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이번 그림은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앞에 경매했던 작품보다 1.5배 정도 큰 화폭에는 아담한 저택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그려져 있었고, 갈색 머리의 여성이 작은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저 그림들이 한 가지 주제로 관통하는 연작이며 세트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그림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그림들을 사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것 하나면 저 앞의 그림들을 모두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앞에 그림을 산 사람이나 한 장도 사지 못한 사람 모두의 욕망을 끌어올리고 있었으니 꽤나 악랄한 상술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앞선 네 개의 작품을 모두 구매한 17번 같은 경우에는 조금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경매에 참여할 뿐이었다.
그리고.
“17번 2,1900 골드 낙찰입니다!”
결국 17번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그림까지 쓸어가고 말았다.
“제길!”
결국 마지막까지 따라붙었던 14번 손님은 울분을 토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매장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장면을 뒤에서 지켜보던 주노는 좋은 그림에는 사족을 못 쓴다는 재무 대신 크레톤 후작, 14번 손님의 실체를 확인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만족스러운 금액을 영지에 안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황제의 집무실.
“폐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
“그래. 훌륭하다. 이것들이구나. 윌의 유작이…….”
윌의 그림을 사랑하던 룩센 대제는 자신의 지시대로 그림을 구매해 온 비밀 호위 기사를 치하한 후 천천히 그림을 감상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이런 솜씨를 가진 천재가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흥, 어설픈 귀족 녀석의 손에 잘못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 귀한 그림이 그들의 창고에서 먼지만 쌓일 것이 아닌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림을 감상하던 룩센 대제는 시종장을 불러 이 그림을 황궁 대전 앞 복도에 전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그림들을 대전 앞 복도에 두 달간 걸어놓은 후, 황도 미술관에 영구 전시하도록 하라.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이 작품을 감상했으면 좋겠구나.”
“예. 폐하.”
이렇게 룩센 대제를 감동시킨 윌리엄의 그림은 황제의 손을 거쳐 황도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는데.
당연히 어떤 졸부 귀족이 구입해 자신만 감상할 거라고 계산한 로빈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심한 가격 경쟁으로 거품이 잔뜩 끼어 예상치 못한 가격에 팔릴 거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 * *
따듯한 봄이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다가왔다.
덕분에 공사 역시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로빈의 입장에서는 별로 덥지도 않은 여름이었지만 추운 기후에 익숙한 영지민들은 맥을 못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평범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데 공사장에서 일하는 장정들은 정말 그야말로 말린 생선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아니, 이게 뭐가 더워? 20도 중반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은데. 이 사람들, 정말…….”
날이 진짜 더워 30도가 넘어서는 전생의 여름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날씨에 저러고 있으니 로빈도 속이 좀 탔다.
사실 저게 다 돈이 아니던가.
이게 지역 특색인지, 아니면 제국민이 다 이런 건지. 참…….
하긴 남부 지방은 더운 지방이라고 했으니 제국민이 모두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특히 모야족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는지 자신들의 천막에서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전사들만 간간이 순찰을 돌며 마수를 처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남쪽 마을 근처에 있는 강으로 뛰어들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덕분에 대수림의 목재를 공급하는 일도 당연히 올 스톱.
공사의 진행을 더욱더 더디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이곳의 여름이 대단히 짧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이리라.
그렇게 더위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고 행정 업무들도 슬슬 미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로빈은 카인을 통해 영지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래봤자 모이는 사람만 모이는 회의였지만 말이다.
오늘 로빈이 사람들을 모은 것은 바로 리퉁 사건과 마찬가지로 영지의 식량 사정과 자금 사정을 개선할 방안을 토의해 보기 위해서였다. 리퉁 사건으로 혼자 고민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빈은 이번에는 집단 지성(?)을 제대로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최소한 자신이 무슨 의견을 냈을 때 이게 가능한지, 아닌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다른 누군가가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의견을 내면 더욱 좋았고.
