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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52화 (52/303)

52화

“그건 그렇지만 어차피 올해는 요새 건설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행운이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대처하려 하셨습니까?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니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건 아닌지요. 그러니 올해 정도는 어떻게 넘길 수 없겠습니까? 당장 요새를 짓자는 건 결국 외부에서 마법 전력을 투입해 마법 레미콘으로 빠르게 올리자는 말씀이신 거 같은데, 솔직히 너무 아깝습니다. 겨우 한 해 차이인데…….”

로빈도 지온의 말이 이해가 갔다. 로빈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경우는 폴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온은 폴을 오래 겪지 못해 그의 스타일을 모르고 있나 보다.

“지온, 물론 계획이 있었네. 북쪽 방벽을 지킬 기사들 몇을 제외한 모든 기사와 치안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니까. 어차피 현실적으로 요새를 세우기는 불가능하고, 영지민은 지켜야 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리고 그렇게 했으면 추운 겨울에 많은 기사나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었겠지.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추위와 마수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테니까. 물론 그게 기사와 병사들의 임무였으니 당연히 받아들였을 거야.”

“…….”

“무엇보다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우리가 돈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할 수는 없네. 방비를 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나? 기사와 병사들도 영지민이고, 중요한 전력이야. 돈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지.”

그래, 폴은 저런 사람이다.

대수림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는 게 급하다는 건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요새를 지을 돈이 없으니 말을 아낀 거고.

대수림 근처에 전진 기지가 없는 건 자신들이 직접 움직여서 커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위험한 일인가 보다. 목책이나 방벽도 없이 개활지를 순찰하다가 만약 중급 마수라도 만난다면 그게 치안대라면 무조건 전멸이요, 기사단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온도 기사단과 치안대가 그런 위험을 기꺼이 떠안을 생각이었다는 건 몰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그동안 특별한 불만이 없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로 생각했나 보다.

원래 저 사람이 뭔가 불만을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늘.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지온도 폴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구석에서 찍소리도 없이 가만히 있던 로빈도 사실 그 정도인 줄은 몰랐었다.

“어떤가, 백랑. 대수림 내부의 사정은?”

오늘 회의에는 백랑도 참석했다.

원래 로빈이 대수림 쪽에서 무슨 돈 될 만한 것이 있었나 궁금해 부른 것이었는데 주제가 달라지면서 백랑의 의견도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폴 경의 말씀대로 대수림 내부는 이제 슬슬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마 올겨울부터는 정상적인 마수 자생지처럼 돌아갈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굶주린 녀석들이 인간의 마을로 발걸음을 돌리겠죠.”

“그럼 방어 상태는 어떤가?”

“저도 물론 부족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걸 꺼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만약 요새를 지을 수 있으면 가능하면 빠르게 짓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새가 있으면 더 안전한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방벽의 위치에 따라 뒤로 새는 마수들도 최대한 줄일 수 있죠. 돈보다는 무조건 목숨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런 건가? 모야족조차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군.

예전에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 건 아마도 불가능한 일에 굳이 마음 쓰지 말라는 뜻이었나 보다. 백랑도 분명 겨울이 오면 전사들과 함께 몸으로 때울 생각이었겠지.

무투계 인물들의 성향이 원래 그런 건지, 그런 점에서는 폴과 닮았다. 물론 성격만 보면 뭔가 대충대충인 백랑과 꼼꼼한 폴은 완전히 극과 극인데 또 이런 점은 비슷하다니, 참 기가 막힌다고 할까?

백랑과 폴이 같은 의견이자 지온도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역시 요새와 방벽 건설은 마법 물품을 이용해 빠르게 짓는 방향으로 진행되려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올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은 되어야 완성되지 않을까?

“그래. 히센 님, 어떤가요? 저희 영지 남쪽에 마법으로 방벽과 요새를 지으려고 하는데, 예산은 얼마나 들죠?”

