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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67화 (67/303)

67화

적호의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도끼에 맞은 것처럼 죽은 척이라니, 정말 대단한 스킬이 아닐 수 없었는데 덕분에 용병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사급 용병이 되었다.

“헤, 죽은 척이라니. 대단하네요.”

로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순발력이 아닌가? 물론 나중에 시체가 아닌 게 백랑에게 걸려서 몇 대 더 얻어맞긴 했다는데 죽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나았다.

릭스터에게는 소심하고 신중한 성향과 생존 본능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도 그런 성향과 타이틀이 제 몫을 해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 일꾼들은 이놈한테 다 맡기려고. 은근히 말도 잘 듣고 사고도 치지 않을 거 같더라고.”

하긴 타이틀이 생존 본능인 소심한 사람이니 감히 백랑 앞에서 일을 벌이거나 하진 않겠지. 영주 측에서도 단순 가담자인 용병들은 2년에서 3년 정도 영지에서 일하면 풀어줄 생각이라고 했으니 그들에게도 그게 훨씬 나았다.

당시 로빈도 바로 땅에 납작 엎드려 항복했던 저 100명을 감옥까지 찾아가 살펴본 후 굳이 죽일 필요도 없겠다는 결론을 냈었다. 그때 릭스터는 마을 앞에서 이틀이나 시체 놀이를 하고 있었다니 참 어이없긴 하다.

“그런데 왜 굳이 데려왔어요? 어차피 용병들은 이제 모야족에서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요?”

“재미있잖아. 물론 할 말이 있어서 온 거긴 한데, 이 녀석도 소개해 주고 싶더라고. 우리 소영주님이 또 은근히 괴짜들을 좋아하니까. 나도 그렇고, 존도 그렇고. 안 그래?”

자신이 특이하다는 걸 아는 건 좋은데 저렇게 대놓고 자신을 좋아한다니 참 미묘하긴 하다.

그렇게 보이는 건가?

물론 백랑이 좀 엉뚱하긴 하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가만 보면 제정신이 아닌 거 같으면서도 자기 할 일은 또 꼬박꼬박 잘하니까.

솔직히 이번에도 일은 모야족이 다 하지 않았는가.

만약 자신이 퀘스트의 가치를 매길 수 있다면 모야족을 만나고 그들을 합류시키는 걸 퀘스트로 주고 중요도를 SSS급으로 매겼을 것이다. 그만큼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뭔가 나사 빠진 거 같은 백랑보다는 흑웅처럼 조금 진중한 사람이 더 마음에 들긴 하는데 이 상황에서 뭐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랬다.

“그런데 요즘 흑웅 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그분은 영주 성에 통 들르질 않으시니.”

“아, 흑웅? 흠, 잘 지낸다면 잘 지내지. 아마 머지않아 그쪽에서 좋은 소식 하나 정도 선물해 줄지도?”

“그건 또 조금 궁금하네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흑웅이 생각났다.

모야족과 그레이츠 영지의 연결점이 되었던 흑웅.

처음 흑웅이 기사단과 대련한 날 로빈은 검은 곰 기사단과 영지의 기사단이 같이 훈련하며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수 범람 때 기사단이 가메라를 잡는 모습을 본 후에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냥 그들은 대마수 스페셜리스트로 남겨두는 게 낫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적과 싸워 물리칠 수 있는 전력은 그래도 구해볼 만하지만 어디서 상급 마수와 대적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구한단 말인가? 사실 짧은 도끼나 도검을 쓰는 모야족도 대마수전보다 대인전에 강해 보였으니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

로빈은 언젠가는 극도로 단련된 기사들과 상급 마수를 사냥하길 꿈꾸고 있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충분한 무구를 갖추고 훈련도 완료된다면, 그저 꿈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을 생각해도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로빈이 기사단의 대인전 능력을 메워 줄 흑웅과 검은 곰 기사단이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별말 없이 허락한 것도 그런 생각이 바탕에 있어서였다.

그나저나 흑웅에게 좋은 소식이라, 뭔지 전혀 짐작이 안 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한다.

흑웅도 잘 지내고, 가족들까지 모두 대동해 모야족 마을에 정착한 다른 검은 곰 기사단의 기사들도 잘 지낸다니 참 다행이었다. 특히 가족도 없는 기사들은 예쁜 여자들이 즐비한 모야족 마을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아, 그렇지. 사실 말이야. 마을을 좀 바꾸려고 해.”

