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려나. 예상치 못한 진행에 로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마법 사슬은 정말 괜찮은 물건이었습니다. 덕분에 쉽게 칸누라스를 잡을 수 있었고요.”
왠지 말을 돌리는 기분이었지만 의미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칸누라스가 좀 느린 면이 있지만, 힘만은 대단한 편에 속했는데 그런 칸누라스를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니, 확실히 좋은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히센 님께 말씀드려서 좀 알아보라고 해야겠어요. 견본이 있으니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는 좀 쉽겠죠. 어떤 수식이 사용되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좋게 생각하자, 소영주님. 어쨌든 덕분에 마수의 사체는 온전히 우리 것이 되었잖아?”
백랑의 말대로 상대가 모든 걸 다 놓고 머리만 챙겨가는 바람에 좋은 걸 얻긴 했다. 느리지만 방어력이 뛰어난 칸누라스의 특성상 가죽과 뼈 모두 상당히 고급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그래요.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요. 주노 님께 연락해서 황도의 분위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계속 알려달라고 하시고요. 진짜 보고서는 제대로 써야겠네요. 저쪽에서 불만 나오지 않게요. 특히 우리가 그쪽 힘 다 빼놓고 피니시까지 넣은 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 아시죠? 그렇게 뺑뺑이를 돌릴 거면 차라리 우리도 열심히 싸웠어야 했어요. 그거 잘 생각해 보면 너무 티 나는 행동이잖아요.”
“하하……. 뭐, 그건 그렇지. 물론 우리가 쌩쌩해서 마지막에 쉽게 잡은 것도 맞지만.”
아후, 말이나 못 하면.
어쨌든 막판에 설치는 바람에 우리가 그들을 지치게 한 후 마수를 독차지하려 했다는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그리고 왠지 진짜 그런 생각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저 백랑을 근신이라도 시키고 싶은데 왠지 집에 틀어박혀 두 마누라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즐거워할 거 같아 근신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겠다. 그건 또 배가 너무 아프니.
게다가 결과적으로 마수 본체가 다 영지에 남았다. 기껏해야 뼈의 일부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상당한 이익을 본 것이다.
진짜 보고서라도 제대로 써서 올려야 할 거 같았다. 양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가 다친 대공자를 빌미로 앙심이라도 품을까 걱정되었으니 말이다.
그냥 적당히 마수 사냥의 안내역을 자처하고 적당히 물자나 챙기려 했는데, 영지의 기사들이 버스 기사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돈은 돈대로 받고 아이템까지 챙긴 양아치 버스 기사 말이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고위 귀족의 기사들이 북방 영지에서 마수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대수림 내부에서 천 단위도 넘는 마수를 정리해 올겨울에는 마수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출처는 당연히 이번에 토벌대를 꾸렸던 귀족들이었다.
황실에도 로빈이 정성껏 꾸민 보고서가 도착했다. 고위 귀족들과 관련된 보고서라 당연히 룩센 대제도 확인하게 되었고.
룩센 대제는 자신의 신하이자 친우인 레오니스 공작과 함께 그 보고서의 살펴보고 있었다.
“허허. 이거야, 원. 귀족들이 정예 기사를 120여 명이나 투입해 대수림 일대의 마수들을 수천 마리나 소탕했고, 덕분에 겨울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군. 그리고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파견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사 인사를 올린다라…….”
“아무래도 이 건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압박할 수 없겠군요.”
“특히 그릭스 라이넨의 용맹이 돋보였다. 용맹한 그릭스는 상급 마수를 상대할 때도 두려움이 없었고, 덕분에 상급 마수를 별 피해 없이 처단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었다라…….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군신 간의 관계이긴 하지만 오랜 시간 친우로 지낸 둘은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조금 직설적이지만 허튼소리는 전혀 하지 않는 성품이라 룩센 대제도 레오니스 공작을 가장 믿고 있었고.
“개소리군요. 뭐, 원래 무모하고 대책 없는 인사라 상급 마수에게 겁 없이 달려들 수는 있겠지만 그가 토벌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런데, 왜 이런 보고서가 날아왔을까? 게다가 말끝마다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라니, 두드러기가 올라올 지경이야. 이건 숫제…….”
“공작가를 대놓고 빨고 있는 거죠. 그쪽에서 공작가에 뭐라도 크게 받았답니까?”