“음……. 우선 지형과 상황을 살펴봐야 하겠군요. 하지만 요새를 올리고 그 주변을 방벽으로 보호한다면 적어도 5만 골드는 넘게 들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요새와 방벽에 대한 예산은 히센이 대수림 근처를 방문해 견적을 내보기로 했다. 그런 후 히센과 지온이 움직여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건설하게 되겠지.

“그럼 오늘 회의는…….”

“잠깐만요.”

“뭐냐, 로빈? 무슨 다른 의견이라도 있는 거니?”

요새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자리를 파하려는 카인과 그를 제지한 로빈.

로빈은 카인을 막고 영지 자금 사정이 다시 안 좋아졌음을 강조했다.

“요새를 올리는 건 좋은데요. 결국 우리 다시 무일푼 된 건 아시죠?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뭔가 영지 내에서 돈 될 만한 것들을 찾아봐야 할 거 같은데요.”

“음……. 굳이 그래야 하겠니? 지금 상황도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요새만 완성되면 남쪽 대수림도 큰 문제가 될 게 없잖니?”

역시 이렇게 나오나.

솔직히 로빈도 카인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이제 중앙 지역에 에테 마을이 완성되면 그들이 새 농토를 개간하면서 충분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북쪽에서 마수 부산물과 약초를 캐는 에보니 마을, 서쪽에서 어로 활동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자를 분배하며 살아가는 우버 마을.

외부에서 들여온 물자를 가공하거나 병사, 기사가 되어 살아가는 영주 성.

거기에 남쪽 대수림을 지키는 모야족까지 자리를 잡으면 당장 영지가 문제없이 돌아갈 테니, 굳이 더 이상 다른 걸 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족한 식량은 외부에서 구입하면 충분했고, 필요한 생필품도 싸게 살 수 있다. 영지의 수익이 적다 한들 그만큼 지출도 적을 테니 문제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에테 마을 경작지에서 식량도 어느 정도 생산되면 수입할 식량의 양도 줄어들 테니 그만큼 영지 사정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할 테고.

애초에 이 이상 뭘 더 바라기에는 욕심이 너무 없다는 것도 그런 생각에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영지 상황은 점점 호전될 겁니다. 식량 수입 자체도 반 이하로 줄어들 테니까요.”

확실히 지온도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지온의 말대로 상황이 조금씩 호전되긴 할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6년 정도는.

하지만 그래서야 마수의 뼈로 무기를 벼르는 것도 무리일 거 같았다. 마법이 포함된 무언가를 발명하는 건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요? 지온도 그랬잖아요. 사람들이 공사 현장으로 몰려나왔다고.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뜻 아닌가요? 그래서 지온도 요새를 짓는 데 영지민을 고용하자고 하신 거잖아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돈이 적으니 돈이 잘 돌지도 않고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다못해 영지 내에 옷감 공장이라도 있으면 일자리가 더 늘어나겠죠. 옷감의 원료가 되는 작물들을 직접 재배하기도 할 테니까요. 그런 건 에테 마을의 경작지가 아니라도 충분히 키울 수 있는 거잖아요?”

흔히 말해 로빈이 의복 공장이라고 부르던 곳은 정확히 말하자면 천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곳에서 천을 생산하면서 바로 의복까지 제조하기 때문에 편의상 의복 공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의복 자체는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천을 찍어내고 그 천으로 옷을 만드는 곳 모두를 합쳐 의복 공장이라고 총칭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츠 영지 같은 경우 의복 공장에서 천을 그대로 떼어온다. 그 천을 영주 성으로 가져와 영주 성 마을 사람들이 옷을 지어 영지민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목화나 마처럼 그레이츠 영지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작물 외에도 옷감으로 뽑아낼 수 있는 다양한 작물들이 있었다.

특히 통기성이 좋은 베리네 옷감을 생산하는 르베리나나 다소 거칠지만 질긴 것이 장점인 레페소 같은 경우는 들판에서 자생하고 있는 곳도 많았다.

옷감을 사서 옷을 짓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게 되면 여러 작물을 키우는 사람, 옷감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된다.

그러니 로빈의 말대로 그런 공장을 세운다면 큰돈은 못 벌어도 영지민들의 살림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컸다.

