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하지만 저 관리가 들어와 저를 보자마자 당황하는 걸 보니 왠지 웃음이 나 마음 역시 많이 편해졌다. 덕분에 손을 흔들며 환영할 여유까지 생겼고.
“이번 일의 전권 대리인이신 로빈 그레이츠 소영주님이십니다.”
“아……. 네. 리아넨 공작가의 외무관 젤루나 파루스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황하던 상대는 지온이 로빈을 소개하자 정신이 번쩍 든 듯 표정을 바꾸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황과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어 있던 얼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이내 작게 미소 짓는 걸 보니 어쩌면 어린아이 하나를 잘 달래면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겠다며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어리다고 너무 무시하다가 오히려 큰코다칠 수도 있는 거고.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네요. 오시는 길은 평안했나요?”
“아, 네. 황도에서 이곳까지 뱃길이 열려서 편안하게 왔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긴 리아넨 공작이 기거하는 황도 저택에서 이곳까지 육로로 왔으면 지금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엄청 피곤했을 거다.
그리고 아마 저 감사 인사는 단순히 자신이 이곳에 편안하게 온 거뿐만 아니라 차후에 황도에 기거하는 기사단이 대수림으로 출정할 때도 그 배편을 이용해 편하게 올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저번 출정 때는 카인의 허락이 없어 육로로 이동했을 테니 말이다.
“뭐, 편하게 오셨다니 다행이군요. 훗날 기사단이 출정할 때도 배편을 이용할 수 있게 조치하도록 하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우선 그 점을 확신시켜 줬다. 어차피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토벌을 마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하긴 했으니까. 상대의 표정이 더 밝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예상이 틀리진 않았나 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리아넨 공작 각하가 원하는 게 대수림으로 진입 후, 상급 마수가 있는 곳까지 가능하면 안전하고 확실하게 안내하는 것. 그리고 토벌이 완료될 때까지의 보급. 이게 맞나요?”
“우선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상급 마수 토벌 경험이 있는 기사단의 합류, 혹은 그들의 조언입니다.”
“역시 그런가요?”
그래도 태도 차체는 나쁘지 않았다. 급해서 그런 거겠지만 영지 기사단의 조언까지 받아준다니. 목적을 위해 자존심마저 잠시 내려놓았으니 이곳에 와서 큰 사고를 칠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우선 한 가지 확답을 받고 싶은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물론 리아넨 공작가의 기사들이 대단하다는 건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사정에 능통한 전문가는 저희 기사들이나 길잡이입니다. 저희가 안내를 자처해도 그분들이 저희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요. 전투야 당연히 공작가의 기사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 외적인 문제들은 저희의 의견을 따라주셔야 해요. 가능한가요?”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공작님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대수림에 들어간 순간부터 다시 복귀할 때까지 그레이츠 자작령에서 붙여준 길잡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라고요. 그러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우리 공작님이 참 어지간히 급하시구나. 웬만하면 저렇게까지는 안 할 텐데.
어쨌든 그렇게 해준다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병신력 보존의 법칙은 만고의 진리라 그 와중에도 트롤 짓을 하는 놈이 있긴 하겠지만 최소한 공작의 약속을 받아냈으니 대놓고 곤란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문제는 보수였다.
“좋네요. 그래서 이번 일에 협조했을 때,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죠?”
“흠흠. 그건…….”
귀족 간에 무슨 일이 생겨 서로 협력할 때는 당연히 기브 앤드 테이크가 밑바탕에 깔려있게 된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답례할 거라는 언급도 없는 상황에서 대놓고 보수부터 꼭 집어 물어보는 건 귀족적인 태도가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훅 치고 들어간 로빈의 질문에 상대도 약간은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우리가 서로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지.
뭐, 귀족답지 못하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제 겨우 일곱 살인 아이에게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기대하는 놈이 더 이상한 거 아니겠어? 아이의 태도가 귀족답지 못하다고 꼬집어봤자 그쪽만 쪼잔한 놈이 될 테니 이 기회에 어린아이의 특권을 누려줘야겠다.
“아, 중앙에 어쩌고 하는 그런 조건은 사양할게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희가 영지를 떠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표정이 떨떠름해지는 걸 보니 이번에도 비슷한 조건을 생각해 온 건가?
