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보고서는 제 이름으로 올릴 테니까요. 누구 이름으로 올라가건 내용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거야 그렇지만 앞으로 영지를 이끌어가실 도련님의 체면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에게 무슨 체면이 있겠어요.”
“그거야…….”
“문제는 영지의 체면인데. 흠……. 그건 뭐, 답이 없네요. 그런데 제국민들 중 이곳 사정이 좋지 못한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사실 깎아 먹을 체면도 없는 거죠, 아직 이곳은.”
로빈의 지적에 폴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이곳의 이미지가 좀 그랬으니 말이다.
물론 저번에 마수 머리를 바친 일로 다소 희석되긴 했지만 아직은 멀었다.
“하지만 굳이 그걸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없긴 한데, 이제는 아닐 거란 말이에요. 영지 정비가 마무리되면 우리도 이제 제법 괜찮게 사는 축에 들 테니까요. 그러니 괜히 남이 시샘하기 전에 적당히 알아서 숙이자는 거죠. 남이 잘되는 건 은근히 배가 아픈 일이거든요. 사실 근처 영지의 사정이 좀 안 좋은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그건 그렇군요.”
“그래요. 그리고 사실 저번에 저희가 상급 마수를 잡아 보낸 것도 이렇게까지 일이 크게 번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거품은 좀 걷어내자고요. 그때 온전히 저희 힘만으로 잡은 것도 아니잖아요. 괜히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달라붙으면 피곤하기만 하고요. 물론 기사단의 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희가 그렇게 여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나요?”
“네. 도련님. 영지를 위해서라면 기사단의 명예 정도는…….”
영주인 카인의 체면은 그렇게 신경 쓰면서 또 자신들의 명예는 영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단다. 하여간 이분도, 참.
하지만 이런 성향 때문에 폴에게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실 다른 곳에서는 계속 실패한 상급 마수 토벌을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성공했다는 점은 좀 부담스러웠다. 그냥 가볍게 넘어갔으면 쉽게 잊힐 일이었는데 쓸데없이 아직도 계속 회자되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훗날 무슨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일을 핑계로 차출이라도 요구하면 괜히 피곤해지기만 했다.
그러니 적당히 거품도 걷어내고 공은 공작님께 돌려야겠다. 물론 실속은 적당히 챙기고.
“그리고 보고서는 보고서고 우리가 챙길 건 알아서 챙겨야죠. 물자를 지원받는 것도 좋지만 진짜 중요한 건 역시 마수 아니겠어요?”
“어쩌실 생각이신지?”
“아, 보고서의 내용을 완전히 사실로 만들려고요. 그러니까 귀족들의 기사 덕분에 영지를 잘 보호할 수 있었다고 보낼 생각이거든요. 그러면 기사들이 진짜 저희를 보호해 줘야죠.”
“아, 설마.”
“네, 백랑에게 연락해서 대수림 침공 루트를 조정하세요. 저희 영지 근처로 나올 만한 마수들을 전부 제거하고 가는 쪽으로요. 기왕이면 대수림의 끔찍함에 치를 떨면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렇게 돌리다가 마지막에 상급 마수 한 마리만 제대로 잡으면 되겠죠.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이거야, 원.”
“하하.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연락하겠습니다.”
보고서에 쓴 딱 그만큼만 굴리겠다는 로빈의 말에 폴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리한 로빈이 그 보고서를 빌미로 뽑아 먹을 수 있는 만큼 뽕을 뽑을 계획인 게 너무 재미있어서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처음의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이건 이거대로 괜찮았다. 앞으로도 자신의 영지가 손해 보면서 살 일은 없어 보이는 게 마음에 들기도 했고.
“아. 그리고요, 폴 경. 이번에는 몸 좀 사리세요. 너무 나서서 괜히 그들에게 경각심만 주지 마시고요. 최대한 비위도 좀 맞추면서. 그렇게 할 수 있으시죠?”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요. 이번 한 번만 그래주세요. 우리 영지 지키기도 바쁜데 괜히 다른 곳을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이번엔 진짜 저희 영지를 지켜주러 오는 거잖아요.”
