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각궁이 많으면 우리 병사들에게도 보급할 수 있으니 당연히 찬성이긴 한데, 그걸 떠나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선 인간에게도 큰 해를 끼치기에는 너무 약한 혼 래빗과는 달리 루터카우는 이름만 초식 마수고 웬만한 육식 하급 마수는 찜 쪄 먹을 정도로 난폭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우선 생포해 오는 것부터가 첫 번째 문제였고, 그 힘센 놈을 완벽하게 가둘 튼튼한 울타리를 짓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게다가 실제로 울타리에 가둔다 쳐도 그놈들을 도축할 때는 또 처음에 잡을 때처럼 사냥해야 하니 이게 그냥 밖에서 그냥 잡아올 때와 뭐가 다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한번 해보려고.”
“해보는 건 좋은데 부족민들이 다치지 않게만 하세요. 딱 봐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로빈은 아무리 치트키 수준의 모야족이라도 이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은 훈련과 마을 만들기, 그리고 혼 래빗 사육 외에는 할 일이 없는데다가 전사들은 저 세 가지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 뻔해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은 건 그냥 할 거 같아서 내버려둔 면도 없지 않았고.
백랑이 부탁했던 마을 건설 건은 지온과 카인도 흔쾌히 허락해서 겨울의 끝자락에 바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모야족 남자들과 일꾼 100여 명, 그리고 적절한 임금과 보수로 추가되는 혼 래빗 고기를 노린 영지의 할 일 없는 남자들이 모두 동참했는데, 로빈이 계획했던 대로 모야족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넓은 풀장과 휴식 시설까지 포함된 대공사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을 뒤쪽으로도 가볍게 돌벽과 목책을 추가해 아예 하나의 성처럼 만들 모양이었으니 이번 공사에 영지가 쏟아부을 자금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카인과 지온은 주기적으로 대수림이 어지러워질 것을 대비해 남쪽의 방비를 완벽하게 굳힐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거, 부담스럽네요.”
“하하. 주노 님, 그냥 하시던 대로 하시며 돼요. 올 때는 배로 오신다고요?”
“그래야겠죠? 가서 거래처를 새로 뚫고 오려면 왕복하는 데 대충 두 달 정도 걸리겠네요. 그때까지만 항구를 손봐주시면 됩니다. 그럼, 한번 힘내보겠습니다.”
자신이 혼 래빗과 여러 상품을 팔아 좋은 값을 받아와야 남쪽 마을이 무사히 건설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주노는 자신의 상단을 꾸리면서 결의에 차있었다.
아무래도 부담감도 상당하지만, 자신감도 충만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번에 그가 가지고 올라가는 혼 래빗 모피는 상품 중에서도 가장 최상품이었고, 로빈이 보기에도 빛깔이 남달랐으니 주노가 평타만 쳐도 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잘 손질된 혼 래빗 모피를 본 황도 토박이 히센과 도리아도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상품이라고 칭찬했으니 분명 잘 팔려 나가겠지.
그럼 이제 영지에서 해줄 일은 주노가 돌아오기 전까지 항구를 완벽하게 손보는 일뿐이었다.
* * *
봄이 다시 찾아오고 또다시 본격적으로 한 해가 시작되었다. 물론 로빈은 일곱 살이 되었고.
봄이 되자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작년에 새로 정착한 에테 마을은 인근의 땅을 열심히 개간하고 있었고, 바닷가 마을인 우버는 항구를 손보는 데 여념 없었으며, 남쪽의 모야족 마을 역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진행 중이었으니 영지 전체가 한창 바쁠 수밖에.
카인이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영지가 번잡하게 돌아가는 건 처음이라며 탄성을 내뱉기도 했으니 이게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로빈은 이런 변화가 왠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아 근거 없는 자신감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도 했다.
저택 내 생활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마나를 깨우친 실비아는 본격적으로 연금술 공부에 한창이었다. 덕분에 로빈도 실비아를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 저 어린 것이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린.
실비아와 비슷한 시기에 마나를 느낀 린은 이제 본격적으로 체술을 익히고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로빈은 당연히 소설에서처럼 린이 날카로운 세검 두 자루를 다룰 거로 생각했다. 왜, 영혼이 원하는 무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원래 린이 그런 무기를 쓸 운명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으로 갈 거라고 생각한 건데 정작 린이 선택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걸 쓰겠다고?”
