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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57화 (57/303)

57화

너무 일방적인 판단 기준에 처음에는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생각했었는데 가만 따져보니 전생에서도 별로 다를 바는 없었다. 오히려 이곳처럼 대놓고 일방적인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속 터지게 하는 판결이 판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법은 아니라고 하는데 법관이 자기들 기준대로 그렇다고 판결하는 통에 로빈도 가끔은 열불이 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런 세상이라서 그런지 강간 사건이 거의 없었다.

우선 이곳에서는 여자들 자체가 좋은데 싫은 척하는 게 없어서 ‘노!’라고 하면 진짜로 아닌 거라 남자들이 적당히 알아들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딱 표현하는 편이라 밀당하며 연애하는 재미는 없을 거 같긴 한데 대신 남녀 사이가 참 명백하긴 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이곳에서는 무고죄를 처벌할 때 그 수위를 자신이 무고한 죄와 같게 본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강간죄로 무고한 사람은 강간죄와 같은 처벌인 사형에 처한다는 거였다. 조금 무식하긴 하지만 덕분에 무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단다.

어쨌든 제국은 이런 상황인데 모야족은 은근히 더 과격하니 처벌 수위가 어떤지 궁금한 거였다.

아무리 모야족이라도 강간범에게 사형 이상을 집행할 수는 없을 테니 그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제국과 달리 강간 미수조차 강하게 처벌하면 조금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이제 그들도 영지민이고, 엄연한 제국민이니 제국법을 준수해야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어디 그렇게 간단하던가. 영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국법을 무시할 수 없는데 모야족의 관습도 신경을 써주지 않을 수 없으니 곤란한 것이다.

문제가 없는 게 가장 좋긴 했지만, 사람 일이란 게 늘 그렇듯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미리 조심해야지.

로빈과 백랑의 대화를 통해 상황을 이해한 지온도 백랑에게 제국법에서 그런 범죄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부디 백랑이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할 텐데.

“그리고 단순히 모야족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치안이 안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흠……. 아무래도 그렇겠지? 웬만하면 신경만 거슬리게 할 하루살이 떼 말고 정예 용병단 하나 정도만 와줬으면 좋겠구먼. 그래야 제어하기도 쉽고 지휘 체계도 잡혀있을 게 아닌가?”

확실히 별 도움도 안 되고 소란만 피울 하급 용병들이 산발적으로 들어오는 것보다는 지휘 체계가 명확한 용병단 하나가 들어오는 게 낫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일이 잘 풀려줄까?

백랑도 자신의 마을이 그들의 숙영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와 제국법의 처벌 등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알아들은 걸 보니 아마 부족 차원에서도 조심하긴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비책들이 나왔는데 감시나 미행처럼 딱 봐도 제법 인력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가뜩이나 겨울만 되면 긴장하는 영지인데 쓸데없는 일이 더 생겨버려서 조금 답답하긴 했다.

“아 참, 그래서 저희 영지는 할당량이 몇 마리예요?”

“하급 1,000에 중급 20이군요.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이만큼 잡으란 건데. 이 정도면…….”

“그건 그냥 원정을 나가지 않고 북쪽 방벽에 죽치고만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양 아닌가?”

확실히 황도에선 이곳 사정이 좀 어둡긴 한가 보다. 저 정도 할당량이라니. 저걸 잡으라고 용병을 보냈다는 사실에 솔직히 어이없기까지 하다.

다른 영지는 상황이 좀 다른가? 아는 곳이라고는 이 영지와 소설의 배경이 된 황실 정도니 도대체 알 수가 있어야지.

최소한 다른 영지에 기사 전력이 몇이나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거 같았다.

잘하려고 하다가 돈만 쓰고 욕먹는다는 게 이런 걸까? 우리 영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명령이 딱 그랬다.

그래도 위에서 시키니까 하긴 해야지. 꼬우면 황제보다 더 높아지든지.

아마 다른 사람들도 로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 *

용병들보다 겨우내 먹을 식량을 실은 주노가 먼저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노에게서 더 정확한 황도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음……. 이게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니라고요?”

주노의 말에 의하면 이번 명령은 황제보다는 귀족들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명령이란다. 그래도 백성들을 위한 정책이라 황제도 수긍하게 된 것이고.

