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룩센 대제가 그레이츠 자작령 쪽으로 언리페어 용병단을 파견한 리아넨 공작을 꼬집어 가리키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황명을 우습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리아넨 공작은 이를 갈면서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그저 잘못을 비는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분명 짐은 용병대를 파견해 기존의 목적을 달성하고도 여력이 남는다면 상급 마수를 사냥해도 좋다고 한 거 같은데, 그대들은 다르게 들었나 보오? 보고서에는 하나같이 상급 마수를 잡겠다고 바로 대수림에 진입했다고 적혀있구려.”
“폐하, 신들은…….”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그렇게 들어가서 잡지도 못할 상급 마수만 잔뜩 자극하고 도망치는 바람에 그 마수가 영지를 습격, 결국 이런 피해가 발생했다는데. 짐이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
“짐의 명령을 아예 무시했다?”
“…….”
“아니면 고의로 변방을 흔들어 제국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아무런 말도 못 하던 귀족들도 이번에는 대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이 그렇게 흘러가면 그건 바로 반역죄와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폐하, 절대 아니옵니다. 소신들은 그저…….”
“아아. 됐네, 됐어. 더 들어 뭐 하겠나. 내가 이런 일을 그대들에게 믿고 맡긴 게 실수였던 게지. 두말하지 않겠네. 이번에 용병들을 북방으로 파견한 힐데 후작, 마이러스 후작, 도나루 후작 그리고 리아넨 공작. 그대들은 북방의 영주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든지, 아니면 그들이 만족할 만큼 배상해 줘야겠어. 선택은 각자에게 맡길 테니 알아서 하게.”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폐하.”
“그리고 1년간 입궁을 불허한다. 사가에서 각자 반성하도록.”
룩센 대제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처음 북부에 마수를 줄이라고 명령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이 작년에 얻은 전리품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민심을 달랜 것이 그들의 욕심에 불을 지폈는지 고위 귀족들이 이 행사에 동참하고 싶다고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에 귀족들이 합류했을 때 발생할 일들, 그리고 상황이 자신의 목적과 전혀 다르게 돌아갈 거란 사실까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도 가메라의 머리를 진상받고 호기심에 옛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으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이 일이 또 다른 기회가 될 거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황도 내에서 황태자와 3황자의 자질을 비교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족들 역시 한쪽 편에 서서 상대를 비방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중립을 지켜야 하는 일부 관리들까지 거기에 휩쓸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몇몇 고위 귀족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서였는데, 그렇게 의견 대립이 격해져 정세가 어지러워지고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한 번쯤은 그들의 기세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일이 이 정도까지 암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룩센 대제는 적어도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사단을 어느 정도 함께 파견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급 마수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지만 이 정도로 무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도 크게 나쁜 건 아니었다.
지금껏 계속 잠잠해 모두가 잊고 있었던 북부의 위험성이 다시 널리 알려지며 따로 북부 영지들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고, 작년 처음으로 마수가 등장했지만, 그전까지는 마수와 상관없는 곳이라 방비가 허술했던 대수림 근처의 영지들은 고위 귀족들의 사비로 방어 체계를 보완할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혼란의 중심이었던 고위 귀족 넷이 1년 동안 황궁에 출입하지 못해 혼란도 당분간은 수그러들 것이니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에 따라 일부 백성들이 고초를 겪은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자리가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비정한 선택을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선택으로 높아질 일부 백성들의 원성과 원망, 그리고 죄책감 역시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룩센 대제의 단호한 명령에 귀족들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말이 공개적인 사과지 어떤 귀족도 이런 일로 공개적인 사과를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이 가난한 자들도 아닌데다가 돈은 다시 모으면 그만이지만 땅에 떨어진 가문의 위신과 명망은 절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귀족의 생태가 그랬지만 체면과 명망을 중요시하는 황도의 고위 귀족은 귀족 중에서도 가장 귀족스러운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1년 동안 입궁을 금한다는 것도 대단한 수치였다. 그야말로 1년 동안 강제로 제국의 모든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 수치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한창 3황자의 지지 세력을 모으던 리아넨 공작이었으니 그 타격은 적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렇게 이번 황제와 고위 귀족 간의 기 싸움은 황제의 승리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 * *
이제 마수들의 공격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사태를 대충 수습하던 그레이츠 자작령에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보상이요? 리아넨 공작이라고요?”
“이곳에 용병단을 파견한 귀족이 리아넨 공작이랍니다. 그래서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며 보상안을 논의해 보자고 하는군요.”
로빈은 지온에게 황도의 사정과 다른 영지의 사정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대수림 아래쪽의 영지들은 용병들이 들어가 상급 마수를 자극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보았다는 이야기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와, 저희도 그렇게 될 뻔한 거잖아요? 물론 그 정도까지 피해를 보진 않았겠지만요.”
“네, 그리고 용병들이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서 북쪽의 영지들은 별문제 없었다는군요. 그쪽은 애초에 대수림과는 연관이 없는 곳이라…….”
“그렇겠죠. 마수 산맥에서 그런 짓을 하자고 해도 그쪽 영지에서 따랐을 리가 없으니까요.”
북서쪽에 치우친 그레이츠 자작령처럼 5대 방벽에 속한 북쪽의 세 영지로 병력을 파견한 귀족들은 모두 백작들이라는데, 그들은 어차피 텄다고 생각했는지 얌전히 황명대로 행동했다고 한다. 덕분에 피해도 거의 없었고.
“크게 피해를 받은 건 없지만 어쨌든 지원을 해준다니, 뭐 나쁘진 않네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돈도 돈이지만 통신 수정구를 받아야 할 거 같습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리아넨 공작령이면 마법 물품을 많이 취급하는 곳이죠?”