“응, 주인. 이게 마음에 들어.”
처음에는 로빈에게 얼굴을 붉히며 제대로 말도 못 하던 린은 1년 가까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로빈에게 많이 익숙해졌는지 말도 편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주인이라는 호칭을 빼먹지 않는 건 참 어이없었지만 그건 로빈도 그냥 넘어가고 있었고.
하지만 지금 린이 들고 있는 무기는 도저히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다.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게 보통의 검보다 1.5배는 더 길고 검날도 두 배는 넓은 거대한 대검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무로 된 것이라 지금 당장은 그렇게 무겁지 않겠지만 딱 봐도 민첩성 위주의 검사로 성장할 린이 그걸 사용하는 건 정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 웬만하면 다른 걸 쓰는 게 어떨까?”
그래서 로빈이 조심스럽게 권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난 예전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다른 무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주인. 아무리 주인이라도 이건 양보할 수 없는 거야.”
린의 설명을 들어보니 린이 이런 무기를 쓸 결심을 한 건 바로 폴이 가메라를 잡은 날이라고 한다. 거대한 에셋을 들고 가메라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나?
그날 멍하게 폴만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폴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 폴의 에셋에 꽂힌 건가 보다. 어쩐지 검날의 모양이 에셋이랑 묘하게 비슷하다 했더니 애초에 그걸 생각하고 주문(?) 제작한 모양이었다.
린이 지금 들고 있는 대검은 모야족 전사들이 직접 벌목한 대수림의 단단한 나무를 백랑이 손수 깎아준 물건이었다.
원래 모야족에선 아이가 무기를 다루기 시작하면 부모가 직접 무기를 만들어 선물한다나? 예전에 왔을 때 린에게 무슨 무기를 만들어줄지 물어본다더니 그 결과가 저거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려야 할 사람이 파안대소하며 직접 무기를 깎아주다니. 백랑 당신, 너무 린에게 무책임한 거 아니야?
나중에 들어보니 모야족은 전사들은 대부분 도끼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검을 쓰는 건 린이 처음이라 부족민들도 많이 신기해했다고 한다.
백랑이 그저 처음으로 특별한 걸 만든다는 생각에 신나하며 두말없이 이걸 만든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저거 진짜 괜찮은 건가?
여성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마나를 다루는 이 세계라고 해도 기본적인 남녀의 근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목검 정도는 몰라도 실제로 실전용 대검을 쓴다면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하며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지.
모야족이라고 여성의 완력이 특별히 더 강한 것은 아닐 테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날렵함을 무기로 가벼운 쌍검을 다룬다면 진짜 스페셜리스트급의 무위를 선보일 린인데 좀 안타깝기도 했고.
아무래도 모든 문제의 시작은 그 크고 아름다운 에셋 때문인 거 같았다.
아무리 로빈이라도 린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아니, 린의 대단한 에셋 사랑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결국 린은 대검을 쓰기로 했고 폴에게 대검을 다루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모야족 전사들은 기본적으로 짧은 무기인 도끼를 위주로 다뤘고, 보조로 정글도를 닮은 짧은 검을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훈련은 장병기를 다루는 린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고.
반면 기사단은 그야말로 대마수용 장병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니만큼 린의 교육도 모야족이 아니라 기사단 쪽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중 폴은 참마도 형태의 대검부터 창대 끝에 긴 날이 박힌 마상용 언월도까지, 이쪽 방면의 전문가라서 우선 그에게 장병기 사용법을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첫날부터 린은 놀랍도록 그 무기를 잘 다루었다.
린이 ‘린지애’라고 이름 붙인 그 무기.
대충 린의 사랑 정도로 해석되려나?
사랑으로 가득한 일격으로 상대를 쳐 죽이겠다는 뜻인지 도대체 무기 이름을 왜 그따위로 지었는지는 둘째 치고, 린의 무기 다루는 솜씨는 무능력자인 로빈이 보기에도 보통은 넘었다.
거의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걸리적거리지 않고 휘두르는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인데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날카로움과 묵직한 힘이라니.