그리고 이런 명령이 나오게 된 배경이…….

“저번에 보내준 그 가메라 머리가 문제였다는 거네요.”

“네, 명예에 집착하는 일부 귀족들이 상급 마수의 전리품을 노리게 된 거죠.”

황제 폐하께서 자신의 업적을 과시한답시고 가메라 머리 가지고 귀족들한테 어지간히 으스대셨는지 귀족들도 꿀리기 싫어 자신들의 사재로 용병단을 고용해 보내는 거라는데.

일이 참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러면, 그 용병들이 황제 폐하의 할당량과는 상관없이 상급 마수를 건드리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용병 주제에 상급 마수라.

용병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좀 안 좋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우리 기사단을 다 모아놓고 쌩쌩한 가메라랑 붙으라고 하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거 같은데, 과연 용병으로 그게 가능할까? 백랑과 전사들을 봐도 단순히 무력만 높다고 잡을 수 있는 놈들이 아닌 거 같았는데.

물론 폴이나 백랑급의 기사들이 수십이라면 어떻게든 잡을 수야 있겠지만 황실의 마지막 보루인 로열 나이트가 아닌 다음에야 그럴 리는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계획 같았다.

그렇다고 귀족 녀석들이 자신의 기사단을 출동시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중앙의 기세 싸움에 괜히 끼어든 거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특히 그 계기가 된 것이 우리가 바친 가메라 머리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더 그랬고.

물론 그 가메라 머리 덕분에 많은 지원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주노가 그런 찝찝한 정보만 물어온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래서 상급 마수의 전리품은 수도에서도 유행을 탈 거 같더군요. 올해 초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지금은 황제와 고위 귀족들이 서로 기 싸움을 벌이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고위 마수의 전리품이 무용의 상징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 어느 용병대가 상급 마수를 잡기라도 한다면 돈방석에 앉게 되겠죠.”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니까요.”

“하하, 그렇죠. 그게 문제죠.”

“그런데 지금 시중에 상급 마수의 전리품이 있기는 한가요? 있지도 않은 물건이 유행을 타봤자…….”

“그래서 더 귀족들이 몸이 다는가 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전에 잡은 가메라 가죽 쪼가리라도 남은 게 있습니까?”

상급 마수의 전리품이 갑자기 비싸진다니 만들어놓은 갑옷이라도 하나 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한 마법 갑옷을 팔 순 없었다. 나중에 언제 다시 그런 놈을 잡을 지 알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돈이 아예 없으면 몰라도 이제 혼 래빗으로 돈이 나올 구석도 생기지 않았는가.

“그 가죽들은 다 갑옷으로 만들었거든요. 기사단의 수가 늘어날 거까지 계산하면 솔직히 처분하기는 힘들죠. 그 외에는 다 자투리로 조금씩 남은 거라 쓸 데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갑옷 같은 걸 만들고 남은 거로 벨트나 손목 보호대, 혹은 머리띠나 머리끈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만 돼도 팔 수 있을 거 같은데.”

“오, 그건 그렇네요. 유행을 타고 있고 상급 마수라는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니…….”

하지만 이것보다 진짜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도련님, 혹시 항구를 정비할 수 있을까요?”

바로 주노가 우버 마을의 항구를 정비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로 지온과 카인에게까지 연결돼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번에 황도에서 해상 거래 허가증을 발급받았습니다.”

배로 물건을 실어다 팔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해상 거래 허가증은 일반 상거래 허가증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으로 심사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도 제법 복잡한 편이고.

특히 배도 한 척 없는 주노가 해상 거래 허가증을 발급받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로빈이 선물한 윌의 그림 한 점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하, 그 그림을 황실 재무 대신한테 선물하고 그 대가로 작은 부탁을 했다고요?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신 거 같은데요.”

이곳에서는 뇌물도 가차 없이 사형이었다. 물론 구멍이 없는 건 아니라서 알아서들 적당히 대가성 없는 선물과 작은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주고받고는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그렇다는 거였다.

그러니 주노 입장에서는 큰 무리를 한 셈인데.

아니, 그냥 고위 귀족이랑 안면이나 트라고 준 그림으로 해상 거래 허가증이라니. 배도 없는데 그런 걸 굳이 뭐 하러…….

