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로빈은 처음에 마수 뼈로 무기를 만드는 것이 큰 뼈를 통째로 갈아서 무기를 만드는 거로 생각했었다. 마치 통나무를 갈아 목검을 만들거나 돌을 갈아서 돌칼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히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급 마수의 뼈는 일반 동물의 뼈와는 아예 다른 물질이란다. 거의 금속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래서 마수의 뼈로 검을 만들려면 대단한 실력의 장인이 필요했다.
고온에 뼈를 녹이고 걸쭉하게 변한 놈을 달군 쇠를 두들겨 검을 만들듯이 두들겨야 한다는데, 로빈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돈과 시간이 엄청 많이 들 거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다행인데, 상급 마수의 뼈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지금 그런 시설을 만들 돈도 없잖아요? 그리고 전에 말했지만 그런 걸 다룰 수 있는 장인이 근처에 있긴 해요?”
아니, 지금 그걸 만들려고 돈을 구하는 건데. 그게 돈이 된다고 하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야?
이거 은근히 혈압이…….
“그럼 마수 중에 약한데도 좀 유용한 놈은 없어요?”
어차피 넘치는 건 마수뿐이라 그나마 그게 답인 거 같아 히센의 의견을 구했다. 이곳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오는 마수를 때려잡는 것만 알지 마수의 이모저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마수학을 공부한 히센은 조금 달랐다.
“강약과 상관없이 유용한 놈이라……. 그나마 생각나는 건 혼 래빗인가?”
혼 래빗은 이름 그대로 뿔이 난 토끼였다.
그렇다고 뾰족한 뿔은 아니었고 머리에 새끼손톱만 한 뭉툭한 뿔이 자란 놈이었는데 마수 자생지의 먹이 사슬 가장 아래에 있는 녀석이었다. 다 자라면 작은 돼지랑 비슷한 크기가 되는 이 대형 토끼는 생각보다 유용한 녀석이란다.
머리에 자라고 있는 뿔은 지혈에 좋은 효과가 있어 약재로 제값을 받을 수 있고, 털의 감촉이 부드럽고 빛깔이 고급스러워 모피로도 좋은 가격에 거래된다니 많이 잡을 수만 있다면 제법 돈이 될 거 같았다.
“혼 래빗 가죽은 생각보다 의미가 있는 재료야. 거기에는 마법을 부여할 수 있거든. 물론 하급 마수의 가죽이라 난이도가 낮은 마법밖에 걸지 못하지만, 보온이나 냉방 마법을 걸면 그 효과가 탁월하지.”
하긴 그렇긴 하다. 다른 마수 가죽이 마법을 걸 수 있음에도 팔리지 않는 건 저 혼 래빗 가죽처럼 감촉이 부드럽고 외형도 고급스럽지 않아서였으니까.
전투 용도 외에 마법이 걸린 가죽을 사서 옷을 만들어 입을 사람은 귀족뿐일 텐데, 그들이 추레한 마수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방어용으로는 아르마늄으로 된 보호구를 착용할 테고.
“그런데 이놈을 사냥하기가 좀 힘들어. 이놈들을 찾기도 힘들고, 이놈들이 사는 곳에는 마수들이 바글바글하니까.”
“와… 그래요? 하긴 저도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요. 그런데 잡기가 힘들면 혹시 키우는 건 안 되나요?”
“내가 알기론 사육이 불가능하다더군. 암수로 잡아와도 새끼를 낳지 않는다고 하던데? 아마 자신이 살고 있는 곳 말고는 본능적으로 새끼를 낳지 않는 모양이야. 마수학이 깊이 연구된 학문은 아니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론 그래.”
하긴 돈이 되는데 만약 사육할 수 있으면 이미 누군가가 키워서 팔고 있겠지.
마수들 중 최약체이며 개체 수도 많은 편이지만 발견하기 힘들고 그것들이 사는 곳에는 마수들이 득실거린다는 이야기.
게다가 사육조차 안 된다는 이야기에 로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나마 가능성 있어 보이는 물건을 찾았는데 또 꽝이었기 때문이다.