그러나 솔직히 로빈은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평범한 소설 독자가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세계로 들어간 주인공의 영지가 궁핍할 때,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아무래도 소금이나 후추, 설탕 같은 향신료, 아니면 카카오나 커피 같은 비싼 기호품을 발견한 후 가공해 파는 거였다. 조금 복잡한 방법은 종이나 고무 같은 발명품을 개발해 돈을 버는 거였고.
그 밖에는 화장품이나 향수 같은 물건을 현대식으로 개량해 팔거나 심지어 치킨 같은 걸로 돈을 버는, 로빈이 보기에는 좀 황당한 소설도 있었다.
물론 뚝심 있는 소설들은 그냥 몬스터 사냥이나 영지에 있는 광산 같은 걸 개발해 돈을 벌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지식으로 조금 편하게 돈을 벌곤 한다.
그런데 이 빌어먹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선 향신료는 이미 충분히 재배되고 있었다. 후추나 설탕은 이미 남쪽 지방에서 대량으로 수확 중, 커피나 초콜릿마저 널리 퍼져있었다.
솔직히 가끔 보면 음식 문화 자체가 자신이 살던 세계보다 발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러니 당연히 천일염 따위는 발견된 지 오래. 이건 심지어 인간이 손댈 필요도 없이 마법 소금 생성기 같은 이상한 물건으로 소금을 얻는단다.
정확한 원리를 설명할 순 없지만 대충 살펴보면 바닷물을 염전처럼 모은 후 아래 수확포를 깔고 땅속으로 마법 소금 생성기를 꼽으면 아래쪽으로 지열이 올라가 알아서 바닷물이 마르고 수확포 위에 소금이 남는 형태였다.
심지어 그레이츠 영지에도 조상들이 사놓은 소금 생성기 하나가 있었다.
게다가 옷을 찍는 공장이 있는 세상이었다.
당연히 종이는 마법 공장에서 생성되고 있었고.
다만 고무는 아직 없는 모양인데, 그와 비슷한 대체재는 있는지 로빈이 타고 다니는 작은 마차도 조금 거친 길을 달리면서 큰 충격이 없었다.
물론 마법이나 정령술 같은 기술로 스스로 돈을 버는 주인공도 있다지만, 그건 애당초 로빈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세상에 정령술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빈에게 특별한 재능은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그야말로 지식이 짧은 로빈으로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그래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구황 작물에 매달린 거였는데 그것마저 실패했으니, 이제 남은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며 보채는 방법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황태자였고, 그는 적어도 자신이 읽은 부분까지는 단 한 번도 금전적인 문제로 곤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하긴 황도의 그 공장들이 다 자기 것인데 돈 문제 따위.
아무리 황제가 싸게 판다지만 그 정도 박리다매라면 정말 엄청난 돈이 벌릴 것이다.
역시 주인공만을 위한 더러운 세상인가?
자신도 물론 적당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지만 돈 문제를 걱정할 때는 이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아서 적응하고 살아야지.
그리고 이 순간,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두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주노의 호위 차 황도로 출동했던 검은 곰 기사단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인데.
“예? 5만 7천 골드요? 진짜요?”
“네. 판매가는 대략 6만 3천 골드 이상인데, 이러저러한 경비를 제외하면 그 정도라고 합니다.”
와, 미쳤네. 진짜 정신 나간 졸부가 돈지랄이라도 한 건가?
사실 처음에 로빈이 그림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못 해도 2만 골드, 기껏해야 3만 골드 정도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 정도라니. 솔직히 이 정도나 나올 줄 알았으면 용병 출신인 검은 곰 기사단이 아니라 영지에서 가장 믿음직한 루이나 폴에게 황도행을 부탁했을 것이다. 서로 나누어서 4~5천 골드인 거랑 1만 골드가 넘어가는 건 생각보다 차이가 크니 말이다.