“하하. 그래, 맞아. 제법 받았다더군. 이번 토벌을 떠날 때 리아넨 공작 측이 뭔가를 엄청나게 싸들고 갔거든. 그런데 돌아올 때는 칸누라스의 머리만 달랑 들고 돌아왔어.”
“그럼 그 물자는 그대로 그쪽에 남았겠군요.”
“그랬겠지.”
정황은 확실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지 레오니스 공작은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그럼 결국 마수 머리를 팔았단 건데. 그레이츠 자작령에 그런 식으로 약삭빠르게 행동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예 그쪽으로 줄을 선 걸까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거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실의 초청에 응하지 않을 정도로 중앙 쪽에는 관심도 없는 자들이지. 그러니 당연히 그쪽에 줄을 설 이유도 없을 테고.”
“그럼 결국 받은 만큼 해준 거군요. 그래도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런 계산이 돌아가는 사람이면 황실의 초청을 그렇게 거절하기만 하진 않았겠죠. 이곳에 초대되어 오는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 지금까지 카인 그레이츠? 지금 영주가 카인 그레이츠라고 했지? 지금까지 그 녀석이 황도에 올라온 건 영주가 되었다고 보고할 때 딱 한 번뿐이더군. 솔직히 어떤 녀석이었는지 기억도 않나.”
“그렇군요. 솔직히 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 정도면 기억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닙니까?”
레오니스 공작의 솔직한 대답에 룩센 대제도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이 보고서를 올린 녀석이 로빈 그레이츠라고, 그레이츠 자작령의 소영주라는데 내가 알기로 이놈은 이제 겨우 일곱 살이거든?”
“…일곱 살이요? 이름만 올린 거 아니겠습니까?”
“글쎄. 그거야 모를 일이지만, 어이가 없긴 하군.”
“그런데 변방의 영지, 특히 5대 방벽의 영주들이 귀족파 쪽으로 넘어간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제국을 지키는 최선봉 같은 곳이라 정통성이나 명분 쪽에서 큰 변수를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하기라도 한다면…….”
“그래, 그렇지. 원래 그쪽 영지의 영주들은 전통적으로 황제만을 섬기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들이 넘어가면 좀 피곤하겠지. 게다가 제국을 지킨다는 명예를 등에 업은 자들이니 더 그럴 테고. 아, 물론 더럽게 가난한 영지들이라 영지민은 적지만 말이야.”
“그런데 너무 여유가 넘치시는 거 아닙니까? 이쪽 동태가 심상치 않은 거 같은데요. 설마 진짜 그레이츠 자작이 리아넨 공작과 손잡고 중앙으로 진출하게 되면…….”
“아아, 그래. 큰일이면 큰일인데 왠지 그건 별로 걱정이 안 되는군. 다른 곳도 아니라 그레이츠 자작령이라서 그런가?”
“뭔가 아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레오니스 공작의 물음에 룩센 대제는 이 보고서가 날아오자마자 혹시나 해 찾아봤던 자료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알 거야. 황실에는 따로 정리한 제국 귀족 명부가 있다는 걸. 그리고 거기에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귀족의 성격과 업적들이 가문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뭐, 빠진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돼.”
“그렇습니까?”
“제국이 천 년이나 이어져오는 동안 살았던 모든 귀족 가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보니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그레이츠 가문의 기록 역시 남아있었네.”
“그렇군요.”
“거기서 재미있는 걸 몇 개 봤는데, 그쪽 가문에서 영주로 취임하는 나이가 대략 몇 살인지 아나?”
“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전대 영주가 일선에서 물러서는 시점에 영주 직을 계승하니 빠르면 서른에서 느리면 마흔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런데 거기는 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이네.”
“네? 그렇게 빨리요? 설마 영주가 단명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소영주가 열다섯 살만 되면 무조건 영주 직을 넘겨버리는 거야. 영주는 은퇴하고.”
“네?”
“더 웃긴 건 이쪽 영주 일가는 첫 아이를 대단히 빨리 본다더군. 거의 성인이 되면 바로 결혼해서 아이부터 보는 거지. 원래 귀족들은 결혼을 빨리해도 아이는 늦게 보지 않나.”
