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하지만 그래도 안쓰러운 건 사실이라 그녀가 완전히 지칠 때까지는 보조를 맞춰 주던 거였는데.
로빈이 작게 한숨을 내뱉으려던 찰나.
숨을 급하게 몰아쉬던 실비아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러 번의 깊은 심호흡으로 숨을 고르는데 그녀의 몸 위로 은은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운동으로 체온이 올라가 열기가 퍼져 나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지랑이.
로빈은 저것이 바로 마나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미친, 마나를 느꼈다고? 그것도 1년 만에?
아니, 아무리 세상은 불합리하고 재능이 갑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저 녀석도 분명 힘들게 운동하긴 했지만, 아침때만 잠깐 나와서 하는 거고, 나랑 듀발은 시간 날 때마다 끌려 나오는데.
순간 질투라는 저열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데 실비아가 눈을 떴다.
그리고.
“도… 도련님. 느꼈어요. 느낀 거 같아요. 마나를 느꼈어요!”
나 잘했지? 나 좀 칭찬해 주세요.
얼굴 한가득 이렇게 써 붙이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만 끓어오르던 질투심이 픽, 하고 식어 사그라들었다.
만약 저 녀석에게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겠지?
“끙. 그래, 장하다. 잘했어.”
로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자 더욱 함박웃음을 짓는데 솔직히 저런 모습을 보면 짜증을 내기도 힘들었다.
그래, 무럭무럭 자라서 완벽한 발모제나 한 방에 완치되는 무좀약, 혹은 부작용 없는 정력제처럼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거야. 아니면 하급 마수 시체를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약품을 개발하든지.
믿는다, 실비.
찌질하게 이런 거로 질투할 수는 없지. 후…….
그리고 며칠 후, 기다렸다는 듯 린까지 마나를 느꼈다.
악역 꿈나무도 어쨌든 재능충이라는 건지 로빈과 듀발만 씁쓸하게 되었다.
상대적 우위를 며칠밖에 유지하지 못한 실비아.
방심하다가 마나를 더 늦게 깨우치며 치욕감을 느꼈던 린.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는 로빈.
좌 실비아, 우 린이라.
로빈은 문득 실비아와 린을 좌우에 둔 자신이 왠지 기둥서방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직은 한참 멀었으니 기둥서방 꿈나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내가 한량 지향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여자 치마폭에 둘러싸여 등이나 처먹으면서 살 순… 없나? 생각해 보니 은근히 괜찮을지도?
아니, 그래. 어쨌든 나도 이제 느낀다. 한번 두고 보자고.
없는 자존심까지 끝없이 불태우며 로빈은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듀발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두 남자와 나머지 아이들의 질주는 그렇게 겨우내 이어졌다.
물론 아직 그들이 마나를 느끼는 건 요원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재능 있는 두 아이가 마나를 느낄 때쯤.
그레이츠 영지에 언리페어 용병단이 도착했다.
“하, 그야말로 변방 중의 변방이구만. 아무리 의뢰 때문이라지만 이런 곳까지 와야 한다니.”
용병단의 선두에 선 남자는 영지의 모습을 둘러보며 딱 한마디로 이곳을 정의했다.
그야말로 시골 깡촌이라고.
“단장, 이번 일이 잘만 풀리면 그야말로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거 아니요?”
짧은 머리를 한 덩치 큰 남자의 물음에 낙후된 영지 상태에 인상을 쓰던 언리페어 용병단의 단장 제닉도 기분이 풀리는지 즐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크게 한탕 하자고. 그게 아니면 이런 곳까지 기어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의뢰주님이 아주 큰손이란 말이지. 큭큭.”
“그래도 상급 마수를 잡아오라니, 애들이 많이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이요.”
“칼밥 먹는 놈들이 그런 걸 걱정하면 안 되지. 그리고 상급 마수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덩치 큰 짐승에 불과해. 너무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단장, 예전에 남겨놓은 기록들만 봐도 쉽지는 않을 거 같습디다.”
