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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48화 (48/303)

48화

미화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실제로 마리아나의 아버지인 카인마저 “엥?”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리아나를 다시 확인했을 정도였다. 세릴도 말은 못 하지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고.

솔직히 로빈도 윌리엄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냥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대부분의 그림이 다 이런 식이었다. 이러니 다른 사람들은 이게 그레이츠 자작령과 관련이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특히 마리아나의 그림 같은 경우 누군가 알아볼 정도로 비슷하면 팔지 못할 뻔했는데 저 정도로 재창조가 들어갔으니 아무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도 사실성에 입각한 그림이 한 장 있긴 했다.

바로 마지막에 윌리엄이 ‘나의 보물’이라고 표현한 그림이었는데 이 그림은 아기 둘이 요람에 누워 방긋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붉은빛이 몽롱하게 감도는 진한 갈색 머리의 아이 하나와 마리아나를 닮은 밝은 갈색 머리의 아이 하나.

로빈이 이 그림이 사실성에 입각했다고 생각한 이유는 저 붉은빛이 깃든 갈색 머리 아이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가족의 보물, 세이라가 아기 때 꼭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로빈은 세이라 옆에 있는 아이가 자신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쌍둥이처럼 같이 누워있는 두 아기.

윌리엄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과 세이라의 갓난아이 때의 모습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그림이 가족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그림이기도 했다.

“와……. 이건 진짜.”

“이걸 팔겠다고? 그냥 나한테 파는 게 어떤가?”

“하……. 이건 정말, 너무 귀여워요. 진작에 이런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어야 했어요.”

도대체 저 그림이 얼마에 팔릴 줄 알고 겁 없이 막 지르는 카인.

감탄만 터트리는 마리아나.

진작에 이런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는 세릴까지.

하긴 사진기가 없는 세상이었으니 사랑하는 두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이 그림이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으리라. 게다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투 샷이지 않은가.

이 그림을 판다는 이야기에 시무룩해졌던 가족들은 윌리엄이 웃으며 비슷한 구도의 그림 한 장을 더 꺼내자 화색이 가득해졌다.

가족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이 그림은 두 장을 그렸던 것.

처음 소개한 그림의 배경이 어딘지 알아보기 어려웠다면, 두 번째 그림은 지금 살고 있는 영주 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고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로빈도 이 그림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고.

판매용과 소장용을 구별해서 그려놓다니. 울 아부지한테 이런 센스가?

윌리엄이 로빈의 부탁으로 그린 그림은 총 일곱 장.

판매용으로 그린 그림 여섯 장과 소장용 그림 한 장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호들갑을 봤을 때 제법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평소에 자신의 사위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는 듯 과하게 감탄하는 카인의 모습을 보니 더욱 기대되었고.

그리고 며칠 후.

지온이 주문한 온갖 자재들과 물품을 가지고 주노가 그레이츠 자작령을 방문했다.

자신의 부탁대로 주노가 저택을 방문하자 로빈은 윌리엄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바로 윌리엄이 그린 여섯 점의 그림을 소개했고.

“허, 이게 다 윌의 작품이라고요? 세상에, 이렇게나…….”

주노는 고급 물감으로 정성스럽게 그려진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살펴보며 연신 감탄만 터트렸다. 그리고 윌리엄은 진지한 얼굴로 로빈과 미리 맞춰 놓은 이야기를 주노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 이 그림들이 이 친구의 마지막 작품일 거야. 내가 남부 연합에 사는 친구에게 선물받은 그림인데, 그 친구가 그러길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이 그림만 남기고 웃으며 세상을 떠났다더군.”

“…윌의 진짜 유작이군요, 이 그림들이.”

“자신의 전 재산으로 화구랑 물감을 샀다니, 아마 그 친구도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나 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역작을 남기고 싶었나 보네요. 확실히 윌 정도 되는 예술가라면 이해가 되는 일이기도 하죠.”

“그렇겠지.”

로빈은 자신과 입을 맞춘 이야기이긴 하지만 뻔뻔하게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윌리엄의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능청스럽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저건 무슨 연기력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뒤로도 윌리엄은 한참이나 그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노에게 늘어놓았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로빈은 그림 한 점을 가리키며 주노를 바라보았다.

“이 한 점은 상단주님께 드리는 선물이에요.”

“네? 선물이요?”

딱 봐도 상당히 고가로 팔려 나갈 거 같은 그림 한 점을 선물로 주겠다는 로빈의 말에 주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에는 돈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그냥 그림으로 드리는 게 더 가치가 있을 거 같더라고요. 그렇죠?”

“네, 맞습니다. 이 그림은 그냥 단순히 경매가 정도의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니까요.”

“역시 바로 아시네요. 지금까지 영지를 신경 써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에요. 물론 주노 님이 신경 써주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선물이지만 어쨌든 받아주세요.”

“허허.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주노의 말대로 이 그림은 단순히 금전적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니었다. 윌의 진짜 유작이자 경매가 끝나면 돈으로 절대 구할 수 없는 그림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상인인 자신이 이 그림으로 로비를 한다면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고위 귀족 누군가와 안면을 트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으니.

결국 주노는 그림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고 말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상단주님.”

“네, 도련님. 상당한 금액이 나올 거 같으니 기대하십시오.”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 주노의 상행에는 검은 곰 기사단 몇을 대동시켰다. 물론 주노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괜히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림이 제값에 팔린다면 영지에서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들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윌의 유작이라고 속이며 그림을 파는 일.