이건 뭐, 생각이 있는 건지.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지원이나…….”
“설마 돈인가요? 혹시 우리 기사단을 용병 취급하시는 건 아니겠죠?”
“네? 아, 물론 아닙니다. 기사들을 용병 취급하다니요. 다만 항상 마수의 습격으로 신경 쓸 일이 많은 영지가 아닙니까? 저희 공작 각하가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시면 북서부 일대의 지원 정책을…….”
와, 이거 이 사람. 완전 날로 먹으려 하네.
아이라고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이래서야…….
주노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룩센 대제는 북부 전선 쪽 영지들의 감세 정책을 추진하려 하고 있단다. 그리고 그 정책을 가장 반대하고 있는 건 지금 쫓겨나 있는 리아넨 공작의 파벌.
물론 대놓고 파벌로 묶여있는 건 아니지만 암암리에 알려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파벌이었는데, 그들은 황제의 정책에 은근히 태클을 걸며 리아넨 공작의 복권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이 정보의 출처는 요즘도 가끔 어울리는 황실 재무 대신이라고 한다. 그쪽 관리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였고, 군부 쪽에 들어가는 혼 래빗 가죽이 호평이라 소개해 준 재무 대신의 체면도 올라가서 그런지 그런 단순한 이야기들은 쉽게 해준단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니 북부 지원 정책을 빌미로 지원을 해준다는 건 그야말로 헛 수작에 불과했다.
물론 가능하긴 했다. 리아넨 공작이 황궁으로 들어간 후 황제의 정책에 찬성하면서 기왕 하는 김에 금전적 지원도 추가하자고 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영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건 너무 양심이……. 정말 한번 해보자는 건가?
아마 중앙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영지라는 판단에 그쪽 정세에도 어두울 거로 생각하고 적당히 약을 팔려는 모양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었다.
“마땅히 대안이 없나 보군요. 그럼 이렇게 하죠. 이번 토벌을 마치면 남는 대마수용 무기들이 있을 텐데, 그걸 받고 싶네요. 마법 사슬 같은 거요. 가능한가요? 어차피 공작 각하의 영지에서 그걸 또 쓸 일은 없어 보이고, 마땅히 살 사람도 없을 거 같은데요.”
로빈의 제안이 의외였는지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인상을 쓴다. 딱 봐도 제법 많은 돈을 투자해 만든 무구를 넘겨주는 건 내키지 않은 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간 아르마늄만 해도…….”
“아, 그러네요. 이번 토벌에 성공하면 황실에 보고서를 올려야겠군요. 그레이츠 영지 쪽에서 리아넨 공작 각하의 도움과 지원 덕분에 무사히 마수 토벌을 완료했다고 보고하면 좋은 그림이 나오긴 하겠네요. 예전의 과를 완전히 씻어내고 상급 마수를 토벌한 새로운 공을 세우신 거니까요.”
“그건…….”
“와, 그런데 거기에 각하께서 변방의 열악한 영지를 위해 마수 사냥용 사슬과 물자까지 지원해 주신다면……. 보고서에 올라갈 내용이 점점 풍성해지네요. 이런 충성스러우신 분이 황제 폐하 곁에서 그분을 보필해야 하는데 말이죠. 안 그런가요?”
“예? 예, 그렇죠. 당연히 저희 각하께서 황궁으로 다시 들어가셔야죠.”
갑작스러운 로빈의 말에 외무관 젤루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귀족의 도움을 받아 토벌을 완료했다는 보고서를 올리는 건 사실 그레이츠 자작령의 체면을 깎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색한 관계인 이곳에 그런 부탁을 했다가 일이 틀어질까 봐 차마 부탁하지 못하는 것이고.
하지만 만약 정말 그런 보고서가 들어가면 황실에서도 더 이상 리아넨 공작의 실책을 물고 늘어질 수 없게 된다.
결국 보고서와 함께 상급 마수 토벌까지 성공하게 되면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 된다는 건데.
