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47화 (47/303)

47화

“에이. 뭐, 어때. 그냥 할 만한 사람들이 하는 거지. 솔직히 소영주님이라면 내가 식량을 관리한다면 믿을 수 있겠어?”

“솔직히 좀 그렇죠? 흥청망청하다가 나중에 쫄쫄 굶을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지. 역시 사람 볼 줄 안다니까. 그래서 월아가 하는 거야.”

이런 자유로운 영혼 같으니라고. 일은 다른 사람한테 다 떠넘기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냥만 실컷 하고 있겠군.

“할 말 없네요. 월아 님께 잘해 드리세요. 진짜 복 받으신 거니까.”

로빈은 월아 같은 여자를 아내로 둔 백랑을 한껏 부러워하다 순간 그가 했던 말 중 생소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초식 마수를 가공한다는 이야기였는데.

대수림이나 마수 산맥같이 마수가 많이 사는 곳도 당연히 그 나름의 생태계 먹이 사슬이 유지되고 있었다.

육식 마수 외에 먹이 사슬의 최하단에 위치한 약체들이 있다는 뜻이었고, 그건 바로 마수가 아닌 일반 짐승들과 초식 마수들이었다.

그중 특히 초식 마수들은 비교적 공격성이 적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다른 존재들을 쉽게 공격하지 않았는데, 마수 범람 때 방패병들을 괴롭힌 루터카우도 사실은 이 부류에 속해있었다.

물론 마수 범람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이벤트가 벌어질 때는 전혀 다르지만, 평소에는 그 사납던 루터카우도 얌전하게 풀을 뜯는 거대한 황소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수는 마수, 잡아봤자 역한 냄새 때문에 절대 먹지는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 백랑의 말은 그놈들을 먹을 방법이 있다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잠깐만요, 백랑 님. 초식 마수를 가공한다니요. 그놈들을 어디다 써요?”

“엥? 어디다 쓰긴, 먹지. 제법 맛이 괜찮은데. 소영주님은 못 먹어봤어?”

“먹는다고요? 역겨워서 못 먹는다던데요.”

“응? 아… 당연히 그냥 먹으면 못 먹지. 주술사들이 만든 숙성 창고에서 일주일 정도 잘 보관하면 먹을 수 있어. 육질도 괜찮고 향도 좋아. 특히 혼 래빗. 이놈이 예술이지.”

“허……. 주술로 만든 숙성 창고. 그런 게 있었다니. 아니, 마수를 만난 게 8년밖에 안 됐는데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천 년 동안 마수와 드잡이질한 제국민들은 전혀 모르는 정보를 마수와 8년밖에 싸우지 않은 모야족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로빈은 기운이 쭉 빠졌다. 자신의 조상들이 너무 무능력하지 않은가.

“아, 여기 와서 보니까 마법 물품 중에 냉동 창고? 뭐 그런 식량 보관 창고가 있더라고. 하지만 우리는 마법 물품을 쓰지 않잖아? 그런 걸 만들 기술도 없고, 구입할 방법도 없어서. 그래서 전통적으로 식량을 오래 보존하는 방법을 오래 연구해 왔지. 마나를 이용한 숙성 창고는 그 결과물이고.”

처음 마수가 대수림에 등장하던 시기.

모야족은 들판에서 루터카우를 사냥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놈이 마수인지 모르고 그냥 특별히 큰 물소인 줄 알고 잡은 거였다.

거대한 놈답게 고기가 아주 많아 마을에서는 당연히 잔치가 벌어졌고.

놈을 해체해 자연스럽게 창고에 넣고 남은 걸로 그날 잔치를 벌였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오묘한 맛에 그만 모두 뱉어버리고 말았단다.

그리고 모두 울분을 토하는 가운데 창고에 넣어둔 고기의 존재는 그냥 그대로 잊혀졌다. 물론 다시는 그 거대한 소를 사냥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부족민 하나가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고깃덩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누가 사냥해 온 고기이겠거니 하며 요리를 했는데, 그 고기가 생전 처음 먹는 훌륭한 맛이었다고 한다.