솔직히 로빈도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림이 너무 최근에 그려졌다는 사실과 남부 연합에서 죽었다는 윌의 행적을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윌이 수십 년 전 인물도 아니고 그의 최후를 확인한 사람도 없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화풍 자체도 시중에 떠도는 초기작보다 더욱 성숙하니 할 말도 있었고.

그리고 정말 누군가가 윌의 스토커처럼 주노에게 파고들어 여기까지 찾아온다면 뭐, 남부 연합국 어딘가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가 거기까지 찾아간다면, 그건 그때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차피 죽었고, 유작까지 다 나온 화가를 찾아 거기까지 찾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갈 수 있는 세계도 아닌데 굳이 그럴 리가.

“아빠, 진짜 실감 나던데요. 어디서 연기를 따로 배우셨어요?”

“하하. 내가 집을 나가서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이 유랑 극단이었거든. 여러 곳을 둘러보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래서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몇 가지 극을 같이 꾸미기도 했지.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와, 진짜 이쪽 방면으로는 안 해본 게 없구만. 이게 진짜 종합 예술인인가?

“그런데 굳이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의 의미가 있는 거냐?”

“그럼요, 아빠. 기다려보세요. 아마 그 스토리가 저 그림의 가치를 더욱 빛내줄 테니까요.”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윌리엄은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들이 사온 물감과 화구로 그린 자신의 역작들.

윌이란 이름으로 팔려 나갈 마지막 그림들이었지만 전혀 아쉽지는 않았다. 그런 허명이 아니라도 자신은 충분히 많이 가진 행복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래도 자신의 정성이 많이 깃든 녀석들이니 많이 아껴줄 사람이 사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주노가 대량의 건축 자재를 보급하자 현장은 활기를 띠었으며 공사 또한 빠르게 진척되기 시작했다.

존의 보고에 의하면 카인이 워낙 보수를 후하게 쳐주기 때문에 일은 고되지만, 불만을 품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아마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큰 문제없이 잘 마무리될 거 같았다.

남쪽의 모야족은 여유 있는 인력으로 대수림 초입부에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를 일부 베어 공사 현장으로 날라주고 있었다.

어차피 대수림을 감시하기 위해 시야를 정돈해야 했고, 그 과정으로 숲 일부를 제거한 것인데, 집을 짓기에도 충분히 튼튼한 목재라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로빈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역시 월아는 현명하다고 외치며 크게 기뻐했다. 백랑이 그런 생산적인(?)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 월아가 계획했을 거로 생각한 것이었다.

자재를 자체 조달한 만큼 돈을 절약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어이없지만 이 의견은 백랑이 낸 것이라고 한다.

물론 백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의견을 낸 것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감시하기 좋게 시야를 가리는 나무 몇을 벌목한 후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자 전사 하나가 이걸 어떻게 하냐고 물었는데 그때 백랑이.

“뭘 어떻게 해? 그냥 갖다 버려. 아니면 저 위쪽에 공사하는 데나 가져다주든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그 나무들이 공사 현장으로 투입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무를 공사 현장까지 나르는 데 인력이 너무 낭비된다고 생각하던 월아도 공사 현장에서 자재에 대한 대가를 넉넉히 치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모야족의 여유 인력 모두를 동원해서 나무를 나르게 되었다.

물론 귀족이 영지민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이런 후 한 대가를 치를 줄은 몰랐다고 감탄하는 것은 덤이었다.

도대체 저런 편견은 대체 언제쯤 사라질는지.

대수림의 나무를 벌목해 공사 현장에 투입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지온은 벌목과 마수 토벌을 동시에 진행하는 모야족의 저력에 그들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마수가 튀어나오는 대수림을 벌목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에 배제한 것인데 모야족이 아무런 사고 없이 그 일을 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유가 생긴 공사 비용은 당연히 모야족의 부족한 식량을 사들이기로 하였다.

당분간 모야족에 대한 지원은 꾸준히 이어져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이번 일로 영지의 부담이 조금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언제나 별문제 없던 에보니 마을과 우버 마을 역시 별 탈 없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다만 그곳에 새로 파견된 관리 둘은 보고 체계를 정비하는 일환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연락망을 새로 관리하고 정확한 인구수를 산출하는 등의 기본적인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단다.

아마 정비가 완료되면 징세 같은 행정적인 업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 진짜 답이 없네.”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로빈의 마음은 편하지만은 않았다. 영지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식량 문제와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중앙에 마을을 건설하고 근처를 경작지로 관리할 계획이었지만 지온의 예측에 따르면 그곳에서 경작을 시작해도 영지 전체를 먹여 살릴 수는 없다고 한다. 아무래도 토질이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는 로빈이 원하는 식량 자급을 이룩할 수 없으니 근심이 깊어질 수밖에.

사실 지금 상황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한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제국의 식량 사정은 언제나 넉넉한 편이었고, 영주가 미친 듯이 폭정하지 않는 한 영지민들이 굶주리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영지 자금이 궁핍했던 그레이츠 자작령조차도 그 얼마 없는 자금으로 식량을 사 모으면 겨우내 영지민을 굶주리게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지금까지 제국 내 식량 사정이 얼마나 좋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로빈은 식량 문제는 무조건 영지 내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렇게 식량을 마냥 다른 영지에서 계속 구입하다가 제국의 곡창 지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가장 먼저 직격타를 맞게 되는 건 자신들처럼 가난한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밥줄을 다른 곳에 맡겨놓아선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원작이 시작되면 예상치도 못한 재앙으로 곡창 지대에 문제가 생겨 가난한 영지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곡창 지대가 상하면 자연스럽게 곡물 값이 올라가고 가난한 영지는 돈이 없어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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