폴의 입장에서는 지켜만 보는 게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전력상 상급 마수를 잡을 수는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이곳을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거고.
그러니 괜히 튀지만 않는다면 이곳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것이다.
아, 그래. 예전에 우릴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그레이츠 자작령을 기억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폴도 로빈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했는지 고개를 숙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2주 후, 드디어 귀족들의 기사들이 그레이츠 자작령에 도착했다.
온갖 물자를 실어온 기사들은 로빈과 잠시 만난 후 하루를 쉬고 바로 남쪽으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상급 마수를 완벽하게 토벌하기 위해 서두른 것이다.
다행히 리아넨 공작도 물자라든지 마법 사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대신 보고서 하나만은 정말 제대로 올려달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이번에 실어온 물자의 양도 장난이 아니던데 역시 통 큰 중앙의 고위 귀족다웠다.
특히 물자를 확인할 때는 은근히 이 호구 같은 공작 각하에게 없던 호감도 솟아날 정도였다. 정말 실감 나게 보고서를 작성할 의욕이 막 솟구친다고 할까? 어쨌든 기분은 그랬다.
“하……. 최정예 기사가 120이네요. 흠, 진짜 많긴 하네.”
고위 귀족 네 명이 고르고 고른 최정예 기사의 수가 무려 120명.
단순한 전력으로 보면 상급 마수조차 명함을 못 내밀 정도였다. 이곳 영지의 기사들이나 모야족 전사들도 최정예 기사와 버금가는 능력을 갖춘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수를 상대한다는 게 변수가 되긴 하겠지만 역시 예상대로 루트만 제대로 잡으면 별문제 없어 보였다.
“백랑 님, 루트는 잘 잡았죠? 무리는 하지 말고 적당히 쓸어버리고 진입하세요. 그리고 최우선은 안전이에요. 많이 다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응. 걱정 마, 소영주님.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길이야. 중간에 다른 상급 마수도 없어서 문제 될 것도 없고.”
그레이츠 자작령은 폴을 포함한 베테랑 기사 열 명과 백랑과 흑웅을 포함한 모야족 전사 열 명을 토벌대에 포함시켰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무사히 영지까지 도망치려면 그 정도 숫자는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쨌든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토벌대가 출발하니 걱정부터 앞서는 건 사실이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린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그리고 그런 로빈의 염려를 뒤로하고 그들은 대수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로빈 측이 계획한 이번 토벌 기간은 대략 2주 정도.
아무리 로빈이라도 이 기간에 마음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답답한 마음을 달래줄 만한 건 그나마 정신없이 뛰는 것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왠지 잡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괜히 안 좋은 상상까지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대수림 근처 남쪽 요새 마을까지 내려가고 싶었지만 대수림이 소란스러워지면 격전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그곳에 로빈을 보낼 가족들이 아니었다. 한번 슬쩍 내려간다고 말했다가 마리아나의 등짝 스매시에 응징당한 후에는 말도 못 꺼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로빈에게 슬쩍 다가온 실비아가 수줍게 웃으며 작은 약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진정제예요, 도련님. 제가 만들었어요. 물론 스승님이 도와주시긴 했지만요.”
배시시 웃으며 진정제를 내미는 실비아.
로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 약병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실비아 단독 작품도 아니고 도리아까지 합세한 물건이면 믿을 만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쨌든 약을 먹고 나니 왠지 좀 안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응, 고마워. 이제 좀 괜찮아졌네.”
“정말요?”
“응. 고마워.”
도리아의 말에 의하면 실비아는 연금술 중에서도 약품 연구 쪽에 특화되어 있다고 한다.
뭔가 다양하고 새로운 약품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건데.
