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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58화 (58/303)

58화

“그리고 솔직히 좀 지쳤습니다. 1년 중 가족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며칠이나 되는 건지 잘 기억도 안 날 정도거든요. 아이들이 제 얼굴을 정확히 기억이나 할는지…….”

“그건… 유감이네요.”

“하하, 그렇죠. 예전에는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영지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더 그런 면이 있었고요. 그런데 근래에 영지가 많이 변했더군요.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추게 된 거죠. 그러니 왜 굳이 멀리 있는 점포들로 아등바등하겠습니까? 도련님 덕분에 해상 거래 허가증까지 땄으니, 영지에 앉아서 영지의 약초를 황도로 보내고 황도의 물건이나 떼어오렵니다.”

지금까지 주노가 뒤에서 이익 없이 물건을 날라주지 않았으면 영지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안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로빈이 항상 그를 호구라고 부르는 거였고.

하지만 로빈도 주노가 애초에 상단을 만든 이유가 영지 때문인지는 몰랐다.

아니, 영주나 관리가 해야 할 일을 왜 당신이 하고 있냐? 무슨 보살이여? 아니면 영지의 수호신? 조상신의 환생? 대체 뭐야?

로빈은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림 값을 걱정해 기사를 붙인 자신이 왠지 너무 쓰레기 같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로빈이 자기반성에 빠져있는 동안 지온은 주노와의 거래를 확정 지었다. 항구의 수리와 5천 골드를 약속하고 상단 지분의 반을 영지에서 맡기로 한 것이다.

주노 상단의 가치보다는 못 미치는 가격이지만 애당초 배를 인수할 자금 일부와 항구가 목표였는지 주노는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였다.

아마 지온이 그렇게 판단한 건 앞으로 영지에서 생산할 혼 래빗 가죽에 대한 계산까지 마쳐서일 것이다. 가죽의 물량과 그에 따른 이익의 증가까지 고려해 주노의 몫을 계산했을 테니 말이다.

거래를 마친 후, 지온은 주노에게 영지의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혼 래빗의 존재를 공개했다. 주노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허, 그런 게 있었습니까? 세상에, 그럼 이제 영지를 걱정할 일이 없겠군요.”

“네, 그리고 상단을 걱정할 일도 없을 겁니다. 그 물건을 황도에 넘기기만 해도 제법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을 테니까요.”

“세상에…….”

주노는 솔직히 답이 없다는 생각에 직접 상단까지 만들어 도와줬던 영지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이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거라는 사실에 묘한 감흥을 느끼는 듯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고 성공이 확실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흥분되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재미있네요. 이런 물건이라니. 이제 좀 한가하게 지낼 수 있나 했더니…….”

한가한 삶은 시작도 전에 안녕이라고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지만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상인 본연의 열정과 의지가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구도 손봐야 하고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 겨울은 집에서 쉬시고 봄에 황도로 가시죠. 그때까지 아까 말씀하신 제품 몇 가지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하, 그래야겠군요. 이미 선박도 주문해 놓았으니 봄이 되면 돌아가서 잔금만 치르면 됩니다. 올 때는 배로 올 테니 빠르게 돌아올 수 있겠군요. 물건은 가메라 가죽으로 만든 장식품이랑 혼 래빗 모피겠군요?”

“네, 그렇겠죠.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 완전히 한 가족이니까요.”

“하하. 그렇죠. 알겠습니다. 지온 님, 그럼 봄에 찾아뵙겠습니다.”

말로는 쉬고 싶다고 하지만 천생 상인이긴 하구만, 저 양반도.

로빈은 조금 기운 빠진 듯 차분하게 들어왔다가 활기차게 돌아가는 주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지온에게 물었다.

“지온 님은 알고 계셨나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주노 님이 상단을 운영하는 이유가 영지 때문이라는 걸요.”

“아뇨, 저도 정확히는 몰랐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행동과 주노 님의 본가가 우버 마을에 있다는 사실로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죠. 그리고 만약 주노 님이 미리 부탁하지 않았어도 혼 래빗 때문에 슬슬 전속 상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었는데 잘된 거죠.”

“그렇군요.”