“마을을요?”

“응. 이번 난리 때 놈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려고 했었잖아? 그때 솔직히 움찔했거든? 소영주님도 알다시피 우리 마을이 불에는 완전 취약하잖아. 대수림에서야 다른 사람도 없었고, 마수들도 불을 지르진 않으니 문제가 없었는데 여기선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겠더라고.”

“그거야 그렇죠. 저도 깜짝 놀랐었거든요.”

백랑도 이번 일을 겪으며 많이 놀랐나 보다. 황무지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갈 때 지온이 제대로 된 주택을 짓자고 말했었는데 그때는 굳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는 반응이었는데 이번 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예전에 숲에 살 때는 이런 일이 전혀 없어서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나 보다.

사실 영지전이 벌어져도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너무 예민한 걱정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도적 떼 정도인데, 아무리 영지가 발전해도 도적 떼가 이곳에 생길 거 같지는 않았고.

그들이 주로 숨는 곳은 산이나 숲인데, 이 근처 산이라 봤자 마수 산맥이요, 숲은 대수림이니 도적들이 그곳에서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부족을 지키는 수장이니만큼 어디서 또 이런 미친 녀석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걱정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그런 걸 제외하고라도 집을 제대로 짓는 건 생각보다 의미가 있어 보였다. 이왕에 짓는 김에 모야족이 좋아하는 냉수 목욕도 쉽게 즐길 수 있게 상수도 시설도 정비하고 강 쪽에는 큰 풀장 같은 위락 시설도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들은 그 정도 혜택을 누릴 가치와 자격이 충분하니 그 정도는 해줘야 했다.

모야족이 남쪽 방면을 완벽하게 방어해 주는 것 말고도 이번 겨울에는 그들이 키운 혼 래빗 덕을 톡톡히 봤다.

히센이 혼 래빗의 영역을 거창하게 늘려버려서 그런지 혼 래빗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거대한 주술 창고를 가득 채운 혼 래빗 고기는 겨우내 추위로 움츠린 영지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니 말이다.

역시 추위에는 따듯한 탕과 고기라는 건지, 그 폭발적인 인기란 정말.

처음에는 로빈도 그래도 마수 고기인데 사람들이 과연 마음 놓고 먹을까 싶어 걱정했었는데 웬걸, 영지민들의 뚝심을 너무 무시했었나 보다.

이곳에서 고기라고 하면 주로 돼지고기를 의미했다. 아직 소는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경우가 많았고 닭은 달걀 때문에 몇몇 곳에서 키우긴 하지만 대량으로 사육하기에는 소소한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레이츠 자작령은 돼지를 많이 사육하지 않았다. 솔직히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긴 시간 동안 잡식성인 돼지를 먹이는 것부터가 문제였고, 요 녀석들이 왠지 이곳에서는 빠르게 자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까지 목초지가 부족해 양모를 얻을 목적으로 적은 수만 유지하고 있던 양이나, 겨우겨우 키우는 돼지들, 그리고 닭 정도가 전부인 영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영지 내에서 육고기를 먹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나마 바다가 있어 생선은 비교적 흔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지민들에게는 맛과 영양, 그리고 고기라는 사실이 중요했지 그것이 마수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게다가 영주 가족들도 즐겨 먹는다는 소문이 어디서 퍼졌는지 처음에는 조금 꺼리던 주민들도 한 번 먹어보고는 그 맛에 반해 거부감 없이 혼 래빗 고기를 찾는다고 한다.

심지어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리퉁을 많이 뽑아오면 일정량의 고기와 교환해 주는 기적의 거래까지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겨우내 혼 래빗 고기를 맛보지 않은 주민들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주민들을 위해 그 많은 혼 래빗을 먹이고 지킨데다가 도축한 혼 래빗 가죽과 뿔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으니 모야족의 공을 말로만 치하하는 건 뻔뻔한 로빈이라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은근히 욕심 없는 모야족이라 뭔가 해줄 만한 게 없어 고민스러웠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게 생겼다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잘됐네요. 이 기회에 싹 고치죠. 우선 이번에 받은 5천 골드로 시작하고 봄이 되면 주노 님이 상행을 떠날 테니 혼 래빗 가죽이랑 뿔로 만든 지혈제를 팔면 생각보다 제법 벌 수 있을 거예요. 상급 마수 가죽으로 만든 액세서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지온 님께 말씀드려 봐야겠네요.”