아니, 잠깐. 설마.

“혹시 황도와 영지 간의 거래에 전념하시려는 거예요?”

“하하. 예, 맞습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거의 그래왔으니까요. 게다가 요즘 분위기가 조금 그래서 영지의 전속 상단이 아니면 거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몇 군데 있던 주노 상단의 지부가 대부분 적자로 들어섰다고 한다.

물론 지부라고 해봤자 작은 상점 정도지만 어쨌든 손해는 손해였고, 지금 분위기로는 쉽게 나아질 거 같지 않다는데, 그 이유가 바로 영주가 직접 운영하는, 혹은 영지와 손잡은 상단 때문이었다.

큰 상단의 경우 영주에게 조금이라도 압박을 가할 수 있겠지만 주노 상단은 그저 어중간한 상단에 불과했고, 결국 몇 군데 영지에서 쫓겨나듯이 지부를 정리해야 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득은 적어도 확실하고 안전한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게 바로 그레이츠령과 황도를 연결한 상행이며, 조금이라도 운송비를 줄이기 위해 바닷길을 생각하게 되었단다.

주노의 설명에 로빈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주노의 말을 듣다 보니 얼핏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큰 자본이 없고, 영주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거래하기 힘든 세상이라면 너희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하나의 상회를 만들면 될 것이 아니더냐? 그럼 그들과 대적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힘을 모은다면 내가 너희의 영주가 되어주마.

소설의 초반 부분이던가? 자금 확보를 위해 3황자파 귀족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상인들을 찾다가 결국 영세한 중소 상인들을 포섭하기로 한 황태자가 그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었다.

결국 그들은 황태자를 중심으로 상인 연맹을 만들었고, 고위 귀족의 입김이 닿은 거대 상단과 상계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 결국에는 제국의 물류를 완전히 틀어쥐게 된다.

덕분에 황태자 형님은 끝까지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았지. 황도에서 생산되는 거대한 물량과 제국 물류의 물줄기까지 모두 틀어쥐었는데 돈이 궁했다면 그게 더 개그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때 이미 그런 분위기였는데 이제 슬슬 중소 상단들이 어려운 시기에 접어들고 있나 보다. 그리고 눈앞의 주노는 전형적인 중소 상단의 주인이고.

이런 시류를 느낀 주노가 아예 이쪽으로 방향을 튼 모양인데, 아예 영지에 종속될 생각인가?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아예 영지에서 저에게 투자를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상단의 지분 일부를 영지에 맡기고 싶습니다만.”

지분까지 거래하자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와,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영지에 제대로 팔 물건이 나타나자마자 전속 상인을 자처하다니, 그야말로 귀신 같은 타이밍이었다.

물론 우리가 직접 상단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우리 물건을 맡길 사람은 주노뿐이긴 했다. 지금까지 거래하며 쌓아놓은 신뢰가 있지 않은가? 솔직히 영지를 위해 호구 짓도 많이 했고.

아니, 호구 짓을 많이 했다기보다는 호구 그 자체였나?

사실 지분 거래만 없었지 그야말로 영지 전속 상인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지금까지는 영지에서 얻은 이익이 거의 없어 다른 곳에서도 기를 쓰며 거래를 터야 했나 본데, 이제 그 거래에서 돈을 벌 수 없다니 앞으로는 우리가 먹여 살려줘야겠다.

다만 우리야 우리의 사정을 잘 알지만, 외부에서 떠돌던 주노가 무슨 생각으로 다른 영지의 점포를 다 회수하면서까지 영지에 집중하겠다고 한 건지 궁금하긴 했다. 이게 돈이 될 거로 생각한 건가?

“그렇군요. 나쁘지 않은 이야깁니다. 그런데 그래서야 상단을 제대로 운영할 수나 있겠습니까?”

지온도 같은 생각인지 비슷한 것을 물어본다. 아마 머릿속에서는 지분 교환과 투자, 항구의 정비 비용 같은 것들이 빠르게 계산되고 있을 것이다.

“하하. 뭐, 입에 풀칠은 하겠죠. 대수림 쪽이 안정화되었다니 약초의 물량도 안정적으로 공급될 테고, 만약 항구를 열어 배로 운송하면 운송 비용도 지금보다 많이 절약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주노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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