“네, 황도에 가문의 이름으로 큰 마법 물품 상점도 운영하고 있고요.”
아무래도 카인 역시 지금까지는 크게 못 느꼈던 통신 수정구의 필요성을 이번에 절감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병사를 보내 용병들을 미행하지 않았으면 날이 밝고도 연락이 올 때까지 남부 요새에 마수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전혀 몰랐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전과 달리 큰 마을이 두 개나 추가된 상황이니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긴 했다.
사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적어도 6~7쌍의 통신 수정구가 필요했는데 제작 기간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대가로 미리 제작된 물건을 받을 수만 있으면 그 시간도 훨씬 절약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분명한 거래였기에 거래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가능하면 빠르게 결과를 내고 황제에게 보고해 뒷말을 줄이고 싶었던 리아넨 공작 측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해 더욱 그랬다.
하긴 그쪽 입장에서는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합의안은 이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통신 수정구 여섯 쌍, 그리고 5천 골드를 지급받는 거였다.
로빈의 생각으로는 ‘와, 대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확이었지만 카인은 못내 못마땅해 했다.
“그런 놈들은 귀족 사회에서 개망신을 당해야 하는 건데, 내가 이렇게 돈이나 받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니 속상하구나.”
아무래도 아직까지 용병들에게 무시당했던 울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것이 용병 주제에 영지 마을을 대놓고 공격한 것이 어이없어 잡힌 용병들을 심문했는데 그들 뒤에 리아넨 공작이 있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리아넨 공작이 무슨 생각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놈들이 그를 믿고 더 극성을 부린 셈이니 카인이 저리 화를 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잠깐이고 돈은 영원한 것이니 이번 일은 영지의 실속을 차리는 게 훨씬 나았다.
막말로 그들이 보상도 없이 진심 어린 사과만 한다면 막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로빈은 다른 의미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리아넨 공작가는 훗날 황태자 형이 알아서 혼내주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망할 가문을 굳이 신경 쓰는 건 그야말로 심력 낭비였는데 그 이야기를 카인에게 해주지 못하는 게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는 잡힌 용병 100여 명의 처분을 우리에게 그냥 맡겼다.
사실 바로 처형당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다. 이런 경우 저항 없이 항복한 용병들을 그렇게 바로 처형할 수는 없다나?
이름도 언리페어 용병단이니 이름만 들어도 왠지 고쳐 쓸 수 없는 놈들 같은데, 대체 어쩌려는 건지.
로빈도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백랑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소영주님, 칼질 좀 하던 놈들은 그날 다 죽었고, 남은 건 그냥 머릿수만 채우던 놈들인데 굳이 이런 놈들을 죽여서 꿈자리 사나울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원래 맞으면 다 되게 되어있어.”
이 말과 함께 포로들(?)은 모야족이 담당하게 되었다.
적당히 두드려 패서 교육한 후 당분간 일꾼으로 쓸 거라니 백랑이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진짜 어이없는 건 그들을 모야족이 책임지게 된 순간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거였다.
[완료!]
언리페어 용병단과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하라.
보상: 일꾼 103명
페널티: 마수의 습격 빈도 급증, 상급 마수의 습격
기한: 용병단이 전멸하기 전까지
그렇다. 실패가 아니라 완료.
그야말로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가 판단하기에는 저놈들이 우리 영지에서 무보수 일꾼으로 일하게 된 게 바람직한 관계인 모양인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만약 이런 관계가 정답이고 이걸 목표로 저 퀘스트가 나온 거라면, 이걸 부여한 누군가의 인성은 정말 봉구 이하일 것이 분명했다.
보상은 허접하지만, 페널티를 보니 어떤 상황이 이어졌을지 대충 짐작은 갔다. 저놈들이 들어가서 무려 상급 마수까지 꺼내올 운명이었나 보다.
기가 막히긴 했지만 어쨌든 완료는 완료니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퀘스트에 적힌 텍스트에 너무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했고.
물론 S급 퀘스트가 나온다면 뭔가 쫄깃해서 또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작은 건 무시해도 된다는 결론이 났으니 말이다.
다만 이 퀘스트에 보상이 허접한 이유가 혹시 자신이 이번 일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라는 작은 의문이 남긴 했다. 이번 일에 자신은 그야말로 옆에서 구경만 하며 묻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백랑이 재미있는 놈이 있다며 한 남자를 데려왔는데.
바로 언리페어 용병단의 부단장으로 있던 릭스터였다.
처음에는 로빈도 바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직접 마주친 적도 없고 그저 멀리서만 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짧은 머리의 건장한 남성이었는데 지금은 대머리가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로빈은 백랑과 함께 와 자신에게 계속 굽실거리는 릭스터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뭐가 재미있어요? 이 사람이 왜요?”
“하하, 소영주님. 이 녀석, 진짜 웃긴 놈이야.”
백랑이 릭스터에게 들은 그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로빈도 살짝 헛웃음이 나긴 했다.
릭스터는 제닉의 본격 도적 선언에 멘붕해서 살길을 찾아봤지만, 방법이 없어 결국 그곳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잘 따르는 동생들한테도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고.
드디어 마을에 도착해 제닉이 불을 지르라고 했을 때 백랑이 나타났는데 딱 보자마자 무조건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무리와 함께 달려드는 척하며 그곳에서 슬슬 뒤로 빠졌는데 백랑과 적호가 미친 듯이 달려와 용병들을 도륙하는 바람에 도망가지는 못하고 은근슬쩍 가발을 벗고 죽은 척했다는 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