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상한 소설 속 로빈-54화 (54/303)

54화

그리고 대체 왜 다시 대수림으로 도망갔나 했더니 모두가 대수림을 나설 때도 주술사들은 대수림에 남아서 그것을 지켰다고 한다. 그러니 바로 대수림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겠지.

“그래서 대체 그게 뭔데요? 9년 전까지는 대수림에 있었을 테니 백랑 님도 아실 거 아니에요.”

“몰라. 사실 누구도 모르지. 그것이 보관된 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었으니까.”

와, 여기서 김이 확 샌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대단한 봉인이 되어있었나 본데 저러니 모야족이 그걸 지키는 데 무심했지.

세상 누가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대대손손 이어가며 착실히 지키겠어. 누군지 모르겠지만 봉인한 사람이 잘못했네.

“9년 전, 갑자기 대수림에 이상 징후가 발생하고 우리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그래서 그곳으로 모두 달려갔는데, 누구도 들어갈 수 없던 그곳이… 열려있었어.”

“그래서 들어가셨나요?”

“응. 그런데 남은 건 책 쪼가리 몇 개뿐이었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책들. 그나마 거기서 몇 가지 주술을 더 배울 순 있었지만.”

처음 모야족이 얻은 주술은 주술 문양뿐이었단다. 그리고 9년 전에 겨우 몇 가지 추가적인 주술을 더 얻을 수 있었고. 애초에 자력으로 숙성 창고 같은 주술도 익힐 수 있는 모야족인데 그 존재는 대체 뭘 해준 건지.

문양 하나 던져주고 대대로 대수림을 지키라고 한 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뭔가 참…….

“혹시 그곳에 저도 한번 가볼 수 없을까요?”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그 책이 대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던 로빈은 백랑에게 슬쩍 물어봤지만 백랑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힘들어. 어차피 그것도 없어서 말릴 이유는 없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지금 거기가 케렌튜드? 그 대가리 두 개 달리고 겁나 큰 사자가 사는 곳이거든. 대수림이 열리자마자 그놈이 거기에 자리를 잡았어.”

“끙, 그놈은 재앙급 마수 아닌가요? 포기해야겠네요.”

마수의 등급을 보면 상급 마수 다음으로 최상급 마수가 있고, 그 위로 재앙급, 파멸급이 있는데 사실 재앙급이면 영지에서 감당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괜히 등급이 ‘재앙’급이 아닌 것이다. 그놈들은 그야말로 재앙이니까.

그러니 로빈도 입맛을 다시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에휴, 뭔가 중요한 물건이긴 한 거 같은데 어차피 돌고 돌아 주인공 손에 들어가겠지. 어쩌면 후반 주인공의 파워 업 떡밥일 수도 있고.

어차피 소설인데 뭐, 그렇지 않겠어?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게 뭔지 확인하는 것도, 그곳에 들어가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니 그냥 쿨하게 포기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게다가 딱 봐도 뭔가 거창한 배경이 있은 것 같으니 역시 자신 같은 조무래기가 관여할 일도 아니었다.

“모야족은 진짜 뭐가 많네요. 까도까도 계속 튀어나오니, 원…….”

로빈이 투덜거리자 백랑이 피식 웃었다.

“글쎄. 오히려 소영주님이야말로 이상한 거 아냐? 그런 침착함과 영리함이라. 그 나이에 그럴 수 있다는 게 난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와,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기 있나?

이거 반칙 아냐? 부족의 비밀까지 털어놓고 바로 이런 걸 물어보면…….

로빈은 갑작스러운 백랑의 돌직구에 순간 움찔했지만, 특유의 뻔뻔함으로 자연스럽게 대꾸할 수 있었다.

“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저 세상이 저를 이렇게 만든 거죠.”

로빈은 자신의 둘러대기가 나름 자연스러웠다고 자찬했다. 솔직히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런 드립을 날려보고 싶었고.

게다가 정확한 의미를 몰라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백랑의 모습을 보니 왠지 둘러대기가 은근히 먹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자신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세상이 거지같이 변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설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하는 백랑의 모습이 조금 놀랍긴 했다. 대충 그러려니 하는 줄 알았더니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궁금증이 남아있었군.