훗날 저 크기의 진검으로도 저런 모습을 보여줄지는 물론 미지수지만 당장 저 훈련을 막을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로빈은 한숨을 쉬며 어서 빨리 히센이 마수의 뼈로 무기를 만들 수 있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강철로 만든 무기보다 마수의 뼈로 만든 무기가 더 가볍기 때문이었는데, 저렇게 린의 사랑을 휘두르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훗날 근력이나 역량 부족으로 무기를 바꾸어야 한다면 크게 마음 상해할 것이 눈에 선해서였다.
“그나저나, 다 좋은데 난 언제 마나를 느끼려나? 하, 진짜 더러운 세상.”
로빈은 훈련받는 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아직까지도 로빈에게 마나를 느끼는 건 요원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듀발과 동지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뛰고는 있는데 가끔은 좀 답답하기도 했다.
* * *
봄이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드디어 주노가 영지로 돌아왔다. 혼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무려 배수량이 200여 톤이나 되는 큰 배와 함께였다.
전장이 3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저 배는 카르낙급 선박이라는데 네 개의 미스트와 높은 전장, 그리고 넓은 선창의 모습이 왠지 친숙하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항해 게임에서 상선으로 등장해 익숙한 카락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저 모습에 저 이름이라 왠지 좀 미묘한 기분이었지만 이 세계의 배는 대항해 시대의 배들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건 무려 마법 물품인 마나 추진기를 이용해 항해한다는 것이었다.
이 마나 추진기 덕분에 바람이 없는 곳에서도 부드럽고 빠르게 운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체의 내구력을 보조하는 마법진도 돌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긴 했다.
유일한 문제는 저 녀석을 설치하게 되면 배의 가격이 두 배 가까이 뛰어오른다는 거였다. 물론 관리비도 훨씬 많이 들고.
그래도 필요한 선원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데다가 항해의 안전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물건이라 어느 순간부터 모든 배에 마나 추진기를 필수적으로 설치하고 있었다.
지금 주노가 타고 온 저 배는 황도 바로 옆에 위치한 항구 도시 칸 토네에서 대여한 배라고 하는데 선박의 대여료와 선원 20명의 고용 비용, 그리고 항해에 필요한 마나석까지 다 해서 1년 동안 대략 4천 골드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정말 비싸긴 더럽게 비쌌다.
하지만 비싼 만큼 확실히 돈값을 하는 놈이었는데 물욕이 크지 않은 로빈도 저런 녀석을 한 척 구입해 바다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지경이었다. 특히 배의 가격이 비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그런 욕망이 더 끓어오르고 있었으니 참 요망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영지에도 배를 한 척 장만해야 하긴 하려나?
아니지, 만약 배를 산다면 역시 주문 제작이지.
시간이 촉박해서 부두만 정리했고 도크는 미처 손보지 못했지? 우선 그걸 수리한 후 이쪽으로 기술자들을 초청해 대수림의 튼튼한 나무로 배를 만들면…….
분명 출장(?) 건조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겠다?
로빈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거대한 배 한 척을 건조할 계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전세기나 요트, 드림카 따위는 생각도 못 하고 살았으니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선박을 가져야겠다고 말이다.
물론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로빈의 마음만은 이미 큰 배를 한 척 가진 기분이었다.
항구에 모든 물건을 실어 내린 주노는 그 길로 바로 영주 성으로 출발했다.
“주노 님, 수고가 많으셨네요.”
“하하. 제가 이번에 수고를 좀 했습니다, 도련님. 영지는 무탈한가요? 도련님이 굳이 여기까지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영지야, 항상 그렇죠. 여기 나온 건 제가 그냥 궁금해서 나온 거고요.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어서 가시죠.”
그리고 영주 저에 도착한 주노가 상행의 결과를 보고하게 되었는데.
로빈은 주노의 말이 이어질수록 탄성만 터져 나왔다. 주노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하하, 원래 이번 상행에서는 거래처만 파고 물건을 풀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계절이 이렇지 않습니까? 모피는 가을에 팔아야 제값을 받는 녀석들이니까요.”
“…네. 뭐, 그렇죠.”
확실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계절상 모피가 잘 팔릴 만한 시기가 아니긴 했다. 급한 마음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