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러니 가난한 영지의 대표 격인 그레이츠령에 살고 있는 자신이 이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처럼 영지에 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 일을 공론화하여 크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나 있을 재난을 대비해 바쁜 사람들을 붙잡고 늘어질 순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나마 한가한 로빈이 혼자서 궁리하는 수밖에.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밀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농작물을 주식으로 삼았다.
이놈은 그야말로 밀 같기도 하고 쌀 같기도 한 놈이었는데, 쌀처럼 밥을 해먹거나 밀처럼 가루를 내어 빵이나 면으로 뽑아 먹기도 했다.
물론 전생에서도 쌀로 빵이나 면을 뽑아 먹긴 하지만 밀로 만든 면이랑 쌀로 만든 면은 질감 자체가 다른데, 이 밀쌀을 면이나 빵으로 만들면 딱 밀면이나 밀빵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이름처럼 밀의 특성과 쌀의 특성을 모두 가진 이상한 녀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로빈도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생각이었는데, 그냥 그렇다는 데 뭐, 어쩌겠는가. 게다가 실제로 먹어보니 정말 설명대로라 딱히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밀쌀은 기본적으로 제국 전역에서 잘 자라는 농작물이었다. 다만 기후나 토질에 따라 수확량은 조금 달랐는데 남쪽의 따듯한 지역은 수확량이 대단히 많은 편이었지만 그레이츠 영지처럼 전체적으로 서늘하고 겨울에는 추운 지역에서는 수확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평야를 정비한다고 해도 큰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을 사 먹어야 하나? 물론 원작 시작까지 아직 한참 남아서 당분간은 큰 탈이 없겠지만. 여긴 왜 구황 작물도 안 자라냐고. 고구마, 옥수수 안 되냐, 진짜? 리퉁 같은 거 말고!”
로빈이 식량 문제로 처음 고민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역시 구황 작물이었다. 전생에서 무수히 봐온 소설들에서도 식량 사정이 안 좋은 영지에서는 여러 가지 구황 작물로 밀이나 쌀을 대체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자나 고구마, 그리고 옥수수였다. 밀쌀같이 이상한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의 식자재는 전생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로빈은 당연히 이곳에도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가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확인해 본 결과 다행히 고구마나 옥수수는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후인 그레이츠령에서는 잘 자라지 않아 키우지 않는 것이다.
특히 고구마 같은 경우에는 기후가 전혀 맞지 않았고 옥수수는 간당간당하긴 한데 날씨 때문인지, 토양 때문인지 알이 잘 여물지가 않았다. 역시 이곳에서 천 년이나 살아왔던 조상들이 저런 놈들을 키우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황 작물 중 그나마 기후에 맞는 건 감자였는데 하늘이 자신을 우롱함인지 이곳에는 감자가 없었다. 다만 리퉁이라는 감자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을 뿐.
그런데 이놈은 이름도 감자가 아닌데다가 정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놈이었다.
처음에 로빈이 감자의 외형을 설명하고 혹시 이런 비슷한 게 있냐고 물었을 때 하녀들이 그건 리퉁 아니냐고 되물었었다. 그 말에 로빈은 역시 감자가 있긴 있구나, 싶어 신나하며 가져오라고 했었고.
그리고 그놈을 삶아서 한입 베어 물었는데.
비록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짧은 생 동안 이렇게 쓴 건 정말 처음이었다. 예전에 TV에서 봤던 총명탕이 이런 맛일까?
모두 뱉어낸 로빈은 한참이나 어이없는 눈으로 리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나중에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요 리퉁이란 놈은 영지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놈인데 워낙 써서 ‘개도 안 먹을 리퉁’이나 ‘마수나 처먹을 리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실제로 초식 마수 중에 리퉁을 먹는 놈도 있다고 하니 역시 마수답게 혀도 아주 강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로빈은 조리 방법을 바꾸면 혹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감자처럼 생긴 리퉁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봄 내내 리퉁과 씨름하던 로빈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자력으로 리퉁의 조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빈은 리퉁을 들고 그나마 영지 공사와 무관한 도리아와 히센에게 자문했다.