이게 대체 무슨 고기인지 궁금했던 부족민들은 창고에 있는 고기의 출처를 조사했고 자신들이 먹었던 게 그때 그 엿 같은 황소의 고기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단다.

“음……. 우연의 우연인가요? 원래 중요한 발견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는 하지만 부족민이 몇이나 된다고 식량 관리를 그렇게 개판으로 해요? 그때는 다들 흩어져서 살 때잖아요?”

“아니지, 소영주님. 작은 마을이니 오히려 더 그런 거지. 어쨌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초식 마수의 고기는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 당시에는 그게 마수인지도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게 된 거고. 하지만 아무리 숙성해도 육식 마수는 못 먹겠더라고.”

초식 마수를 먹을 수 있다라. 마수가 넘치는 곳이니 이 이야기가 식량 사정에 도움이 되려나?

아니, 초식 마수를 잡으러 마수 산맥에 들어가는 건 힘든 일이니 대수림 근처에 사는 모야족에게만 의미 있는 정보인가?

로빈은 신기한 정보라고 생각하며 마수 고기를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궁금하니까 맛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뭐, 좋아. 그럴게. 아 참, 린은 밝게 잘 지내고 있더라고.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 린요. 뭐, 부모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많이 아껴주시긴 하죠. 아이들하고도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너무 잘 어울려서 오히려 문제라고 해야 할지, 참…….”

“에이, 말을 들어보니까 집에서 지낼 때보다 더 귀여움받는다고 하더라고. 사실 우리가 그런 것에는 좀 무관심해서.”

어쩐지 어린 린이 가족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와있는데 아무런 구김 없이 잘 산다 했더니 어지간히 풀어놓고 관심을 주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도 린은 백랑을 롤모델로 삼았다니.

역시 이 남자는 몹쓸 남자라고 해야 하나.

“백랑 님은 몰라도 월아 님은 조금 의외네요. 그래도 아이를 많이 아끼는 거 같던데요.”

“아, 월아. 그 녀석은 린을 많이 챙기긴 했는데 린 자체도 월아보다는 여우를 더 따랐거든. 그런데 여우는 나랑 성격이 비슷해서 방임하는 분위기였고. 린이 월아를 닮아서 깜찍하긴 한데 뭐랄까, 성격은 적호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아, 그래서…….

사실 로빈도 린을 데려오면서 훗날 린이 월아처럼 환상적인 여성으로 자랄 수도 있다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딸들이 엄마를 닮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듀발을 때려눕히는 모습, 아이들의 대장으로 군림하는 모습을 보며 글러 먹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외모가 귀여워도 성격이 저래서야.

그런데 월아가 아니라 적호랑 더욱 죽이 맞아 지냈다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활동에 은근히 제약이 심한 모야족에서 여성으로 전사의 지위에 오른 걸 보면 적호도 어지간히 괄괄한 성격임이 충분히 짐작되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님께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지. 린을 귀여워해 주신다니 말이야.”

“하여간 참 발이 빠르시네요, 백랑 님은.”

저번에 방문했을 때도 폴을 먼저 방문하고 왔다더니 오늘은 마리아나를 먼저 만나고 왔단다.

예의가 있는 것도 같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도 같은 백랑은 어쨌든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모야족 쪽은 별문제가 없다는 거군요. 식량 사정도 크게 나쁘진 않고요.”

“응. 뭐, 그렇지.”

“어쨌든 조금만 더 부탁드릴게요. 솔직히 남쪽 마을은 언제 만들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하겠어요. 돈도 너무 많이 들어서요.”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당장은 살 만하니까. 그리고 우리도 대수림에서 돈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한번 찾아볼게.”

“그래주면 고맙죠.”

어쨌든 대수림 쪽도 큰 문제가 없고 모야족도 당장은 문제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남쪽에 아직 제대로 된 마을이 없다는 건 좀 답답한 일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완성될 때도 된 거 같은데. 아직 멀었나?”

백랑이 떠나고 혼자 남은 로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탕 해먹을 수 있는 큰 건(?)이 완성될 시기가 지난 거 같은데 너무 소식이 없어 조바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진짜 인생의 역작을 만들려고 그러시나?