지금은 괜찮지만, 훗날을 위해서는 권위 있는 치료사나 흑마법사를 새로운 스승으로 모셔 그쪽을 제대로 공부해야 할 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물론 도리아 여사도 치료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지만 원래 주 연구 분야는 물질학이었고 이쪽 방면으로는 전문성이 살짝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실비아가 웬만한 녀석이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저 녀석의 재능은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벌써 어린 나이에 이런 약품을 만들어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비록 도리아 여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뒤로 미뤄 두었다. 아직 도리아 여사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멀었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방긋 웃는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로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수련장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거칠게 뛰어다니면서 이 정도면 마나라도 느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투덜거리던 로빈은 문득 느껴지는 찌르르한 충격에 멈춰 서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설마 진짠가?”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감각을 되살리려 노력했는데.
뭔가 형용하기 힘든 감각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기묘하고 짜릿한 감각.
로빈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와, 진짜 이런 거구나. 대략 2년 만인가? 뭐, 나쁘진 않네. 그리고 이제 강제 운동도 안녕이다.”
물론 그 후에도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꾸준히 몸을 움직여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냥 기뻤으니 말이다.
드디어 마나를 깨우쳤다는 기쁨 덕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로빈.
그리고 며칠 후, 토벌단이 출발한 지 2주 하고도 3일이 지난 그날,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왔다. 토벌단이 드디어 모야족 마을로 귀환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우선 급한 사항은 통신 수정구로 보고 받았는데.
“뭐예요, 백랑. 늦었잖아요?”
[하하. 그럴 수도 있지. 뭐, 3일 정도야.]
“그래서, 잘됐어요?”
[응. 성공. 우리 쪽은 다친 사람 없어. 저쪽은 몇 명이 크게 다치긴 했는데 죽은 사람은 없고.]
후. 우선 무사히 사냥도 마쳤고, 영지의 기사 중에는 다친 사람도 없다니 안심이었다.
다만 다른 기사들이 많이 다쳤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는데, 이곳 영지에 적당한 수준의 치료사는 있지만, 신관이나 흑마법사가 없어서 큰 부상에는 취약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곳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좀 곤란했다.
“많이 다쳤나요? 당장 죽을 정도인가요?”
[뭐, 많이라면 많이겠지? 팔이나 다리 한쪽이 절단된 녀석이 몇 있어. 아무래도 여러 영지에서 모인 기사들이다 보니 호흡이 좀 안 맞았거든. 영지에서 대충 치료받고 바로 황도로 보내야 할 거 같대.]
“아, 그래요? 영지에 신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황도로 가면 저 정도는 고칠 수 있다니 너무 걱정하지 마. 돈이 엄청 든다지만……. 아, 그리고… 아니, 아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
뭔가 말을 흐리는 게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큰일이면 이야기했겠지 싶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쨌든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는 무슨. 나름 재미있었어. 그럼 영주 성으로 가서 보자고.]
연락을 마친 로빈은 가슴을 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기사가 없다니 정말 기대 이상의 성과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수준 높은 기사들만 데리고 만만한 녀석을 딱 골라 상대한 보람이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들도 할 만큼은 해준 셈이 아닌가.
그날 밤.
드디어 기사단이 영주 성으로 귀환했다.
다만 다른 전리품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거대한 칸누라스의 머리만을 큰 수레에 실어왔을 뿐이었다. 물론 흉악한 어금니가 돋보이는 칸누라스의 머리도 참 멋지긴 한데 다른 건 어쩔 셈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영주님, 가능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는 신관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치료 문제 때문이라도 가능하면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음……. 그래도 하루라도 쉬시지요. 자잘하게 다친 분들도 제법 계신 거 같은데요.”
“네? 아, 아닙니다. 영지에서 나누어주신 지혈제가 효과가 좋아 작은 상처들은 모두 나았습니다. 나머지는 황도로 돌아가 신관님의 손을 빌려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음. 뭐, 급하시면 할 수 없죠.”
이 기사들의 대표 격인 리아넨 공작가의 기사단장 네룬 경.
성향도 진중한 편이라 로빈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해 이 토벌대의 대장을 맡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당히 조급해 보이기도 했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