“네,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아이를 빨리 보는 이유가 빨리 키워서 영주 직을 넘겨주기 위해서라네. 아이가 성인이 돼서 영주 직을 넘겨줄 때가 되면 전대 영주의 나이는 평균적으로 서른다섯에서 마흔. 다른 영지에서는 갓 영주가 될까 말까 한 시기에 이 영지에서는 은퇴하는 거지.”
“허……. 대체 왜 그런 거랍니까? 당연히 이유도 적혀있겠죠?”
“응. 영지를 오래 맡는 게 귀찮다는군. 괜히 일만 많다고. 재미있지 않나? 열다섯 살 아이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서른다섯의 전대 영주와 쉰다섯의 전전대 영주가 나들이를 즐긴다는 거야.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그럼 지금 영주로 있는 카인 그레이츠는…….”
“그래, 전대미문 격으로 오랫동안 영주 직을 역임하는 중이지.”
“흠.”
“한두 번, 혹은 세 번까지면 우연이겠지만 그게 천 년이면 그냥 원래 그런 거야. 게다가 지금까지 순혈로만 이어진 몇 안 되는 귀족가가 아닌가. 그러니 아마 지금 영주 직을 맡고 있는 그 카인이란 녀석도 죽지 못해 영주 직을 이어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원래라면 한참 전에 은퇴했을 나이니 말이야.”
“그럼 이번에 일곱 살짜리가 보냈다는 보고서도…….”
“그래. 그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으니 진짜로 잘 교육받은 일곱 살짜리가 올린 보고서일 수도 있어. 우리 페리안도 그 나이 무렵부터 국정에 참여했으니 말이야.”
감각적으로 낙관하는 룩센 대제, 하지만 레오니스 공작은 감을 믿기보다 자신의 계산을 믿었다.
늦어도 열다섯 살에 영주 직을 이어받은 아이가 중앙에 진출해도 뭔가를 할 여력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은근히 연륜도 따지는 곳이 아니던가.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만약 별종 중의 별종이 태어나 권력욕이 끓어올라 중앙에 진출한다고 해도 그 나이로 뭘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 그래서 걱정이 안 돼.”
“그런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런 보고서가 날아온 이상 더는 귀족들을 제재할 수는 없겠군요.”
“그게 좀 안타깝군. 한 1년만 더 묶어놨으면 했는데.”
“아직 확신이 없으신 겁니까?”
차기 옥좌에 대한 이야기.
아직 정정한 룩센 대제가 지금부터 황태자에게만 힘을 몰아준다면 아무리 귀족들이 설친다고 해도 3황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성격 탓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황제가 선택을 미루고 있어서 이런 일이 자꾸 생겨나는 거였다.
그러니 내심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는 레오니스 공작도 조금 답답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최우선은 황제였으니 그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녀석에게 조금만 독심이 있었으면 이런 걱정은 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셋째 녀석이 조금만 현명하든지. 둘 다 조금씩 마음에 안 드니 나도 답답하군. 그래도 둘을 굳이 비교하라면 첫째이긴 한데…….”
“둘째 황자님은 여전하시겠죠?”
“그 녀석이야 그냥 기사지. 그래도 황제가 되는 형제에게 충성한다니,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뭐, 그건 그렇군요.”
그나마 평민 출신의 어미를 둔 2황자는 황위에 관심이 없어 귀족들이 두 갈래로만 나누어져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황비 역시 권력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두 편으로 갈려 싸우게 되면 힘이 강한 쪽이 자연스럽게 상대를 압도해 내전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좀 두고 보자고. 둘 중 누구라도 황제의 자질을 보이는 쪽으로 결정할 테니.”
“뜻대로 하시옵소서, 폐하.”
“뭐, 그전에 너무 나대는 귀족들은 적절히 견제해야겠지만 말이야. 그걸 자네가 해줘야겠어. 그래서 자네를 이렇게 다시 불렀네.”
괜히 자신이 풍파라도 일으킬까 싶어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는 레오니스 공작을 룩센 대제가 이렇게 다시 청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약소 귀족 가문 출신인데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전 황후 소생의 황태자보다 고위 귀족 출신이면서 현 황후를 어미로 둔 3황자 쪽으로 귀족들의 눈길이 너무 집중되는 걸 막아 최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어차피 이번 일로 다시 귀족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다른 대책을 생각한 것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그래. 좋아, 어쨌든 그 귀족들은 다시 황궁으로 불러들여야겠군. 참 피곤하겠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