“오~ 그건 리퉁 아닌가요? 리퉁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박식한 도리아는 역시 리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혹시 전문가는 뭔가 다를 수도 있다는 기대 속에 시작된 대화.
자신이 경험한 실패담을 모두 설명한 후 리퉁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로빈의 말에 도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퉁은 마나가 풍부한 곳에서만 자란다고 해요. 대부분 마수가 자생하는 지역 근처라고 할 수 있죠.”
“아, 그래서 저희 영지에 그렇게나 많이 자라는군요.”
“맞아요. 그리고 리퉁에서 쓴맛이 나는 이유는 안 좋은 마나 때문인데…….”
도리아는 새로운 것에 환장하는 연금술사들이 이미 마수가 자생하는 지역 근처에서만 자란다는 리퉁에 대하여 여러 번 분석을 거쳤다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로빈에게 설명해 주었다.
조사 결과 리퉁은 마나가 비교적 풍부한 곳에서만 자라는데 땅속에 포함된 마나를 흡수하면서 자라기 때문이란다. 다만 좋은 마나보다 오염된 마나를 더 잘 흡수하기 때문에 쓴맛이 나며, 안 좋은 마나가 다량 포함된 리퉁을 먹는 건 건강에 해롭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그야말로 구황 작물을 구하려다가 오염 물질을 구한 셈인데.
“그래도 땅에 리퉁을 많이 심어놓으면 토양이 좋아진다고 해요. 그래서 아마 이곳에서도 농작물을 심을 때 리퉁과 함께 심을걸요? 그레이츠 영지에서 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이유도 아마 오염된 마나 때문일 텐데 리퉁과 함께라면 그나마 수확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도리아의 설명을 들은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몇 분도 안 돼서 바로 리퉁을 구해왔다 했더니 다들 농사를 지을 때 같이 심는 작물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이걸 먹어보겠다고 굽고 찌고 난리를 피웠다니.
솔직히 아무리 어린아이 소꿉장난 같아도 이 정도 되면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가끔 보면 이 집 어른들도 참 너무한다.
제법 실망하긴 했지만 로빈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량으로 수확하는 리퉁인데 만약 다른 쓸모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도리아 님, 만약 리퉁에서 나쁜 마나를 제거하면 먹을 수 있겠죠?”
“네, 그건 그렇겠죠. 아, 어떤 마법 공학자가 그런 장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리퉁이 마나를 흡수하면서 자라니 나쁜 마나를 제거하면 좋은 마나만 남을 거로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좋은 마나만 남은 리퉁을 마나 포션의 재료로 쓰려고 한 거죠.”
“오, 그래서요?”
“불행히도 실패하고 말았죠. 나쁜 마나를 제거한 리퉁은 그냥 마나가 없는 녹말 덩어리였거든요. 학계에서는 리퉁의 마나를 구별해서 제거할 수는 없다고 결론 냈고요.”
“끙, 녹말 덩어리면 그래도 먹을 수는 있는 거네요. 그런 장치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마 하도 예전에 일이라 장치가 남아있진 않을 거고. 그 장치를 직접 만들려면… 한 20만 골드 정도는 들지 않을까 싶네요.”
그 돈이 있으면 그냥 그 돈으로 식량을 사서 비축하지 리퉁의 마나를 제거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가격에 실망한 로빈은 자상하게 설명해 준 도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바로 히센을 찾아갔다.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쯤에서는 희망이라기보다 그냥 오기에 가까웠다.
요즘 히센은 정말 바빴다.
마수 범람 때 망가진 마법 갑옷을 손보고 북부 관문의 보호 마법진을 점검한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인데 가메라, 트리플헤드의 가죽으로 계속 가죽 갑옷이 완성되고 있었고 영지의 유일한 마법 공학자로서 당연히 그것들에 마법을 부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야족의 주술 문양과 마법 갑옷이 서로 공명하는 이유까지 밝혀야 했으니 아마 지금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히센한테까지 찾아가는 건 민폐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놈의 오기가 뭔지, 참.
“하, 이 녀석아. 지금 바빠 죽겠는데 그런 쓰레기를 들고 와서 뭘,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히센은 리퉁을 보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해버린다.