“오, 어르신. 그 혼 래빗 가죽에는 냉방 마법을 걸 수 있는 건가요? 만약 가능하면 시간 나실 때 저희 부족으로 좀 가시죠. 아이들이 더위를 못 견뎌서요. 숲에 있을 땐 그래도 괜찮았는데 황무지로 나오니 그늘이 적어서. 하하.”
딴생각을 하고 있던 백랑은 혼 래빗 가죽에 냉방 마법을 걸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했는지 넉살 좋게 웃으며 히센에게 요청했다.
하긴 모야족의 성향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영주 저택에서 사는 모야족 아이들도 온종일 집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말 냉방 마법을 걸면 많은 도움이 되겠는데. 대량으로 시원한 옷을 만들면 모야족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호~ 혼 래빗 가죽을 구했나? 구하기 힘든 녀석들인데.”
“하하. 힘들긴요. 마을에 많은데요, 뭘. 어르신도 좀 가져가시겠어요?”
“응? 많다니? 많이 잡았나?”
“아? 에이, 아뇨. 저희도 이제 수렵 생활만 할 수는 없잖아요. 대수림의 질서가 완전히 자리 잡히는 바람에 숲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워졌으니까요. 저희는 초식 마수의 고기도 먹을 수 있으니 그놈들을 키워 보고 있거든요. 초식 마수들이 먹을 리퉁 같은 것은 영지 곳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괜찮더라고요.”
“잠깐. 자네, 그 말은… 설마 혼 래빗을 키우고 있다는 건가?”
“네? 아, 네. 그 녀석이 제일 안전하잖아요? 고기도 진짜 맛있고요. 사실 얼마 안 됐어요.”
로빈은 히센과 백랑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센은 사육이 안 된다는데 백랑은 이미 키우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그러고 보니 전에 백랑이 보내준 고기가 혼 래빗이라고 했던가? 설마 진짜 혼 래빗을 키우고 있던 거였어?
로빈은 자신이 리퉁을 보며 혹시나 가능할까, 고민하던 일을 모야족이 이미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하, 진짜 야생 부족……. 정말 자급자족의 신이구만.
가만있자, 그럼 혼 래빗을 대량으로 사육하면 돈이 되는 거 아냐?
로빈이 눈을 크게 뜨고 지온을 바라보자 지온도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 그도 자신과 히센의 대화, 그리고 백랑의 대화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리라.
그리고 히센은 그런 로빈보다 더 흥분하고 있었다.
“허, 말도 안 돼. 분명 사육이 안 된다고 했는데…….”
“저, 어르신?”
“당장 가세. 당장 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아무래도 히센은 백랑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나 보다.
그리고 그렇게 히센이 방방 뛰며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모두들 모야족 거주지로 가서 그들이 키우고 있다는 혼 래빗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 * *
모야족 마을로 향하는 마차 안.
일행 중 유일하게 승마 능력이 없는 로빈과 백랑만이 마차를 타고 있었다.
로빈이야 나이 때문에 아직 승마 경험이 없을 수밖에 없었고, 숲에서만 살던 모야족 역시 특별히 무언가를 타고 다니지는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 선조들은 거대한 늑대를 타고 다녔다는데, 그게 무슨 늑대인지 모르겠어.”
“에? 그래요? 혹시 블랙 울프는 아니겠죠?”
“아, 그거 중급 마수지? 그때 대수림에는 마수도 없었는데 설마 그러겠어?”
“그건 그렇네요. 거대한 늑대라……. 뭔지 궁금하긴 하네요.”
영지의 기사들과 달리 승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머쓱했는지 탈것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대화를 시작한 백랑. 로빈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니 분위기는 평소처럼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저한테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뭐? 아, 혼 래빗? 미안, 소영주님. 사실 나도 최근까지 몰랐어. 소영주님도 알다시피 내가 그런 거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냥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한 거지.”
“혹시 예전에 고기를 보내줄 때 이미 키우고 있었던 거예요?”
“아? 아아, 봄에? 그건 아니야. 그때 보내준 건 사냥해서 보내준 거고. 나도 잘은 모르니까 설명은 마을로 들어가서 듣는 게 나을걸?”
“흠…….”
딱 봐도 일부러 숨기거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이 사람이 그런 모략에 익숙할 리 없지.
로빈이 슬쩍 떠본 건 혹시 모야족 내부에서 다른 이야기들이 오갈까 걱정돼서였다.
