도 린이 그 아이들까지 자신의 패거리에 넣어버렸다.
결국 모든 아이가 린의 조직에 포함되면서 다툼은 종료.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로빈은 실비아가 도리아 여사의 가르침을 받느라 바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실비아까지 있었으면 일이 더 복잡하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 * *
지온이 황도로 떠나고, 폴은 신임 기사들을 훈련하는 데 여념이 없는 시간.
카인마저 지온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이 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처리한 로빈은 지금 기사단 훈련장 주변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 하……. 아씨. 진짜 안 한다니까. 이 추위에 이게 무슨 X신 짓이야? 이건 너무한 거 아냐?”
마수 범람이 있기 전 마나를 느끼기 위해 한 달 정도 당차게 훈련했던 로빈은 그 난리를 겪은 후 의지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만약 소설의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들이 그런 위기를 겪었으면 더 절치부심 훈련에 집중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다든지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고 가메라의 미친 듯한 위압감, 그리고 그런 놈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백랑의 용기, 놈의 머리를 한 방에 꿰뚫은 폴의 기교에 기가 질려 훈련을 포기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아무리 해도 저렇게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훈련에 흥미가 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한 달간 엄청 열심히 훈련했지만 전혀 마나가 느껴질 기미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기사 하나에게 슬쩍 물어봤는데, 그 기사가 4년 동안 훈련해서 마나를 느꼈다는 이야기에 완전히 의욕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그게 아니란 것이 인생의 진리였고, 오늘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는 마리아나의 변심(?)이 큰 몫을 차지했다.
처음 로빈이 훈련을 시작하던 날.
마리아나는 너무 어린 로빈이 벌써부터 훈련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불만이 컸다.
그녀의 불만은 아무리 귀족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하는 마나라지만 기사가 될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어린 나이에 힘든 훈련을 시작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신도 열 살이 넘어서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마나를 느꼈으니 로빈도 그때쯤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리아나가 변했다.
계기는 바로 이번 마수 범람.
딱 보니 글러 먹은 로빈이 앞으로도 저렇게 설칠 거 같은데 그럴 거면 최대한 몸이라도 건강하게 어릴 때부터 강하게 훈련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마나를 느꼈을 때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장점들을 어필한 폴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도 컸다.
사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행복(?)한 것도 극한 환경에서 아주 어린 나이에 마나를 깨우친 윌리엄의 덕분 아니던가.
그러니 마리아나야말로 그 혜택이 가정의 행복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체감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로빈의 천적인 마리아나가 저렇게 나오니 로빈도 도저히 훈련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당장 훈련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비트 수프를 끓이겠다는 마리아나의 은근한 협박을 이길 방도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번 난리의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데 로빈에게 당할 재간이 있을 리가. 아마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아씨! 진짜 나 혼자는 못 죽어!”
그렇게 며칠간 듀발과 함께 열심히 구르던 로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는데…….
“에이. 꼬맹이들, 다 집합해!!”
자기네들끼리 눈싸움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는 꼬맹이들을 집합시켰으며.
“도리아 님,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연금술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아요? 그러니 실비아도 우선 마나부터 깨우치기로 하죠. 어차피 훈련이라고 해도 오전 중에만 하는 거니까 교육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어머, 그건 그렇지만 실비한테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실비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때, 실비? 할 수 있지? 난 널 믿어. 넌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아이니까.”
“…네. 도련님.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순진한 실비아까지 꼬셔서 훈련에 동참시키고 마는데.
그나마 이제 세 살 되는 세이라를 훈련 멤버로 합류시키지 않은 것이 로빈의 마지막 양심이었다.
그렇게 로빈은 모든 아이들이 자신처럼 괴로움에 몸부림치자 이내 마음에 평안을 얻고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이 훈련이 자신의 심술이 아니라 응당 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자기 합리화까지 완벽하게 마친 후였다.
“후후. 이제 좀 할 만하네. 괴로움은 서로 나눠야 하는 법이지. 꼬맹이들, 뛰어! 발이 보인다! 어?”
하지만 누구와 함께하든 로빈이 마나를 느낄 일은 요원하기만 했다. 괴로운 훈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 * *
로빈이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뜀박질 중이던 그 시각.
거주민 수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 크로츠에 인상 좋은 남자 하나가 방문했다.
한겨울에 생각지도 못한 외지인에 마을 사람들은 의아함을 느꼈고.
“응? 이런 곳에 외지인이라니, 자네는 누군가?”
“예, 어르신. 보부상입니다.”
“보부상? 이런 곳에 보부상이라니 별일을 다 보겠군. 그래, 뭘 가져왔지?”
“간단한 생필품이죠, 뭐. 비누와 옷가지, 그리고 몇 가지 향신료입니다.”
“흠… 괜찮긴 하다만 이 마을에서 지금 그런 걸 살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구먼.”
“하하. 아주 저렴하게 파는 거니 사람이나 모아주십쇼. 남쪽 마을에 물량을 넘기고 남은 걸 처분하는 거라서요. 이걸 계속 들고 다녀봤자 짐밖에 더 되겠습니까?”
“음… 좋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