“네, 지금까지야 마땅히 팔 물건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주노 님이면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이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앞으로 주노에게 물량을 모두 맡기면 지금까지 영지가 신세 진 것에 대한 보답은 어느 정도 한 셈이겠지? 영지에 머물면서 가끔씩 황도에 가서 일을 처리하면 출장 기간도 전처럼 그렇게 길지 않을 테고.

어쨌든, 모두에게 이익 되는 방향으로 일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 * *

다시 본제로 돌아와서 주노에게서 이번 용병 지원 건의 내막을 들었음에도 영지의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황제 폐하의 명령하에 출동한 용병임은 부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상급 마수라면, 생각은 좀 바꿔야겠군요.”

“괜히 들쑤시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말이야.”

“어쩌면 적당히 소란을 피우게 한 후 추방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목표가 상급 마수라는 건 확실히 위험한 면이 있었다. 그놈들이야 도망가면 끝이지만 영지의 입장에서는 놈들이 날뛰면 그것들을 다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온의 말대로 그냥 다 쫓아내버리죠. 어차피 우리야 그놈들의 지원 따위 필요 없는 거잖아요? 황제 폐하는 우리가 할당량만 채우면 그놈들을 쫓아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실 거 같은데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야. 실질적으로는 고위 귀족의 지원을 받아 온 거라는데 그래서 더 피곤할 수도 있단다. 그놈들은 은근히 쪼잔해서 이런 일로도 원한을 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음…….”

로빈도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닌데 크게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 지금 황제와 대립하고 있는 고위 귀족이라면 귀족파, 3황자를 지지하는 고위 귀족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창 기세가 올라있는 황제를 견제하느라 바쁘고.

만약 우리의 행동이 불쾌하다 해도 당장 제국 변방을 지키는 중립 영지를 혼내줄 방법이 없었다. 우리를 견제하려고 해도 황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들이 작은 원한을 잊지 않고 훗날 복수하려고 해도 딱히 상관없었다. 황제의 세가 좀 누그러지면 다시 진격의 황태자 형님과 세력 다툼을 해야 하는데,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 더 정신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있나.

문제는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이들에게 뭘, 어떻게 이해시키겠는가? 아무리 내가 똑똑하다고 해도 이건 무려 미래 예지의 영역이니, 원.

영지가 진짜 위험할 지경이면 몰라도 당분간은 입을 닫고 있어야겠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레이츠 영지로는 언리페어 용병단이라는 거대 용병단이 투입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언리페어 용병단이라. 이름도 참…….”

이쪽 방면을 대충 꿰고 있던 흑웅의 말을 들어보니 언리페어 용병단은 현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용병들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용병단이란다.

몇몇 대상들과 장기 호위 계약을 맺으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데, 이런 큰 용병단 하나를 통째로 보낸 걸 보니 귀족들도 제법 신경 쓴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들이 호위하고 있는 대상 중 하나를 후원하는 귀족 녀석이 이놈들을 여기로 보낸 장본인일 것이다.

다만 그들의 행동을 보니 아무래도 지역이 지역이다 보니 이곳을 주공으로 생각하고 큰 기대를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는데.

자잘한 놈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 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상대가 더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였다.

“흑웅이 별로 좋은 놈들은 아니라는데요. 요즘 좋은 용병은 은퇴하거나 죽은 용병뿐이라더군요. 예전처럼 제국의 군사적 공백을 메우면서 주민들을 위해 움직이는 용병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용병들은 저렇게 큰 세를 유지할 수 없는 시절이 되었답니다.”

“생각보다 더 피곤하겠군.”

한숨짓는 카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린 로빈.

로빈은 용병들이 들어오는 시기까지 한 달이나 남았는데 출발하기도 전에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조사관이 올 때도 이렇지 않았나?

“그런데 이 소식은 어디서 얻은 소식이에요?”

“응? 당연히 황실에서 정식 명령으로 내려온 거지. 이제 용병단을 선정했고, 출발했으니 준비하라고.”

“아니, 황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벌써 그 소식이…….”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통신 수정구지. 아니면 어떻게 알아?”

황실 명령용 통신 수정구.

영지에 통신 수정구가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건 또 있었다.