“그런데 마법 사슬이 그렇게 비싼가요? 저희 영지는 그런 귀한 물건을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한데 참 안타깝네요. 마법 물품을 지원받았다는 내용이 빠지면 내용이 빈약해서 이거 어디 보고서를 올릴 수나 있겠어요? 아무래도 이번 보고서는 생략해야 할 거 같군요.”
“네?”
하지만 로빈도 공짜로 보고서를 써줄 생각은 없었다.
젤루나는 마법 사슬을 지원하지 않으면 보고서를 써줄 생각이 없다는 로빈의 협박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렇게 노골적이라니.
하지만 애당초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몰라도 상대가 그런 보고서를 올려준다는데 쉽게 거래를 거절할 순 없었다.
마법 사슬의 가치와 공작의 황궁 복귀를 확실하게 도와줄 그레이츠 자작령의 보고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게 추가 한쪽으로 기운다.
“하하. 당연히 지원해 드려야죠. 이게 다 황실을 위하는 공작님의 충심 아니겠습니까?”
“오, 역시 공작님은 충신이시네요. 그럼 물자는 어떻게?”
“네?”
“왜 놀라세요? 분명 그 마법 사슬과 ‘물자’를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분명 제가 그렇게 말했었는데요. 아, 물자는 아니었나요? 흠……. 그럼 어쩌나. 보고서에 뭐라고 올려야 하지?”
“아휴~ 무슨 말씀을……. 하하. 당연히 지원해 드려야죠. 네, 당연하죠.”
“그래요. 그럼 좋죠. 게다가 이번 토벌을 마치면 공작님도 제법 거두어 가시는 게 있잖아요? 상급 마수의 부산물로 만든 장식품이 엄~청 비싸게 팔렸으니까요. 저희는 지원을 받아서 좋고, 공작님은 상급 마수도 얻고 황실에 충성심을 보일 수 있어서 좋고.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예? 아… 예. 물론 그거야 그렇죠.”
로빈이 웃으며 상급 마수 전리품을 이야기하자 젤루나도 입을 다물었다.
사실 예전에 로빈이 팔았던 물건의 시세를 어떤 귀족들이 일부러 조작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저번 토벌 때 제법 많은 수의 용병을 모을 수가 있었고.
그런데 로빈이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하자, 그건 우리 공작님이 조작한 거였고 상급 마수의 전리품은 사실 큰 가치가 없지 않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지원을 아끼고자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빈과 젤루나의 대화를 지켜만 보던 지온이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올릴 보고서에 몇 줄 추가하는 것으로 상대를 가지고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문장이 상대에게 중요한 건 맞지만 대놓고 치고 빠지는 바람에 상대가 냉정함을 잃어버렸다.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 저 도련님은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
사실 적당히 값을 지급하고 사슬을 구입할 생각이었던 로빈은 상대가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해서 생각을 바꿨다. 자신도 최대한 뽑아 먹는 쪽으로 말이다.
물론 자신이 말한 대로 보고서는 정말 제대로 올려줄 것이다. 먹은 만큼 값을 해야 서로 뒤탈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리아넨 공작령에는 장인들이 많죠? 혹시 몇 명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마수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분으로요. 이곳이 열악하다 보니 장인 분들도 몇 분 없어요. 참 안타깝다니까요. 아, 물론 소개만 해주시면 돼요. 저도 그렇게 양심 없는 녀석은 아니거든요.”
“아, 네. 그렇다면…….”
그리고 기왕 호구 잡은 김에 사적인 욕심도 좀 채우기로 했다.
물론 그야말로 소개만 해주는 거고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장인이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그들을 설득해 영지로 이끌 수만 있으면 대박이었고.
그 외에 소소한 합의 몇 가지를 이루고 젤루나는 도망치듯 황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이곳을 방문할 자들은 제대로 된 기사들일 것이다. 서로 급한 상황이라 자신이 황도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출발한다고 했으니 아마 시간은 2주 정도 걸릴 테고.
“흠……. 굳이 그런 보고서를 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폴은 그런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조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긴 주군의 체면을 깎을지도 모르는 보고서를 올리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물론 로빈 자신도 할아버지의 체면을 깎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체면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자신의 이름, ‘로빈 그레이츠’로 쓰면 되었으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