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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64화 (64/303)

64화

그리고 백랑은 한숨을 쉬며 그런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하……. 오늘은 이걸로 끝내야 할 거 같은데.”

“무슨 일인가요, 주인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아서 말이야. 뭔가 불안하네. 이게 뭔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백랑은 자신의 옆쪽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적호를 불렀다.

“후, 여우야?”

월아의 야릇한 교성 소리를 반찬 삼아 몸을 달래고 있던 적호는 예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백랑이 자신을 찾자 의아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붉게 달아올라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백랑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 있어, 주인님?”

“오늘은 쫑인 거 같다.”

“에? 주인님, 설마……. 벌써? 주인님, 조루야? 말도 안 돼!?”

세상에는 참을 수 있는 말과 참을 수 없는 말이 있는 법.

백랑은 그녀의 입에서 자신이 절대 참을 수 없는 단어인 조루가 튀어나오자 화부터 버럭 냈다.

“야! 그게 아니야! 아후…….”

“씽.”

하지만 이내 아차 할 수밖에 없었다.

월아는 기분이라도 좀 냈지 옆에서 간만 보다 완전히 쫑나버린 적호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지도 못하고 나무라기만 하다니.

게다가 세상이 끝난 듯한 억울한 표정의 적호를 보니 백랑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야말로 남편 실격이었으니 말이다.

“야, 미안해. 내가 좀 울컥했어. 대신 내일은 무조건 너부터 시작할게. 그러니 화 좀 풀어라.”

“알았어요, 주인님. 약속한 거야?”

“그래그래. 야, 우선 빨리 가서 흑웅 좀 불러올래? 아무래도 느낌이 좀 그래.”

“무슨 감이 온 거야?”

“어, 뭔가 불쾌한 게 엄청 찜찜하네. 그거 때문에 오늘 종 친 거고.”

“알았어. 잠깐만요, 주인님.”

백랑의 말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적호는 알몸 위에 외투 한 장만 걸치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또 한 번 작게 한숨을 쉰 백랑은 자신의 자존심을 부드럽게 감싸며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월아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지그시 올려다보는데.

요염 덩어리 아내가 자신의 자존심을 입에 물고 올려다보는 자극적인 장면을 보고 있음에도 그의 자존심은 미동도 없었다. 이미 용두질을 치고 있어야 할 요놈이 이렇게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아무래도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모양이었다.

“하……. 진짜 문제가 있긴 한가 보네.”

백랑의 사정이야 어떻든 끝까지 깔끔하게 봉사를 마친 월아는 평소의 침착하고 차분한 그녀로 돌아와 백랑에게 물었다.

“어쩌시게요?”

“아무래도 좀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때맞추어 적호와 함께 들어온 흑웅.

흑웅은 이미 적호에게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뭡니까, 족장? 설마 촉이 왔습니까?”

흑웅이 대수림을 떠나기 전에도 어린 백랑의 직감은 대단했다. 모든 위기를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백랑이 불길함을 느끼면 무조건 무슨 일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특히 저번 난리 때는 그 덕을 정말 톡톡히 봤었고.

그러니 평화로운 이때 촉이 왔다니 긴장될 수밖에.

“어, 찜찜하고 불쾌한 느낌이야. 아무래도 순찰을 좀 해야겠어.”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전사들도 다 깨우고, 예비 전사들은 대기, 예비 여전사들은 활을 쏠 수 있게 관문 위로 올려 보내겠습니다.”

“응, 부탁해.”

두말없이 명령을 받고 떠나가는 흑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월아는 걱정스러운 염려를 보탰다.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뭐, 별일이야 있겠어? 정말 죽을 거 같은 두려움은 아니니 아마 적당히 중급 마수 정도가 뛰어오나 보지. 지금 대수림 다른 쪽에서는 용병들이 다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며? 그놈들의 분탕질에 자극받은 몇 마리가 나오는 정도일 거야.”

“상급 마수는 아니겠죠?”

백랑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월아에게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단언하며 안심시켰다.

“그건 아니지. 우리 쪽에서 들어가 상급 마수를 자극한 것도 아닌데 상급 마수가 이쪽으로 올 리가 있나. 아마 용병들이 상급 마수를 자극해 그들이 움직이면서 근처에 중급 마수를 덩달아 자극한 게 아닐까 싶은데. 좀 지켜봐야겠지만.”

