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 *
로빈이 보고서를 황궁에 제출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명의 고위 귀족에게 내려진 근신형이 철회되었다. 당연히 그들은 바로 황궁으로 복귀하게 되었고.
하지만 바로 세력을 구축하려던 리아넨 공작은 생각지도 못한 레오니스 공작의 갑작스러운 입궐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정계에 관심이 없는 거인, 레오니스 공작이 입궐했다는 건 황제의 복심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고, 그가 황태자를 지지하면서 현 황후와 리아넨 공작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궁 내 눈치싸움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로빈이 넘긴 보고서나 변방의 일은 결국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고위 귀족이나 황제 모두 그쪽으로 관심사가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지가 가진 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리아넨 공작을 칭송하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귀족파에 붙어 중앙으로 진출하려 한다는, 그가 들었으면 학을 뗄 의심을 받았던 로빈은 그들이 돌아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뒷말이 없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런 무지가 로빈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밖에서 영지를 볼 때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영지의 위치가 너무 달라서 그런 거였으니 말이다.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영지의 인사들조차 그런 것에는 다 무관심했고, 심지어 소설에서도 변방 영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았으니 그가 알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래도 좀 폈지만 원래 더럽게 가난한 변방 영지였으니 로빈의 상식으로는 그 위치 또한 바닥이겠거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로빈이 그레이츠 자작가가 매년 황실에서 초청받는다는 사실이라도 알았으면 좀 달라졌겠지만 그런 초대에는 관심도 없는 카인이 초대장이 올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놓기만 했으니 그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훗날 정식으로 영주가 되면 알게 되겠지만 그건 아직 좀 남은 이야기였다.
그나마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건 외부인이 히센과 도리아, 그리고 지온 정도였다.
지온은 마무리 단계인 남쪽 마을 정비, 그리고 로빈이 은근히 부탁했던 우버 마을의 도크(Dock) 문제 때문에 요즘 만나기도 힘들 정도였다. 덕분에 보고서도 로빈 혼자 작성해야 했고.
도리아와 히센은 실비아를 가르치고 모야족의 주술과 마법 사슬을 연구하느라 각자 바빴으니 이 문제로 조언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과거의 기록이 남아있어 룩센 대제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귀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 변방에는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친 대공자의 문제로 트집을 잡는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영지의 전력을 과대평가해 자신들을 그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거나, 그레이츠 자작령과 고위 귀족 세력 간의 담합을 의심해 룩센 대제가 견제하기 시작했으면 상당히 피곤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로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는 그냥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귀족들은 자기들 일로 바빠 변방 영지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잊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주노가 전해준 황도 소식을 듣고 귀족들이 앞으로도 눈치싸움과 줄타기에 집중하며 조용할 거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었다.
확실히 중앙의 상황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역시 중앙은 자기네들끼리 지지고 볶고 해야 제 맛 아니겠는가.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레오니스 공작의 입궐 소식이었고.
“헤… 이분이 이때부터 등장하는 거였구나.”
레오니스 공작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고,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의 늦둥이 막내딸이 황태자비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특히 이쪽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미인 레니아 레오니스 공녀가 어떻게 생겼을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했으려나? 열 살이라… 적당한 시기이긴 하네. 분명 빡세게 굴렸다고 했었지?”
소설에서 황태자는 레오니스 공작에게 검술을 배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레오니스 공작 딴에는 그의 독심을 키우기 위해서 더 엄격하게 굴었던 건데 1회 차에서는 결국 실패하긴 했었다.
황태자 형이 또 은근히 뚝심이 있어서 거칠게 훈련하면서 질책받는 정도로는 독심이 생겨나기는커녕 스승에 대한 존경심만 솟아났으니 말이다.
강렬한 뒤통수와 함께 칼침 정도는 맞아줘야 독심이 생겨나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이 시간 덕분에 딸내미가 황태자비가 되고, 훗날 황후까지 되니 레오니스 공작의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 본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레오니스 공작이 입궐했다는 건 그들의 기세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의미했다.