로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만약 돈이 더 있으면 항구도 손볼 수 있는 거고요. 당장은 배가 없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항구를 점검하면서 영지민들에게 돈을 더 풀어 거래를 활성화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훗날 항구가 제 기능을 하게 되면 더 싼 가격에 황도의 물자들을 실어 나를 수도 있고요. 심지어 돈이 있으면 각 마을 간 도로도 정비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돈만 있으면 쓸 데가 아주 많다는 로빈의 말에 카인은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허허. 그래, 네 녀석의 말이 틀리진 않아. 그렇게만 된다면 영지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지겠지. 그래서 네 녀석이 며칠 전에 리퉁을 가지고 한번 먹어보겠다고 굽고 찌고 난리를 친 걸 테고?”

카인이 로빈의 흑역사(?)를 건드렸다.

아마 알고 있으면서 말리지 않은 건 어리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경험을 쌓으라고 그런 모양인데, 로빈은 차라리 말려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헛수고만 했으니 말이다.

“폴, 어떤가? 신기하지 않나? 어떻게 이런 부지런한 녀석이 우리 가문에 태어났을꼬?”

“좋은 영주님이 되실 겁니다, 도련님은.”

하, 할아버지. 저도 진짜 이러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저도 답답하거든요.

어쨌든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기고 ‘오로지 영지민을 위하여!’라는 포지션을 취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카인과 폴 모두 로빈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도련님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약초 외에는 수익을 낼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요.”

하긴 지온이 바보도 아니고 로빈이 생각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궁리해 봐도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아 접어놓은 것이겠지. 로빈이 이야기한 것 모두 상당한 자금이 필요한 일이니 말이다.

아마 지온이 이번에 들어온 돈을 최대한 아끼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돈 때문에 영지의 기사들이나 모야족의 전사들, 그 밖에 병사들을 희생할 수는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니까 같이 궁리를 해보자는 거죠, 지금부터라도.”

“그래, 고민하는 게 뭐가 어렵겠나. 한번 이야기라도 해보지.”

카인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다시 회의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다 비슷한지 특별한 의견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살림이 좀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끼니만 겨우 면하며 살아가는 영지였고 그런 만큼 할 만한 것들은 다 해봤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새로 수혈된 젊은 피 지온이나 히센, 그리고 백랑이었는데. 백랑은 아무 생각 없어 보였고, 히센과 지온은 특별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의미 있는 의견은 이곳이 다른 곳과 다른 점은 어차피 마수뿐이니 뭔가 돈이 되는 것도 마수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였다.

심지어 로빈이 낸 회심의 카드인 체스나 장기, 혹은 보드 게임 같은 걸 만들어 팔자는 의견도 시중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 많다는 지온의 지적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그런데 왜 우리 영지에는 없는 건데? 우리 너무 빡빡하게 사는 거 아니야?

로빈은 속으로 이렇게 투덜댈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람이 많다 보니 이렇게 잘못된 의견이 나오면 바로바로 피드백이 온다는 거였다. 덕분에 시간 낭비는 줄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마수의 부산물은 팔 만한 게 없나요?”

“중급 마수 같은 경우는 가죽을 팔기도 하지만 그리 좋은 가격을 받지는 못해. 사실 마수 가죽 차제가 그리 좋은 소재인 건 아니니까. 상급 마수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그놈들은 마음먹는다고 쉽게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건 그렇죠?”

중급까지의 마수 가죽은 마수가 죽으면서 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모양이 예쁘게 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사냥할 때는 병사들의 검을 튕겨내는 주제에 죽으면 일반 동물의 가죽처럼 변하는 것이다.

물론 상급 마수부터는 죽어도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하지만.

“만약 네 녀석 말대로 마수 뼈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면 조금 달라지겠군. 마수 뼈는 마수 가죽과 달리 아르마늄보다 좋은 점이 충분히 있으니까. 우선 강도 자체가 아르마늄보다 강하지. 아르마늄은 조금 무른 성질을 마법 부여로 커버하는 거고.”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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