만 골드가 넘어가면 솔직히 인생을 한 번 걸어볼 만한 금액이었다.
그나저나, 용병 출신이라고 가볍게 볼 일은 아니네.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건가? 로빈의 마음속에서 검은 곰 기사단의 가치가 한 단계 올라가고 있었다.
그림을 판매한 금액이 5만 골드가 넘어간다는 이야기에 한껏 흥분했던 로빈은 흥분이 가라앉고 이성이 돌아오자 이내 지금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정도 자금이 영지에 들어왔을 때 카인이나 지온, 그리고 폴이 어떤 생각을 할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하,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며칠만 늦게 오지.
로빈은 기쁘긴 하지만 좋지 않은 타이밍에 이 소식이 도착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회의가 약속되어 있었고 모두의 생각을 들어봐야 했으니 말이다.
갑작스럽게 계획된 회의였지만 분위기는 생각보다 밝았다. 아무래도 큰돈이 들어왔다는 소식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그림을 팔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카인 정도나 ‘어? 정말?’ 이런 반응이겠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게다가 그 소식이 안 좋은 소식도 아니고 대단히 좋은 소식이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
하지만 가신들에게도 굳이 자세한 내막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 카인에게는 미리 언질을 주기도 했고, 이 일은 그저 우연히 소장하고 있던 물건을 좋은 가격에 팔았다,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허허. 정말 운이 좋았군. 그 물건이 이 정도 가격에 팔려 나가다니.”
“일이 정말 잘 풀리려는 모양입니다.”
“원래 오늘은 자금 문제 때문에 모인 건데……. 이거 굳이 회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나?”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역시 자신의 짐작대로였다.
사실 로빈은 오늘 사람들에게 영지의 새로운 수익 사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당장 남부 지역에 요새와 마을을 건설해야 한다는 걸 근거로 삼으려고 했었다.
지금 영지의 수익 사정으론 10년이 지나도 그 요새를 짓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수긍하리라 믿은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림을 판 돈을 들고 검은 곰 기사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돌아왔고, 로빈이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가 사라져버렸다.
“새로 유입된 자금의 사용처는, 뭐 논의할 것도 없이 바로 남부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지금 가장 급한 것도 그것이고, 다른 건 대충 다 잘 돌아가고 있으니…….”
카인의 주장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
“올해 겨울이 오기 전에 에테 마을 사람들의 보금자리는 대충 마무리될 겁니다. 그러면 다음 해부터는 에테 마을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개간 작업에 들어갈 거고, 다른 마을에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은 일손이 남을 테니 그들을 투입해 요새를 짓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임금을 후하게 측정한 카인 덕분인지 에테 마을 건설 현장에는 다른 마을에서 일손을 보태러 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이 완성되면 당장 할 일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이들을 요새 건설에 투입하자는 의도는, 결국 대규모 공사로 주민들에게 돈을 풀며 영지민들의 경직된 경제 사정도 풀어주자는 이야기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솔직히 이해는 갑니다. 어차피 쓸 돈이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자는 거겠죠? 영지민들을 이용해 공사를 시작하면 시간은 더 오래 걸리겠지만 영지민들의 주머니 사정도 좋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요새는 그래선 안 됩니다.”
아무래도 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작년 겨울에는 마수 범람이 있어서 대수림의 하급 마수들이 깨끗이 처리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겨우내 무리를 이탈한 몇몇 마수들이 영지의 중앙 지역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그야말로 몇 마리라 큰 문제는 없었죠. 하지만 올해 겨울부터는 다릅니다. 이미 새로운 마수들이 빈자리를 채웠을 테고, 굶주린 마수들이 예년처럼 민가를 습격할 겁니다.”
“흠…….”
“평균적으로 겨울철에 북쪽 방벽을 타고 내려오는 마수의 수는 수백도 넘고, 만약 같은 비율로 대수림에서 영지로 마수들이 뛰쳐나온다면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