“그래주면 고맙지. 하하. 우리 마을이 또 은근히 노동력이 부족한 면이 있어서 다른 곳에 신세를 좀 져야 해서 민망하긴 하지만, 좀 부탁할게. 이번에 받은 일꾼 녀석 중에도 토목 공사 경험이 있는 녀석들이 많아 참 다행이야.”

현재 모야족의 인구는 대략 8천여 명. 그런데 사실 성인 장정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노약자, 특히 아이들이 아주 많았고, 남녀 비율도 여성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로빈도 마수와 싸우느라 남성들이 줄어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마수 탓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도 이 부족은 여성이 더 많이 태어난단다.

모야족의 여초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이 그러니 뭐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봉구에게 이게 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무슨 생명의 신비인지, 아니면 이 인간들이 기존의 인간과는 다른 종자인지 참 이상하기만 했다.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성들이 여러 여성을 거느리는 풍습도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렇겠지?

백랑이 그 언리페어 용병단에서 일꾼처럼 머릿수만 채운 남자들을 굳이 거두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투력은 충만하지만, 노동력은 왠지 취약한 부족이었으니 100여 명의 일꾼들도 제 몫을 톡톡히 해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 느낀 건데 여궁수들이 생각보다 전력이 되더라고. 숲에서는 뭔가 많아서 좀 그랬는데, 이곳은 사방이 탁 틔어있잖아? 그래서 그들을 본격적으로 훈련시켜 볼까 하는데, 괜찮겠지?”

확실히 좋은 생각이었다.

전사들의 수를 제외한다면 남성 예비 전사들이 대략 60여 명, 활을 주로 사용하는 여성 예비 전사들이 대략 120여 명인 모야족이니 그 인원을 그냥 놀리는 것은 지나친 낭비이긴 했다.

게다가 저 여성들이 실전을 겪는다면 적호나 월연같이 어엿한 전서로 발전할 수도 있었으니 말릴 이유가 없는 의견이었다.

남성 전사 40여 명과 여성 전사 4명, 솔직히 모야족의 성비와 예비 전사의 숫자를 생각해 보면 저건 말도 안 되는 비율이었다. 적어도 여성 전사들이 50여 명은 넘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로빈은 저런 숫자의 차이가 경험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이 세계에서는 마나를 느낀 이곳 정예 병사나 예비 전사들이 실전을 겪으며 발전해서 마나의 수발이 자유로워지는 전사, 혹은 기사의 수준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말은 마나를 느끼는 건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지만 그 마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실전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야족 여성 예비 전사들은 지금까지 실전을 겪을 일이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보호받는 여성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들이 기본적으로 활을 배우기 때문이었다.

시야가 어지러운 숲에서 본격적으로 활을 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 어쩌면 실전 경험이 적은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만약 백랑의 말대로 여성 예비 전사들이 실전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면 모야족의 전력 자체가 더 향상될 가능성이 컸다. 그녀들을 본격적으로 육성하면서 적호나 월연처럼 활이 아닌 다른 병기를 사용하는 여성들이 늘어날 수도 있었고.

물론 활을 주로 사용하는 만큼 성장이 더딜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모야족인 백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만큼 파격적인 계획이었다. 근래에 무슨 생각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영지의 활동적인 여성들을 보고 뭔가 느낀 것이 있었든지.

아니, 모야족 여성들이 남편이나 가장에게는 순종적이지만 모든 남자에게 온순한 건 아니니 그건 또 아니려나?

과연 모야족 여성들은 여성 전사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후에도 지금처럼 남편이나 남자 형제들에게 순종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로빈은 이런 것도 좀 궁금하긴 했다. 아마 그 해답은 시간이 알려주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소영주님. 이번에는 루터카우를 한번 키워 볼 생각이야.”

“음, 잘되면 좋긴 하겠지만 그게 되겠어요?”

모야족이 쓰는 각궁의 재료가 되는 루터카우.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여성들을 궁수로 육성하려면 활이 많이 필요할 테니 루터카우를 사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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