“뭐, 그건 그렇고. 그래서 혼 래빗은 월아 님이 담당하는 건가요?”

“아? 아아. 아니, 그건 아니고. 월아는 다른 일로도 바쁘니까.”

게다가 로빈이 빠르게 주제를 바꿔 혼 래빗 쪽으로 기수를 돌리자 백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군요.”

“응. 그쪽 일은 월령이라고, 월아의 큰 언니가 담당하고 있어. 거기가 세 자매인데 월아가 막내고, 월령은 맏이. 둘째는 월연인데, 예비 여전사야. 아마 그 아이가 우리 여우에 이어 네 번째로 여성 전사가 되겠지.”

“아, 그래요?”

역시 월아는 믿고 데려간다는 딸 부잣집 셋째 딸이었나 보다.

그런데 큰 언니의 이름이 월령이라니, 뭔가 참 익숙한 이름이긴 하다. 물론 월아의 큰 언니라니 왠지 기대가 되긴 하지만.

“뭐, 월아랑은 조금 다른 성격이지만 확실히 일은 잘하는 아이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차는 모야족이 머무는 남쪽 황무지에 도착해 있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영주와 그 부하들, 그리고 마차의 모습에 모야족 부족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영주부터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모조리 마을로 모여들어서 그런 거 같았다. 그나마 마차에서 백랑이 내리자 분위기가 조금씩 정돈되고 있었지만.

하지만 뒤이어 로빈까지 뒤따르자 다른 의미로 웅성대고 있었는데.

“저분인가?”

“맞는 거 같은데?”

“저분 맞아. 전에 대수림에서 예비 전사들이랑 같이 마수들을 막으셨어. 그때 나도 있었다고.”

“호, 귀여우신 분인데 그 망나니 린을 휘어잡을 수 있을까? 괜히 문제 생기는 거 아니겠지?”

“고 녀석이 월아의 딸이라 귀엽게 자라긴 할 텐데 성격은 완전 적호 님이라서…….”

“그래서 어려서부터 길들이겠다고 데려가셨다잖아.”

“보기와는 다르게 거친 분이시구만.”

“그렇지? 하긴 다섯 살 때 스스로 전장에 따라나선 분이야. 아마 린 정도는…….”

“그래도 저분이 차기 영주님이라니 적어도 저분 때까지는 부족이 괄시받진 않겠어.”

“당연하지. 피로 맺은 혈연 아닌가!”

로빈은 수군거리는 소리에 그만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린을 군말 없이 영주 성으로 보낸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민심을 달래고 있었다니.

모야족의 정서를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 분위기를 보니 자신이 린을 데려간 일이 그들의 불안감을 다스리는 데 나름 일조한 모양이었다.

“와, 백랑 님. 이러기 있습니까? 이거 누구 생각이에요? 월아 님은 아닌 거 같은데.”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 모두 만족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모두 좋으면 좋은 게 아니냐는 백랑의 말을 들으니 왠지 이 남자가 다시 보이긴 했다.

이런 영악한 짓을 벌이다니.

솔직히 처음에는 좀 어이없었는데 잠시 생각해 보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다른 일에는 철저하지만, 왠지 린에게는 약한 월아의 생각은 아닐 테니 결국 백랑의 생각인 건데, 이런 식으로 민심을 달래 불안감을 지울 수 있다면 로빈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이제 겨우 여섯 살인데 10년쯤 지나면 이미 모야족은 영지에 완전히 적응했을 테고, 린이 적당히 잘 자라는 것만 확인하고 부족으로 돌려보내면 충분했으니 말이다. 아마 백랑의 머릿속에도 이런 계산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이 사람들, 나중에 린을 돌려보냈다고 다 들고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설마 그럴 리가.

그리고 히센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급한지 바로 혼 래빗 사육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분이 은근히 급했나 보다.

* * *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큰 울타리에는 말로만 듣던 혼 래빗이 한가롭게 리퉁을 뜯어먹고 있었다.

마수나 처먹는 리퉁이지만 혼 래빗은 정말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었는데 생긴 건 저래도 저 녀석들이 마수가 맞긴 한가 본데.

제법 덩치가 큰 토끼들. 크기는 제법 크지만, 생각보다 더 귀엽게 생겼는데 저런 놈들이 마수라니. 이 세상은 참…….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모야족의 월령이라고 합니다.”