그리고 백랑은 웃으며 월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별일 아닐 테니까. 여우야, 준비됐지. 가자.”

“응. 주인님.”

백랑이 흑웅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적호도 자신의 무장을 갖춰 입었다.

저번 난리 때 얻은 트리플헤드의 가죽으로 만든 여성 전사용 마법 갑옷.

몸에 착 달라붙어 착용감도 좋고 걸리는 부분이 없어 활동하기도 편하며, 솜씨 좋은 가죽 세공 장인이 제작해 맵시까지 좋은 최고의 물건이었다.

그리고 백랑은 그런 적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짜증이 솟구쳤다. 원래대로라면 저 방금 잡은 바다 생선처럼 탱탱한 적호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있을 시간인데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짜 뭔지 모르겠지만 다 조져버린다.”

“응. 조져버려야지.”

두 부부는 나란히 이를 갈며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뒤에 남은 월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고 있었고.

* * *

몇 시간 후.

어둠을 틈타 조심스레 마을로 접근하던 언리페어 용병단은 드디어 남쪽 요새 마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근처까지 도달해 마을의 전경이 직접 눈에 들어오자 제닉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난민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 규모는 뭐지?

순간 말문이 막힌 제닉은 아까 자신에게 난민촌이라고 설명했던 부하 놈을 잡아다가 화를 버럭 내며 정강이를 후려쳤다.

“이 미친놈아. 난민촌이라며? 네 눈에는 저게 난민촌이야?”

“윽! 단장, 그럼 저렇게 천막만 잔뜩 있는 마을을 난민촌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천막이 수십 개 정도여야 난민촌인 거지. 저건 수백 개는 넘잖아. 하, 미치겠네. 이걸 어쩌나.”

얼핏 봐도 천막의 수는 수백 개 이상. 사는 사람들도 적어도 수천 이상이란 뜻이었다. 당연히 장정들의 수도 천은 넘을 것이고.

기사들과 평민들의 싸움에서 숫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기사급 전력을 갖춘 자신이 저들과 정면으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사람이 많아 전멸시킬 수 없다면 이기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 어쩐다.”

“그냥 일이나 하러 갑시다. 뭐 하러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려고 하는 거요?”

호기를 만났다는 생각에 릭스터가 재빨리 의견을 냈지만, 제닉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지. 그럴 수야 있나. 뭐, 좋아. 그럼 저놈들을 잡아 죽이는 건 어차피 안 되니까 포기하고 그냥 불이라도 지르고 빠진다. 다들, 불 준비해.”

“하…….”

만약 이곳의 규모가 작았으면 몰래 다가가 불을 놓고 도망치는 놈들을 모두 잡아 죽이는 것이 최초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 몰래 불이라도 지르고 빠지겠다는 뜻이었는데.

그렇게 용병들이 슬쩍 불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다가오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바로 마을 근처를 꾸준히 순찰하며 대수림 쪽을 방비하던 백랑과 적호였다.

“너네, 뭐 하냐?”

백랑은 어둠 속에서 수백의 남자가 옹기종기 모여 쑥덕대는 모습을 멀리서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쫓겨난 놈들 같은데 머물 곳을 찾아 이곳까지 왔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멀리 쫓아버리려고 다가가는데 이 녀석들이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네놈은 뭐냐?”

“뭐, 이 마을 주민이라고 해두지. 너희 지금 불 붙이냐? 다 큰 남자들이 불장난하면 쓰나. 그냥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꺼지는 게 어때? 오늘 형이 좀 안 좋은데.”

이 많은 머릿수를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백랑의 모습에 제닉은 이건 또 뭔가 싶었다. 뭔가 좀 이상하지만, 저놈이 나중에 영주에게 보고하기라도 하면 자신의 정체가 들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뭐? 이 미친……. 한 놈, 아니 두 놈이다. 조져버려!”

“헤, 한 놈이랑 한 년인데요? 게다가 졸라 예쁜 년이요.”

“저년은 내 거!”

제닉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놈이 백랑에게 달려들었다. 갑옷 중에 가장 하품이라는 가죽 갑옷에 둔탁하기 그지없는 도끼를 든 그가 너무 우스워 보여서였다.

