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로빈이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 근방은 여름만 아니면 모피를 입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 그런 착각을 할 만도 했다.
결국 영지 수뇌부들이 너무 마음이 급해 계절의 차이를 잠시 잊었던 건데, 특히 황도는 이곳보다 더 따듯한 곳이었으니 아마 더욱 팔기 어려웠으리라.
“그런데 운이 좀 따랐는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더군요. 우선 상품을 소개할 겸 한 벌을 옷으로 제작해 온도 조절 마법을 부여한 뒤에 경매에 넘겼는데 그게 상당한 이슈가 되었어요. 덕분에 반응도 아주 좋았고요. 덕분에 디자이너들이나 대귀족용 드레스 숍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하지만 온도 조절 마법이 부여된 모피 재킷과 목도리는 그 오묘한 광택과 계절을 뛰어넘는 언밸런스함 때문에 의외의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오히려 여름에 입어도 시원한 모피 의상이라는 점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게다가 혼 래빗 서식지에는 항상 마수들이 들끓어서 이 정도로 깔끔한 혼 래핏 모피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소재를 구하는 의상 디자이너들도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니, 경매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물건의 품질과 특수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진짜는 이거죠. 영지 내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양의 중, 하급 혼 래빗 가죽을 그 자체로 판매하는 것 말입니다.”
주노의 상행은 최고급 모피를 파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모피로 쓰기 힘든 중급 이하의 가죽들을 판매할 거래처를 뚫은 것인데, 그 대상이 놀랍게도 황실 기사단이었다.
“아르마늄으로 만든 마법 갑옷도 그 안쪽은 가죽으로 덧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혼 래빗 가죽은 그 방면에서는 최고의 소재라고 할 수 있죠. 저번에 그림으로 인연을 맺은 재무 대신 크레톤 후작 각하께서 군부 쪽에 손을 써주셨습니다. 물론 물건이 좋으니 가능한 일이었고요.”
마수 가죽으로 만든 마법 갑옷과 달리 금속제인 아르마늄 갑옷은 당연히 착용 부위를 부드럽게 감쌀 추가 재료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부분 소가죽이나 양가죽으로 그 부분을 처리하고 있었고.
하지만 마법 부여로 보온이나 냉방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혼 래빗 가죽은 다른 어떤 소재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마법을 부여할 수 있음에도 지금까지 다른 마수 가죽을 안쪽에 덧대지 못한 이유는 바로 감촉 때문이었다.
즉, 다른 하급 마수들의 가죽은 기본적으로 뻣뻣하고 부드럽지 않기 때문에 몸에 직접 닿는 부분을 처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건데, 그런 약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혼 래빗 가죽이었으니 군부에서도 이 물건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죽은 분기별로 공급하기로 계약했습니다. 우선 다음 달까지 통가죽 1천 장을 공급해야 하는데, 가능하겠죠?”
지금도 혼 래빗은 정신없이 도축되고 있었다. 물론 미친 듯이 또 자라나고 있었지만.
그러니 빛깔이 흐리거나 털이 빠져 모피로 쓸 수 없는 가죽은 결국 계속 쌓일 수밖에 없었다.
고급품은 모피로 팔면 되지만 저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던 지온은 예상치 못한 사용처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좋네요. 하하. 지금 쌓여있는 것만 해도 2천여 장은 넘으니 충분하군요. 앞으로도 그 정도 양은 꾸준히 공급할 수 있고요.”
“잘됐군요. 앞으로 거래량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기사단에 시범적으로 사용해 본 후, 병사들의 갑옷 안감도 전부 이걸로 바꿀 생각이라고 했으니까요. 군납품이라 가격을 많이 부르진 못했지만, 그 수익이 적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히 군납으로 가죽을 공급하는 건 기대 이상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유행이나 귀족들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점은 갑옷의 안감으로 쓰는 저 가죽이 바로 소모품이라는 것이었다.
