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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76화 (76/303)

76화

그렇게 대화하며 슬쩍 뒤에 있는 다른 기사들을 살펴보는데 그들 역시 안색이 상당히 어두웠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로빈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그리고 저희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상급 마수의 나머지 부분은 영지 쪽에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네룬 경은 로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군례를 올리더니 휑, 하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바로 우버 마을로 출발하는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달랑 머리 하나 챙겨서 돌아간다고? 물자랑 마법 사슬은 약속된 것이니 그렇다 쳐도 마수까지 버리고 가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허, 통 크기도 하셔라. 대체 뭐지, 저건?”

그렇게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빈에게 백랑이 넌지시 다가왔다. 물론 조금 지친 듯한 폴도 함께였다.

“하하. 소영주님, 오랜만이네.”

“네, 근데 저 사람들 대체 왜 저래요? 마치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 같은데요.”

로빈은 우선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거. 흠……. 저쪽 입장에서는 그럴 만하다고나 할까?”

“대체 뭔데요?”

“아, 별일은 아닌데.”

백랑이 자꾸 말을 흐리자 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폴을 바라보았다. 답답해 죽겠으니 어서 말해달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사실, 문제가 좀 있긴 했습니다. 기사 중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하나 끼어있어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요? 누군데요?”

“리아넨 공작가의 대공자 그릭스 리아넨입니다.”

“예!?”

사전에 통보도 없이 대공자가 기사들 사이에 끼어서 토벌대에 합류했다라.

그래, 트롤이 하나쯤은 끼어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더 덩치가 큰 놈이었다.

공작가의 대공자라니. 도대체 그놈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잠깐. 리아넨 공작가의 대공자?

거기 대공자는 지카스 리아넨 아닌가? 분명 소설에 나온 리아넨 공작은 지카스였는데.

지금 리아넨 공작은 소설이 시작한 뒤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재난에 목숨을 잃게 되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뱀처럼 교활한 지카스 리아넨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출연 비중도 제법 높아 착각할 가능성도 거의 없는 인물인데 대공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니, 로빈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리아넨 공작가의 대공자는 지카스 아닌가요?”

“지카스는 둘째 공자입니다. 대공자는 그릭스 공자고요.”

“둘째 공자…….”

아무래도 천둥벌거숭이 같은 대공자가 지금처럼 낄 때 빠질 때를 구별하지 못하고 설치다 객지에서 요절했든지, 뱀 같은 지카스가 제 형을 암살했든지 아무튼 그런 식으로 흘러갔나 보다.

하긴 그 정도는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놀랄 이유도 없었다. 엉뚱한 놈이 대공자라는 통에 좀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릭스 리아넨은 그래도 실력 하나만은 괜찮은 기사였나 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다른 기사들이 어떻게든 뜯어말렸을 텐데 결국 몰래 지만 토벌대에 합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변장을 잘했다 해도 휘하의 기사들이 자신의 대공자를 몰라봤을 리는 없고, 얌전히 있겠다는 적당한 딜이 있었을 거로 추측된다.

그런 걸 보면 기사들과의 사이도 나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하긴, 본인 자체도 기사였으니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끼어 들어간 리아넨 대공자는 그리 얌전한 사람은 못 되었단다.

“고 녀석이 얼마나 촐랑대는지… 아우, 진짜. 거기다 거만하기는 또……. 우리 전사들이 무슨 자기 하인인 줄 아나.”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고 실력도 제법 준수한 공작가의 대공자.

그는 공작가의 대공자답게 귀족적이고 거만한 남자였단다. 하긴, 그 정도 가문에서 자란 대공자가 거만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물론 회귀 전 황태자처럼 선천적으로 호구인 녀석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어쨌든 이 대공자는 자신들은 열심히 싸우는데 정찰하러 다닌다는 핑계로 몸을 사리던 모야족 전사들과 영지의 기사들을 꽤나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종종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 잡다한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단다.

전사들과 기사들은 자신의 충고를 떠올리며 애써 웃으며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백랑은 그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는데…….

“그래, 뭐 티 나게 내가 혼내줄 필요는 없지. 그래서 진입 루트를 좀 바꿨어. 어떻게 들어갔냐면…….”

하, 진짜 저 트러블 메이커가 또…….