“하, 진짜 일진 한번…….”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병에게 도끼를 치켜든 백랑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내가!”

백랑의 첫 수에 가장 먼저 달려들던 놈의 어깨가 두 쪽으로 갈리고.

“오늘!”

두 번째 공격에 뒤따라오던 놈의 허리가 그대로 쪼개졌다.

“졸라!”

그리고 세 번째 놈이 휘두르는 검을 옆으로 슬쩍 흘린 후 그대로 그놈의 머리에 도끼를 박아 넣는데.

“기분이 더럽거든! 그러니까……. 한번 다 죽어보자, 이 새끼들아.”

몇 초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힘 좀 쓴다는 세 녀석이 요단강을 건너자 남은 놈들은 멈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얼굴부터 팔 아래까지 은은하게 빛나는 늑대 문신은 묘한 기괴함과 함께 이유 모를 두려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고… 공격해!”

상대의 수준을 대강이라도 짐작하게 된 제닉은 떨리는 목소리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뒤이어 모든 용병이 백랑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불쾌한 희생자는 백랑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대충이라도 쌀 수 있었던 백랑보다 몸만 달아올라 감질만 난 적호가 더 울분에 싸여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딱 보니 그 원인이 저 녀석들인 거 같았으니.

적호는 상대가 달려들자 눈에 불을 켜고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XXXX 새끼들아! 다 죽여버리겠어!”

“XX 같고 XXXX 같은 새끼들. 다 죽어! 죽어!”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설을 계속 터트리며 미친 듯이 놈들을 도륙하는 적호의 모습에 백랑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 여우 진짜 미치겠네. 내일은 진짜 잘해줘야겠어.”

그리고 바로 전장에 합류해 달려드는 놈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상대가 기사급은 된다는 생각에 한꺼번에 달려든 정예들이 모두 처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수 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닉은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뭐… 뭐야? 대체 왜 이런 시골에 저런 괴물들이 있는 거야?”

제닉은 예전에 진짜 기사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남부 지역까지 도적을 토벌하러 내려왔던 황실 기사.

그들에게는 용병인 자신이 도저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포스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촌구석에서 그런 느낌을 다시 받다니.

몸을 떨던 제닉은 도저히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도… 도망가야 해.”

제닉이 도망을 결심한 순간에도 백랑과 적호는 용병들을 차근차근 분쇄하고 있었는데.

이제 정예 용병들이 다 죽어버리고 기사랑 싸울 때는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밖에 안 되는 일반 용병들만 남아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들 위에서 군림하던 정예 용병들을 쉽게 도륙한 살인마가 그들에게 다가오자 서서히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고 있었는데.

“괴… 괴물이야!”

“도망가!”

“사… 살려줘!!”

백랑이 달려들자 공포에 질린 그들은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부의 소란에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야족 전사들, 외부로 순찰 나갔던 전사들까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용병들은 사방에서 전사들이 나타나자 바짝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는데, 덤비는 놈들이면 몰라도 저렇게 살려달라는 놈들을 마구잡이로 죽일 만큼 모야족은 잔인하지 못했다.

“족장, 이놈들은 어쩔까요?”

“응? 힘쓰는 놈들은 아까 나, 아니 적호한테 다 죽었거든. 저놈들은 쩌리니까 그냥 잘 묶어둬. 나중에 영주 성으로 데려가자고.”

“예. 알겠습니다, 족장. 그런데 오늘은 적호 누님이 시원하게 한 건 하셨네요.”

“아, 뭐. 좀 쌓여서 그런가 봐.”

“족장, 용병단의 단장 놈이 남쪽으로 도망갔답니다.”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며 모두 잡는 건 무리였는데 그 와중에 약삭빠르게도 가장 먼저 도망가던 제닉과 그를 따르는 몇 명의 부하가 무사히 도망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하, 그런데 왜 또 하필 거기야?”

도망갈 거면 잘 좀 가지 하필이면 또 대수림 쪽이라는 소리에 백랑은 한숨만 나왔다.

재수 없으면 그놈들을 쫓아 거기까지 따라가야 할 기세가 아닌가.

그 순간, 백랑과 적호에게서 겨우 탈출한 제닉은 자신의 부하 몇과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영주 성이 있는 북쪽이나 도끼를 든 놈들이 달려오던 동쪽보다는 남쪽이 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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