제닉은 부단장 릭스터의 말에 그저 실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풋, 기록? 그딴 걸 믿고 있었나? 도대체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무지막지한 놈을 이런 작은 영지에서 잡았다는 게 말이나 돼? 그건 다 옛사람들의 허황한 과장에 불과한 거야.”
“흠…….”
제닉이 강하게 부정하자 릭스터도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의 지도자는 제닉이 아니던가. 자신은 그가 시키는 일에만 충실하면 충분했다.
“자, 어서 가서 영주부터 만나보자고.”
영주 성, 관저의 회의실.
용병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인은 용병대의 단장인 제닉을 만나기 위해 폴과 로빈을 불렀다.
그야말로 어서 경험을 쌓고 빨리 영주 직을 강탈해 가길 원하는 카인의 욕망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선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회의에 로빈을 대동한 것도 아마 그런 욕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카인의 생각이고 제닉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러니 회의랍시고 자신을 만나는 장소에 버젓이 앉아있는 꼬맹이의 모습에 기가 막힐 수밖에.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하자고 부르셨는데 저 아이는 대체 뭡니까?”
제닉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우리 영지의 소영주네. 영지 일을 배우고 있지. 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카인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제닉도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솔직히 자신은 그저 객일 뿐이었고 남의 영지 일에 참견할 이유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이번 사냥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길잡이가 되어줄 영지의 도움이 절실했으니 사소한 일은 그냥 넘어가도 괜찮았다. 하지만 굳이 굽힐 생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은 이곳을 도와주러 온 지원군이 아닌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 소문을 듣자 하니, 상급 마수를 잡으러 왔다고?”
“하하. 네, 그렇습니다. 자잘한 하급 마수나 중급 마수를 잡는 것보다 큰 녀석을 처치하는 게 영지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들어가는 길에 겸사겸사 하급 마수들도 정리해 드릴 거고요.”
제닉의 말투에서 마수들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왠지 말투가 좀 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 녀석, 중급 마수라도 제대로 상대해 본 건가?
카인도 로빈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래서 마수 사냥 경험은 좀 있는가? 중급 마수 정도는 많이 잡아봤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힘 좀 센 짐승들 아닙니까? 용병단에 기사급 능력자가 무려 열다섯입니다. 그깟 짐승 정도에 당할 전력이 아니죠.”
이 녀석들, 경험이 없구만.
겨우 여섯 살인 나보다도 마수를 몰라. 알면 감히 열다섯 명으로 상급 마수를 잡겠다고 대수림에 기어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하……. 기사급 전력 열다섯으로는 상급 마수를 잡을 수 없네. 웬만하면 그냥 얌전히 황실에서 내려온 할당량만 채우고 돌아가는 게 어떤가?”
근거 없는 자신감에 기가 막힌 카인이 정중하게 충고했지만, 상대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하하, 기사라도 다 같은 기사급 전력은 아니죠. 이런 변방에서 자리만 지킨 기사들이랑 온갖 경험으로 무장한 용병들이 어찌 같겠습니까? 저희가 원하는 건 대수림을 잘 아는 길잡이입니다. 그 정도는 지원해 주실 수 있겠죠?”
“음…….”
아무래도 카인은 이 멍청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 보였다. 아무 표정도 없지만 굳게 쥔 주먹 위로 핏줄이 올라오는 걸 보니 폴도 은근히 열 받은 거 같고.
그래도 저 녀석이 한 말 중에 그나마 수긍할 만한 소리가 있긴 했는데 그건 바로 기사급이라도 같은 기사급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따듯한 남쪽 나라에서 상단들 뒤나 봐주던 용병이랑 이런 극한 환경에서 마수를 때려잡는 기사들의 수준이 같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생각 좀 해보지.”
결국 카인의 판단은 유보였다. 아무래도 저놈들을 그냥 사지로 처넣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죠.”
카인이 단번에 허락하지 않자 상대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제닉이 완전히 회의장을 나가자 말을 아끼고 있던 폴과 로빈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뒈지겠네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겠군요.”