그리고 얼마 후,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드디어 로빈이 기대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가을부터 겨울까지 윌리엄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로빈과 식구들은 한달음에 그의 작업실로 달려갔다. 어떤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로빈은 가족들에게도 윌리엄의 그림을 내다 팔 거란 사실을 숨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항상 정원에서 빈둥대던 윌리엄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 가족들이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한 마리아나와 세릴의 철저한 심문 끝에 윌리엄이 결국 실토하게 되었고 지금은 모든 가족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가족들의 반응은 조금씩 달랐는데, 수도에서의 윌리엄을 지켜본 바 있는 마리아나는 웃으며 응원하는 입장이었고 영지에 정착한 후의 윌리엄만 알고 있는 세릴과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되겠어?’라는 반응이었다.

특히 카인은 그림 같은 예술품은 작품의 수준보다 화가나 제작자의 명성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자신의 사위가 그림 솜씨가 좋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딱히 유명한 화가인 건 아니니 황도 귀족들의 외면을 받을 거로 생각한 거였다.

윌리엄이 ‘윌’이란 이름으로 황도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알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로빈이나 윌리엄도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하지만 가족 모두 솜씨가 대단한 윌리엄의 신작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 신작이 공개되는 오늘, 모든 가족이 윌리엄의 방, 그의 작업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서방님, 빨리 공개해 주세요. 현기증 나잖아요!”

세릴이 강하게 보채자 윌리엄은 웃으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을 하나씩 공개했다. 그리고 그림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가족들의 입에서는 감탄사만 터져 나왔다.

“세상에…….”

“아니, 이 정도였다고? 과연 헛바람이 들어 황도에 내다 팔겠다고 한 건 아니었군.”

“서방님, 멋져요.”

그건 윌의 명성을 알고 있던 로빈마저도 마찬가지였다.

와… 미쳤네, 진짜.

로빈은 평소에 그림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전생에서도 피카소니, 고갱이니 대단한 화가들이 있었지만 사실 로빈의 눈에는 그 그림들이 그냥 지저분한 낙서 따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저것들을 알아보는 예술가의 안목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고.

게다가 저런 그림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사람 중 저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로빈의 눈에는 그냥 다 허세나 허영심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윌리엄의 그림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추상적인 그림도 아니었고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그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로빈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건 아니건, 저 그림을 보고 혹평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로 생각했다. 만약 있다면 그냥 남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양아치이거나, 아니면 윌의 명성을 시기한 소인배 정도일까?

로빈은 처음에 윌리엄에게 그림을 부탁할 때 ‘행복’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인생의 역작을 그리겠다는 욕심에 윌리엄이 추상적이고 비극적인 그림을 그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예술가들이 작품성이나 예술성에 욕심을 내게 되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빈은 그렇게 추상적이고 난해한 그림보다 차라리 돈 많은 졸부가 봤을 때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되길 원했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작품이 나와도 윌의 작품이니 허영심으로 사긴 하겠지만, 자신이 이해하고 정말 마음에 들어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현질(?)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금액도 높아질 것이고.

그런데 윌리엄은 행복이라는 주제로 그려달라고 했더니 온통 영지나 가족들만 그려놓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려놔서 상관없을 거 같긴 했지만.

특히 첫 번째로 소개한 그림이 그중 가장 압권이었다.

“이 그림은, 흠흠. 아름다운 마리아나를 그린 거야. 마리야말로 내 전부요, 행복이지.”

“어머~”

들꽃이 흐드러진 집 정원에서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치마 끝을 살짝 들며 고개를 살포시 숙이는, 마치 사교댄스를 추기 전에 상대에게 인사하는 듯한 마리아나로 추정되는 여성을 그린 그림.

여기서 로빈이 마리아나로 추정되는 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솔직히 마리아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나가 못난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정도는 아니건만, 무슨 예술적 미화가 저리도 심하단 말인가. 그냥 윌리엄의 솜씨가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윌리엄의 눈에는 마리아나가 저렇게 보이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