아직 부족과 영지의 융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고 모야족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식량 문제와 거주지 문제인데, 식량 문제가 이렇게 해결돼 버리면 이주 같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황무지에서도 그럭저럭 잘 사는 걸 보면 주거지도 크게 가리는 건 아닌 거 같으니 더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까 폴과 백랑의 이야기는 로빈에게도 약간은 충격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에 진짜 신경 끄고 있었는데 겨울이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라니.
솔직히 모야족을 책임지는 로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미안해요, 백랑 님.”
“응? 뭐가?”
“솔직히 겨울이 그렇게 위험한 줄은 몰랐어요. 그저 괜찮다길래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죠. 제가 너무 무심했던 거 같아요.”
“아, 그거? 그게 왜? 소영주님이 일부러 마을을 지어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 우리를 차별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야? 게다가 모두 함께 살 수 있게 해줬는데. 하긴, 어쩌면 어차피 해결책이 없는 문제라고 소영주님한테 자세히 알리지 않은 내가 문제일 수도 있겠네. 월아는 상황을 정확히 알리라고 했지만 내가 거부한 거니까.”
역시 월아의 생각과는 다르게 백랑이 그렇게 결정한 건가?
항상 입버릇처럼 자신들도 영지민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직은 예전에 부족 단위로 행동하는 습관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나 보다. 그러니 굳이 영주 성에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수림을 방어하려고 했겠지.
“그랬나요? 답이 없는 문제긴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라도 저희와 상의해 줬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모야족도 저희 영지의 일원이니까요.”
솔직히 아직도 모야족에게 어떤 요구를 전달하는 건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완벽하게 서로가 한 가족임을 인정하게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고.
그래서 로빈은 이럴 때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려고 했고, 백랑은 그런 로빈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확실히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들도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알았어, 소영주님. 앞으로는 꼭 그럴게.”
“뭐, 그럼 됐어요. 어쨌든 이제 올해 안에 성채가 완성될 테니 잘된 거죠.”
로빈이 사과를 건네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동안에도 분위기는 별로 나쁘지 않았다. 로빈과 백랑, 그레이츠 영지와 모야족 모두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렇게 마주 앉아있으니 로빈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 한 가지를 백랑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대수림 내에 무언가가 있었고, 모야족의 주술이 그것과 연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사실 원래 대수림의 결계도 그 무엇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고요.”
“아, 그거?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아, 설마 쌍둥이냐? 하. 그것들, 진짜. 부족의 비밀을 아주 그냥 사방팔방에 다 떠들고 다니는구나. 하여간 폐급은 어디를 가도 폐급이란 건가?”
…백랑 님? 설마 저희한테 짬 처리한 건 아니겠죠? 양심은 어디에?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느낌이 묘했던 그 쌍둥이가 모야족 쪽에서도 은근히 사고뭉치였나 보다. 그러니 백랑이 바로 저런 반응부터 보이는 거고.
어쩐지 부족의 주요 전력일 수 있는 주술사를 보내달라는 말에도 두말없이 OK를 하더라니. 여기에 또 이런 함정 카드가?
하지만 덕분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주워듣긴 했다만 그게 부족의 비밀이었다니. 이거, 괜한 걸 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끙, 하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작게 중얼거린 백랑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아. 좀 복잡한 일이 있었지.”
모야족의 전설에 의하면 자신들은 대수림에 봉인된 무엇을 지키기 위한 지킴이였단다. 그리고 결계 내에서 안전하게 행동하기 위해 배우게 된 게 바로 주술 문양이었고.
실제로 주술 문양에는 대수림 결계에 현혹되지 않게 해주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수림 내에서 모야족만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결계가 사라진 지금에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던 주술 문양이 그나마 이번 사태로 다시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긴 하지만, 그때도 주술 문양은 결계에서 헤매지 않게 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 능력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숲은 언제나 조용했고, 자신들은 어느새 그런 사실들을 잊은 지 오래.
결국 세상 밖으로까지 나가게 되었단다.
“나중에 다시 대수림으로 돌아온 부족민들은 자신들이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대.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지 않아서 신이 노한 거라고.”
모야족의 재앙은 그야말로 미친 황제 때문에 시작된 것인데 일이 그렇게 되니 확실히 그런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긴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