마법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내구력이 떨어져 거칠게 활동하면 1~2년에 한 번 정도는 무조건 갈아줘야 했고, 갑옷이 파손되거나 손상되는 경우에도 당연히 같이 손봐야 했으니 적어도 몇 년간은 꾸준히 수요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모피는 무조건 소량만, 그리고 가장 품질이 좋은 것만 판매할 생각입니다. 대신 가죽의 거래처를 더 늘릴 생각이고요. 군부 외에도 이 물건을 찾을 만한 곳이 한두 곳은 아니니까요.”
철저한 고급화와 박리다매 전략을 동시에 구사하겠다는 주노의 말에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야말로 지금 상황에서는 최적의 판매 전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하, 하지만 진짜 대박은 이거죠. 이게 이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주노가 말하는 건 바로 이번에 단발성으로 판매한 가메라 가죽으로 만든 벨트와 여러 가지 가죽 세공품이었다.
“상급 마수를 쉽게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가죽 제품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액세서리가 된 거죠. 게다가 황실에 진상되었던 그 가메라의 가죽이란 것이 알려지면서 프리미엄이 붙었고요.”
“그거 참 반가운 소리군. 그래, 그래서 이번 상행에서 얻은 이익은 얼마나 되는 건가요?”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주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노의 입에서 차례대로 성과가 공개되었는데.
“모피를 판 가격이 1만 7천 골드. 가죽의 계약금이 2천 골드, 그리고 가죽 세공품이 4만 6천 골드니까. 총 6만 5천 골드 정도 되는군요. 이번에 싣고 온 물건들의 가격을 제외하면 6만 3천 골드 정도 남았습니다.”
“허, 그렇게나 많아요?”
솔직히 미친 가격이었다. 특히 저 가죽 세공품들은 도대체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저렇게 주고 사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고.
정말 저 정도 돈이면 마음먹고 상급 마수 사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올 법도 한 가격이 아닌가?
와, 혹시 진짜 누가 노리고 저렇게 사간 건가?
의심 가는 면이 있긴 했지만 그건 추후의 상황을 지켜본 후 고민하기로 하고 지금은 순수하게 이 기쁨을 누리기로 했다.
물론 당분간은 날씨 때문에 모피를 팔긴 힘들겠지만, 가죽은 꾸준히 공급하기로 했고, 올가을이 되면 다시 모피를 팔 수 있으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만약 이번에 판 모피로 만들어진 옷들이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다음에 모피를 팔 때는 지금보다 더 좋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 물건 자체가 영지 독점이라 부르는 것이 값인 상황 아닌가.
“하하, 정말 수고가 많았군.”
“네, 감사합니다.”
환한 얼굴로 치하하는 카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주노의 얼굴에서 왠지 막 빛이 나는 거 같았다. 그의 표정은 마치 지금까지 물건이 없어서 못 판 거지 내 능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로빈도 이번 건은 주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얻은 이익만 6만 3천 골드에 주기적으로 1만 2천 골드씩 들어온다면 당장 영지 개발에 쓸 돈으로는 충분, 아니 사실은 좀 과한 면도 있긴 했다.
그럼 저 남은 돈은 어디에 써야 하려나.
로빈의 머릿속에선 이미 새로운 계산이 시작되었다.
당장 큰돈이 생기면 무엇이 하고 싶은가?
누군가가 만약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로빈은 바로 마수 뼈로 무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이건 기사들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목숨은 이 영지의 구명줄과 같으니 결국 이건 영지 존속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새롭게 멋진 배를 뽑는 것도 탐나긴 했지만, 솔직히 이 일에 비하면 티끌처럼 작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며칠 후, 정작 추가 자금의 사용처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에서는 로빈도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자금은 가도를 정비하고, 공장을 하나 짓는 데 쓰는 게 좋겠군.”
그렇다. 자신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예전에 자신이 핑계로 삼았던 가도 정비와 공장 건설을 카인이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온, 폴, 그리고 주노까지 모두 카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봄이 오고 항구에 물건이 들어오면서 마을 간의 거래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 작년에 두 곳을 공사하면서 임금으로 많은 돈을 풀었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고.