하긴 무슨 파발을 띄우거나 전서구를 보내는 시절도 아닌데 황실에서 명령을 전달할 수정구 정도는 줬겠지. 이건 영지 물건이 아니라 황실의 물건이니 영지에 수정구가 없다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걸 모르는 바람에 저만 괜히 바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나이 어린 손자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면박을 주다니 좀 너무한 거 아냐?

딱 보니 지금 할아버지가 대단히 예민한 상황이었다. 마치 여성들의 그날과 같다고 해야 하나? 상급 마수를 잡기 위해 영지로 용병단이 내려온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더 짜증스러운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논의를 진행해 봤자 무슨 결론도 없고 짜증만 솟구칠 테니 이쯤에서 자리를 피해야겠다. 솔직히 카인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언리페어 용병단 총원 200명.

기사급 15명, 상급 병사급 대략 50명, 나머지 쩌리 대략 135명.

상급 마수를 잡으러 보무당당하게 출발한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대략 한 달이 남았다. 카인이 스트레스를 받을 날들도 그 정도는 남았고.

* * *

타들어가는 카인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어쨌든 영지는 갑작스러운 방문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작은 영주 성에 200명이나 한꺼번에 묵고 갈 만한 여관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 주택 지구 일부를 영주의 이름으로 대여했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베이스캠프가 될 모야족 마을에도 거대한 천막들이 세워졌다.

시일이 촉박해서 모야족 마을에 따로 그들이 기거할 집을 지을 여유는 없어 모야족이 살아가는 천막으로 대체했는데 그들이 자신을 괄시한다고 오해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오해하지 말라고, 친구들. 원래 그 마을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 그래. 억울하면 대수림 말고 야수 산맥으로 가든지. 거기라면 그래도 멀쩡한 집을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영지는 준비에 한창이었지만 로빈은 이 일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솔직히 로빈이 할 수 있는 일이 마땅히 없어서였는데 그 탓에 로빈은 추위를 벗 삼아 꼬맹이들과 심신을 단련(을 빙자한 학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 하. 대체 마나는 언제 느끼는 거야?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냐고?”

로빈은 지금이라도 당장 이런 영양가 없는 짓을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무조건 자신에게 마나를 느끼게 하려는지 단호한 의지로 포기하지 않는 마리아나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운동을 빼먹는 날은 무조건 최악의 밥상이 로빈을 기다렸으니 어찌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먹는 걸로 괴롭히는 게 가장 나쁜 거라는데, 솔직히 마리아나가 너무하긴 했다. 물론 그 행동의 바탕이 로빈을 위하는 마음뿐이라도 말이다.

그래도 영지가 바쁘고 회의가 많을 때는 그걸 핑계로 좀 빼먹기도 했는데 영지 일에서 한발 벗어난 요 몇 주 동안은 일체의 자비가 없었으니 그야말로 좋은 날은 다 갔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오늘도 한참을 아이들과 달렸을까?

악착같이 이를 악물고 로빈의 옆자리에서 달리던 실비아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린다. 아마 없는 체력을 쥐어짜 로빈의 뒤를 따라오더니 완전히 방전된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체력이 가장 약한 실비아를 위해 보조를 맞춰 주기도 했는데 오늘은 짜증이 올라와 속도를 냈더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쓰러져 괴로워하는 실비아의 모습에 왠지 양심이 찔린 로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니, 실비? 체력에 맞춰서 요령껏 달려야지. 무작정 따라오면 어떡해?”

“핵…핵……. 괘…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또 괜찮단다.

은근히 이렇게 운동을 할 때면 실비아가 린에게 경쟁심을 느끼는지 몸을 아끼지 않는다. 자신은 나가떨어졌는데 린이 끝까지 로빈의 옆에서 달리는(사실 린이 로빈보다 체력이 좋아 그녀가 로빈에게 맞춰 주는 거였지만) 모습을 볼 때면 입을 앙다물고 눈물을 글썽대기도 했었고.

도대체 경쟁할 걸 해야지.

지금 당장 실비아가 공부하는 책 중 아무거나 린에게 가져다줘도 베개 이외에 다른 용도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을 텐데 하필 체력으로 싸우려 하다니 참 어이가 없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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