대수림을 마을과 가까운 쪽부터 위에서 아래로 A1~10, 그다음 블록을 B1~10……. 이런 식으로 나누었을 때 이번 토벌의 진입 경로는 대충 A1 > A2 > B3 > C2 > D3 > 목적지,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백랑이 선택한 경로는 A1~A5 > B6~B1 > C1~C3, 이런 식으로 돌아 들어가는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완전히 대수림을 훑어버렸네요. 마수들도 미친 듯이 달려들었을 테고요.”

로빈이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냐는 듯 원망스러운 눈으로 폴을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하며 슬쩍 로빈의 눈을 피했다. 폴까지 저런 반응인 걸 보면 그 대공자가 상당히 밉상이긴 했나 보다.

아니면 또 무슨 모종의 음모가? 에이,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저것만 해도 문제였다. 분명 얌전히 다녀오라고 했는데 그런 만행을 벌이다니.

저 사고뭉치를 대체 어쩔꼬?

“물론 가능한 길만 찾아 들어간 거였어. 그 기사 녀석들이 갓 잡은 활어처럼 파닥파닥 엄청 싱싱했거든. 웬만한 중급 마수 따위로는 상대도 안 돼 보였고.”

“덕분에 이번 겨울에는 마수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마수들과의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확실히 뛰어난 기사들이긴 한 모양이었다. 물론 기사들의 무장 상태만 봐도 웬만한 마수들에게 당할 리는 없어 보였지만.

실제로도 다친 자들은 있어도 죽은 자는 없었다. 백랑의 말대로 최대한 피곤하지만, 문제는 없게 잘 이용해 먹긴 한 모양이다.

“뭐, 좋아요.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된 건데요? 저들은 왜 저러는 거고요. 단순히 마수들에 시달렸다고 저러는 건 아니잖아요.”

“네, 어쨌든 그렇게 잔뜩 마수를 잡고 결국 목적지에 도달해 정식으로 칸누라스 사냥을 시작하는데, 그 대공자가 미친 듯이 달려들어서는…….”

“들어서는?”

“칸누라스의 앞발 후리기에 그만 어깨가 으깨지고 말았어.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놈이 미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바람에……. 하하.”

하……. 대공자가 트롤 짓을 하다 결국 크게 다친 거군. 대공자를 하루라도 빨리 치료하기 위해 기사들이 미친 듯이 서두른 거고.

대공자가 몰래 이곳에 따라온 걸 방치한 것만 해도 문제인데 크게 다치기까지 했으니 기사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지. 물론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마수에게 달려든 대공자의 잘못이 가장 크긴 하지만.

그런 상황이니 다른 귀족의 기사들도 미적거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마수들에게 미친 듯이 계속 시달려서 이곳이 징글징글하기도 했을 거고.

대충 상황을 알 만했다.

보름 넘는 지독한 사냥으로 신경은 온통 곤두서 있었을 테고, 중급 마수들까지 쉽게 공략하며 경각심은 바닥을 쳤겠지. 그런 상황에서 최후의 목표를 발견했으니 인내심 따위가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얼핏 들어봐도 그리 신중한 사람은 아닌 거 같으니 당장 처치하고 돌아갈 생각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나 보다.

“소영주님,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난 분명히 계속 경고했다고. 상급 마수는 중급 마수와 전혀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네. 맞습니다, 도련님. 백랑은 계속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한 건 그들이고요.”

그래, 따지고 보면 백랑만 탓할 문제는 아니다. 숲에서는 무조건 우리 말을 따르기로 했는데 무시한 그쪽이 잘못한 거였다. 솔직히 대공자가 합류한다는 사전 통보도 없었고.

뭐, 숲에서는 우리를 믿으라고 해놓고 뺑뺑이 돌린 건 우리 잘못이지만, 좀 피곤했을 뿐 그것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나 뭔가 돌아서 간다는 생각 정도는 했겠지만 확실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 그 정도면 됐다.

“부상은 나을 수 있는 거겠죠? 어깨가 으깨졌다는데, 팔을 절단해야 한다든지 하는 건 아니죠?”

“황도에는 대신전이 많습니다. 팔이 잘린 경우도 기부금만 왕창 투자하면 나을 수 있는데 어깨 정도야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물론 완벽하게 나아서 다시 검을 들려면 기부금이 많이 들긴 하겠지만…….”