“하……. 송장이나 치우겠군.”
거기다 카인까지 한마디 보태니 역시 셋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아예 마수에 대해 무지한 거 같습니다.”
“그냥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같은데요.”
“그렇구만. 이 일을 어찌할꼬.”
“그냥 가라고 하세요. 적당히 고생 좀 하다 보면 정신을 차리겠죠.”
“도련님, 그건 좀 힘듭니다. 상대의 전력이 참 애매하기 때문이죠. 저 정도면 대충 하급 마수들을 적당히 돌파하고 진짜로 상급 마수 앞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전력이 낮으면 중급 마수한테 얻어터지고 도망 나오겠지만 그래도 기사급 전력이 몇 있어서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게 들어가서 진짜 상급 마수를 자극할 수도 있고요.”
나름 정확한 로빈의 분석을 대견하게 생각한 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포기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걱정이군요.”
로빈과 카인 모두 폴의 생각과 같았다. 저 바보 같은 녀석들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 * *
한편, 회의장을 나선 제닉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들을 위해 준비된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부단장 릭스터를 불렀다.
“확답은 얻으셨소?”
“아니, 아무래도 틀린 모양인데. 그럼 이를 어쩌나. 그래, 내가 말한 건 알아봤어?”
“네, 단장. 아무래도 기사 전력은 북쪽에 있는 마수 산맥 앞 관문으로 다 나간 모양인데요. 대수림 쪽은 무슨 이주민? 같은 녀석들이 산다는데, 대수림에서 살았던 이주민이랍니다.”
제닉은 남쪽은 이주민들이 막고 있다는 소리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그래? 이곳 영주도 제법이군. 남쪽을 이주민으로 채워 놓다니. 그건 남쪽에서 마수가 올라오면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뜻이 아닌가? 큭큭. 생긴 건 천생 호인 같더니 그런 독심이 숨어있었군.”
“어쩌시겠소?”
릭스터의 질문에 제닉도 고민되는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우선, 영지 쪽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아.”
잠시 고민 끝에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기 시작한 제닉.
릭스터는 제닉의 말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도와주겠는데 반응이 좋지 않을 리가…….”
“상급 마수 때문이야. 아무래도 이곳 영지 사람들은 마수에 대한 공포가 상당한가 봐. 하긴 매년 마수 때문에 몸살을 앓는 곳이니 뭐, 이해는 가. 우리 전력으로는 절대 상급 마수를 처리할 수 없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섣불리 손대지 말고 그냥 포기하라는 거야.”
“음……. 그러면 우리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오?”
전해 들은 영지 측의 반응에 당황한 릭스터는 심각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래도 마수에 익숙한 게 이곳 사람들일 텐데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했으면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제닉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하, 그럴 거 없어. 혹시 기억하나? 남쪽 리보레 영지 말이야. 거기가 남작령이던가?”
“아, 기억나오. 도적들한테 창고가 털리는 바람에 저희한테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곳…….”
황제의 치세 아래 분명 대부분의 도적 떼는 소탕돼 설 자리를 잃었다. 특히 황도와 이어지는 가도 쪽은 지금도 수시로 순찰과 토벌이 이루어지며 도적들이 접근할 생각도 못 하는 상황이었고.
하지만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바퀴벌레 같은 녀석들이라 변방 구석으로 들어가면 종종 도적 떼가 나타나곤 했다. 용병들이 그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도적 떼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레이츠 영지 역시 도적들이 들끓기 좋은 환경이긴 했다. 그만큼 황도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도적들이 뜯어먹을 것조차 별로 없었다. 주민들은 더럽게 가난하고 상단마저 거의 들르지 않는 곳이었으니 이곳에서 활동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근처에 도적들이 나타나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쪽 영지가 딱 이런 식이었지. 변방 구석의 영지. 기사들의 수준도 가관이었고. 아마 여기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짐승들 따위를 두려워하는 거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