역시 히센. 직설적이고 할 말 다하는 남자. 이런 경우에 자비 따위는 없었다.
순간 울컥한 로빈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눈앞의 남자가 거의 염가로 영지에 봉사해 줄 유일한 마법 공학자라는 걸 떠올리며 겨우 억울한 마음을 달랬다.
그나저나 쓰레기라. 역시 히센의 눈에도 그렇다는 건가?
그리고 이 녀석을 먹을 수 없겠냐는 로빈의 말에 히센은 한숨만 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그 X신 말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이 나올 줄이야. 마법적 처리를 하면 먹을 순 있지만, 그 비용이면 그냥 다른 걸 사 먹는 게 훨씬 쌀 거야. 마법적 처리를 마치면 그냥 녹말 덩어리라 그야말로 식량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역시 도리아와 같은 평가였다. 나름 업계에서 저명한 두 전문가의 조언이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로빈은 한숨을 지으며 이왕 온 김에 주술 문양을 연구하던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히센의 양옆에 앉아있는 저 주술사 자매도 주술 문양 연구 때문에 히센과 동고동락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신체 능력 향상 마법이 주술 문양과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모양인데 그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어. 그, 모야족의 주술 자체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서 말이야. 그래도 여기 요랑이랑 진랑이 계속 조언해 주고 있으니 시간이 걸릴 뿐 불가능하진 않을 거 같구나.”
“저희만 믿으세요.”
“히센 님도 금방 주술을 익힐 수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주술 문양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두 자매에게 주술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모양인데.
다만 저 두 자매가 히센에게 찰싹 붙어있는 것이, 왠지 분위기가 좀…….
이봐요, 니들. 설마 히센 님께 꼬리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히센 님도 니들이 두려워하는 그 제국 귀족이거든. 너희 그렇게 쉬운 여자들이었어?
얼핏 봐도 저 자매는 히센 님께 사심이 있어 보였다.
와, 히센 님에게 이런 식으로 봄날이?
물론 저 나이가 될 때까지 혼자였다는 건 조금 가슴 아프고, 그래서 히센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지만 바쁘다고 자신을 타박한 주제에 늘씬한 모야족 미녀 둘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좀 심통이 났다. 그러라고 둘을 붙여준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분위기를 보니 히센은 저렇게 찰싹 달라붙는 주술사 자매의 대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건 아마 지금까지 저런 일이 한 번도 없어서일 테고, 계기만 있으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기세였으니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래요? 어차피 그 주술 문양을 모야족 전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새겨줄 수 있냐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요.”
“그건 가능한 모양이야. 아직 직접 실험해 보진 않았는데 주술 자체가 애초에 모야족의 오리지널 비전도 아니고 어떤 서적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지식이라고 하니까.”
“그런가요? 흠…….”
하지만 도대체 그런 지식은 어떤 서적에서 얻게 된 것일까?
로빈은 순간 한때 대수림에 어떤 물건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결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물건과 관련된 서적에서 얻게 된 지식일까?
무엇이 봉인되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대한 결계를 유지할 정도로 대단한 마법적, 혹은 주술적 능력을 갖춘 누군가가 봉인한 것일 테니 그것과 관련된 무언가를 모야족이 얻었다면 저런 신기한 주술 문양의 존재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모야족의 족장인 백랑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는데 히센과 대화하다 보니 이것도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조만간 확실해지면 지원자를 받아서 기사들에게 시술해 볼 생각이야. 무슨 부작용이 있을까 조심스럽긴 한데 만약 잘되기만 한다면 기사단의 전력이 많이 올라가겠지.”
만약 저 문양을 기사단에게 새겨줄 수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폴이 이끄는 영지의 기사단은 상급 이상의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일격 필살에 특화되어 있는데, 그런 기사들의 힘이 순간적으로 증폭한다는 의미였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특히 상급 마수 가메라에게 결정타를 먹인 폴이 그런 문양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위력을 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진짜 지치거나 다치지 않은 정상적인 상급 마수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게 아닐까?
“어쨌든 그건 반가운 소식이네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