즉, 물건이 없어 돈을 쓰지 못하다가 이번에 대량으로 다양한 물건이 영지로 들어오자 그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물건을 다른 마을에 옮겨다 파는 사람과 모야족 마을로 가 혼 래빗 고기를 사는 사람까지 늘어나 마을 간 이동이 잦아지니 다소 엉성하고 좁았던 마을 간 가도를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었다.
물론 로빈도 가도 정비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실 자신도 영주 성에서 모야족 마을로 내려갈 때나 북쪽 방벽 아래에 있는 에보니 마을로 향할 때면 좁은 가도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인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영주 성에서 북쪽 방벽이나 남쪽 요새로 출동할 때도 가도의 상태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니 급할 때는 이 작은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도를 정비하며 다시 한 번 돈을 풀어 영지의 경제나 거래를 활성화할 수도 있었으니 일거양득이기도 했고.
하지만 문제는 역시 공장이었다.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인 마법 공장.
물론 장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공장을 운영하면서 많은 영지민이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공장에서 생성된 물건을 영지에 공급하면 황도에서 수입하는 생필품 양이 줄어들어 소소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궁핍한 제국 북서부에는 따로 공장을 운영하는 영지가 없기 때문에 운송료가 필요한 황도보다 더 저렴하게 물건을 공급할 수 있어 영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
게다가 다른 영지에 물건을 싸게 공급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그레이츠 영지로 유입되는 유동 인구가 늘어나며 그들에게도 황도의 물건을 팔 수 있어 운송비가 저렴한 해상 운송의 장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이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는 그레이츠 영지를 제국 북서부 지역 물류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국 북서부에 위치한 다른 어떤 영지도 바다를 접하고 있진 않으니 영지가 계속 발전하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떠나서 이놈의 마법 공장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이게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금 가진 돈으로도 지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예전에 영지가 한 해를 잘 보내면 얻을 수 있는 수익이 대략 4천 골드. 그러니까 15년을 넘게 손가락만 빨고 살아도 공장 하나를 건설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만약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면 지금 있는 돈은 당연히 모두 사라질 것이고, 앞으로 들어올 돈도 상당 부분 저쪽에 투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도 정비와 마법 공장 건설, 두 가지를 동시에 시도한다면 그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대공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로빈이 하고 싶은 다른 것들은 전혀 시도할 수 없게 되고 마수 뼈로 제작한 무기 역시 날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이 예전에 냈던 의견이라 웬만하면 그냥 가만히 있으려던 로빈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도저히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량의 지원금을 받을 순 없더라도, 적어도 장인을 섭외하고 연구를 시작할 자금 정도는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공장이 건설되고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영지에 자금이 전혀 남아나지 않을 거 같았으니 말이다.
결국 고심 끝에 로빈이 던진 회심의 수는 영지의 위기의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이상할 정도로 비싼 가격에 상급 마수 가죽 세공품이 팔린 일과 저번 난리를 연결 지어 분위기를 그렇게 몰고 가는 거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기만 해도 자신이 할 일에 합당한 근거가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공장도 좋은데, 걱정되는 게 있어요.”
이 기회가 아니면 공장을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가능하면 공장 건설을 시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던 카인과 지온은 아무 말 없던 로빈이 손을 들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발언을 막지는 않았다.
“그래, 로빈. 뭐가 걱정되는 거니?”
“우선, 공장을 짓는 건 저도 찬성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그 기틀을 마련할 수 없을 거고, 주노 님의 말을 들어보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돈이 들어올 테니 불가능한 일은 아닌 거 같으니까요.”
로빈은 우선 공장 건설 자체는 찬성한다고 운을 띄웠다. 사실 있으면 좋은 건 분명했고, 실제로도 긍정적인 효과가 대단했으니 필사적으로 막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