“아, 그럼 됐어요. 흠.”

어쨌든 대공자가 트롤 짓을 해 많이 다쳤다니 보고서를 올릴 때 더 신경 써야겠다. 괜히 잘 해결된 일에 억하심정이 들어가면 우리 영지만 손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덕분에 올겨울에는 마수 걱정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니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그래요. 그건 뭐, 알았어요. 다른 문제는 없었나요?”

“응. 없었어, 소영주님.”

더 이상 문제는 없었다는 백랑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로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상급 마수를 어떤 식으로 사냥했는지 궁금해졌다.

“칸누라스도 상급 마수인데 피해 없이 잡은 건 대단하네요. 대체 어떻게 잡은 거예요?”

“그놈이야 상급 마수 중에서도 좀 약한 녀석이라 어렵지 않았어. 우선 흑웅이 선두에서 시선을 막 끌면서 교란하고…….”

“잠깐만요. 흑웅 님이 왜 나서요? 그쪽에도 흑웅 님보다 날랜 기사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마수의 시선을 끄는 아웃스탠더, 쉽게 표현하면 회피 탱커.

이 포지션은 대단히 눈에 띄는 역할이었다. 어쨌든 정면에서 마수와 맞서야 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러니 굳이 우리 영지의 기사가 그 역할을 맡을 필요가 없었다. 분명 자신도 출발 전에 최대한 튀지 말라고 부탁했었고.

“아,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들이 많이 지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들은 숲 속에서 움직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치기까지 했으니…….”

“허…….”

하. 그래, 그랬지. 우리 백랑 님께서 그놈들을 쓸데없이 뺑뺑이 돌렸고 덕분에 기진맥진.

아무리 느린 칸누라스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리단 거지 아웃스탠더를 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쌩쌩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요령껏 몸을 사렸던 영지의 기사들뿐이었을 거다.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백랑이 얌전히 있기 싫어서 수작을 부린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원래도 진중한 사람은 아니거니와 상급 마수와 싸우는데 구경만 하고 만족할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 인간, 이번에는 자기가 막타(?) 치려고 수작 부린 건 아니겠지?

“…그래요. 그래서요? 혹시 피니시는 백랑 님이 쳤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죠? 제가 튀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만약 그랬으면 제가 좀 짜증 날 거 같거든요?”

로빈의 말에 백랑은 극구 부인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무척 억울한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야. 설마 내가 그랬을까? 어차피 우리 도끼로는 그거 막타 치지도 못해.”

그래도 자기 말대로 조심은 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던 로빈은 이어지는 백랑의 말에 멈칫하고는 잠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막타는 당연히 폴 경이 쳤지. 캬~ 진짜 나도 이제 저런 장병기를 써야 할까 봐. 역시 멋있었어.”

“…폴 경?”

로빈의 부름에 움찔한 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 보니 그나마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나 보다.

다행히 저 뻔뻔한 백랑과는 조금 달랐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답지 않게 조금 초조해 보인다 했더니 그런 함정 카드가 숨어있었다.

믿고 쓰는 폴까지 자신을 배신(?)한 이 현실에 로빈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쪽 기사들이 많이 지쳐서 피니시를 넣을 여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다친 대공자 때문이라도 빨리 토벌을 마무리 지어야 했고요.”

그래, 정말 핑계는 좋았다.

앞뒤가 짝짝 맞아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아웃스탠더에 피니시까지 우리가 다 해먹었네요?”

“에이, 그건 아니지. 그쪽에서 계속 타격을 줬으니 그렇게 피니시 타이밍이 나온 거잖아.”

“과연 그쪽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눈에 띄는 건 우리가 다 했는데?”

“그거야, 뭐…….”

적당히 공을 밀어주고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

잘은 몰라도 상대가 머리만 급하게 챙겨간 이유 중에 왠지 저것도 끼어있을 거 같았다. 우리가 앞뒤로 다 해먹었다고 머리를 요구하면 그쪽에서도 난감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에게 머리는 별 가치 없는 물건이지만 어쨌든 마수의 전리품 중 으뜸은 머리가 맞으니 말이다. 피니시의 중요함을 떠올려보면 그게 그렇게 틀린 생각도 아니었고.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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