사육장에서 우리를 반겨준 건 월아와 닮았지만, 분위기가 사뭇 다른 모야족 미녀 월령이었다. 월아보다 더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래도 그쪽 핏줄은 확실한지 눈에 띄는 미인이었으니 역시 우월한 혈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저 외눈 안경은 또 뭐지? 모야족 콘셉트랑 너무 다른 거 아냐? 게다가 더위 때문인지 옷 입은 모습이 이건 뭐.

그런데 저렇게 입고 저런 걸 끼고 있으니 뭔가 언밸런스 하긴 한데, 그게 또 묘하게 섹시했다. 역시 진리는 무조건 패완얼인가?

“흠흠, 히센이네. 그래서 그대가 저 혼 래빗들을 키우는 책임자라고?”

히센도 로빈과 같은 생각인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월령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한눈도 팔지 않고 자신의 목적부터 따지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참된 마수학자 히센 간다프,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로빈도 지금 만큼은 예전에 히센이 두 자매 사이에서 시시덕거리던 모습은 잠시 잊어주기로 했다

“네, 어르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 혼 래빗의 사육에 성공했다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월령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저 아이들이 제대로 새끼를 낳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말씀드리겠지만, 완벽하게 사육에 성공했냐고 물으신 거라면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서 얘들을 키울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하지만 로빈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닌지 히센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명이 좀 필요한 것 같군. 말을 들어보니 저 녀석들이 이곳에서도 새끼를 낳는다는 말인 듯한데. 그러면 사육에 성공한 거 아닌가?”

“그게 조금 다릅니다, 어르신. 저 아이들이 새끼를 낳고는 있는데 개체 수가 일정 이상은 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량으로 사육하려는 저희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죠.”

“허, 그건 또 신기한 일이군.”

잠시 사육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혼 래빗을 살펴보던 히센은 자신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사실 이 점이 궁금해 이곳까지 온 것이니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 녀석들을 번식시킨 거지? 자신들이 살던 곳이 아니면 절대 새끼를 낳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이야.”

월령은 지체 없이 바로 히센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겨우 몇 마리의 혼 래빗을 생포할 수 있었는데 이 녀석들이 전혀 새끼를 가지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그런데 그때 백랑 님이 힌트를 주셨습니다.”

“엥? 내가?”

시선이 백랑에게 모이자 백랑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때 백랑 님이 예전과 같은 환경으로 만들어보라고 하셨죠.”

“음? 아, 그때 그게 그거였어? 하지만 그건 그런 대화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백랑이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음이 급한 히센은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월령을 보챘다.

사실 로빈이 생각하기에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 혼 래빗이 새끼를 배게 만든 건지가 중요하지.

“뭐,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나.”

“환경을 비슷하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사들과 예비 전사들을 대동해 혼 래빗을 잡은 곳으로 가서…….”

“…그래서?”

“녀석들이 살던 굴을 통째로 파왔습니다.”

혼 래빗.

마수들 중 최약체인 이 녀석들도 자신 나름의 생존 수단은 분명히 있었다.

그야말로 토끼 굴을 파고 그곳에 숨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굴의 규모가 작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무슨 그런 무식한.

토끼 굴을 다 파왔다면 진짜 얼마나 많은 삽질이 필요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혼 래빗 자생지라 주변에 마수들도 많았을 텐데 그놈들을 막기 위해 전사들도 모두 투입됐을 테고.

그야말로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는데 모야족은 또 그걸 해냈다.

“그렇게 녀석들이 살던 곳의 흙을 사육장에 모두 뿌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들이 이곳에 자신들의 굴을 다시 파기 시작한 거죠.”

“이곳을 자신들의 거주지로 인정한 거구만.”

“네, 그 후 새로 태어난 혼 래빗까지 발견되자 당연히 사육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개체 수가 더 이상 늘지 않는다?”

“네. 그렇습니다, 어르신.”

요 녀석들이 토끼랑 습성이 비슷하다면 개체 수가 엄청 늘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좀 이상하기는 했다. 애초에 저놈들이 마수 산맥에서 멸종하지 않은 건 그 엄청난 번식 능력 때문이 아닌가.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