그게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으니 부디 이쪽으로 불똥만 튀지 않기를. 작년처럼 느닷없이 마수 토벌을 한다고 설쳐대면 솔직히 좀 민폐였다.
“그럼 제련 장인은 물 건너간 건가? 하, 이래서 물건을 받기 전에 돈부터 주면 안 된다니까.”
일이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약속했던 장인을 보내달라고 하기가 좀 껄끄러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요청하기도 전에 리아넨 공작이 먼저 장인을 보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셈이라 기분은 좋았지만 좀 얼떨떨하긴 했다.
“응? 진짜 뭐지? 리아넨 공작, 이 사람 혹시… 호구인가?”
“귀족이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니 지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음, 그런가요? 이름이라……. 그게 뭐라고.”
이쪽 세계의 귀족이란, 참…….
원래 높은 자리에 있으면 상황이 바뀔 때마다 안면 몰수하고. 적당히 구라도 좀 쳐주고. 사기, 탈세는 기본인데……. 이곳에서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거국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인 귀족이 한 놈 있긴 했지만 그건 그놈이 유별난 거였고.
그러고 보니 이번 토벌에 동참한 네 명의 귀족 중 그놈도 포함되어 있긴 했다. 배알이 꼬여서 뭔가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모두 함께하는 토벌이라 일이 커질까 봐 그냥 포기했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상급 마수를 온전히 챙긴 게 또 은근히 뿌듯했다.
“어서 만나봐야겠어요.”
어쨌든 장인이 왔고 지금은 단순히 소개를 받은 것뿐이니 우선 만나서 계약을 해야 했다. 그가 거절하고 그대로 돌아가도 우리로서는 하소연할 곳이 없었으니 속단은 금물인 거고.
그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봤는데.
“새로운 소재를 연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연구 이외에 다른 일을 맡기신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오로지 새로운 소재에 대한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법 솜씨는 있지만 새로운 제련법과 신소재에 목말라 있는 장인.
대충 대화를 해봐도 리아넨 공작이 왜 이 사람을 이곳에 보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뭔가 한이 맺혔는지 새로운 것만 찾으면서 다른 일은 다 나 몰라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작업을 강제해 봤자 능률이 나올 리가 없으니 껄끄럽긴 했을 것이다. 게다가 풍기는 분위기도 뭔가 벽창호 같은 게 말도 잘 안 통했을 테고.
하지만 그런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마수 뼈를 제련하는 것 외에 다른 작업을 맡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 열정이면 뭔가를 해도 확실히 하겠지.
게다가 이름도 왠지 대장장이의 정석 같은 스미스였다. 뭔가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은 이름이었다.
“대신 작업에 성공하면 다른 장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주세요. 혼자 알고 계시지만 말고요. 조건은 그것뿐입니다.”
혹시 나중에 기술을 독점할까 걱정되어 노파심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로빈은 훗날 제련에 성공해도 이 기술을 독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널리 알려 더 많은 사람이 마수 뼈로 만든 무기를 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야 훗날 사람들이 입을 피해가 줄어들지 않겠는가?
로빈이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거국적 위기 시에는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예전에 사장된 걸 보면 왠지 널리 알려질 것 같진 않았지만 어쨌든 바람은 그렇다는 거였다.
새롭게 영지에 합류한 중년의 대장장이 스미스는 로빈이 건네주는 비전서를 받아들고 연구를 시작했다.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성과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일인 만큼 로빈도 당연히 저 사람만 믿고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저런 장인이 다섯 명은 있어야 그나마 믿을 만하지.”
로빈의 장인 수색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새로운 장인을 구하기는 요원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또 퀘스트 창이 잠잠하네.”
바쁜 일을 대충 처리하고 한가해지자 문득 떠오른 것인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퀘스트는 처음에 나온 켄트의 비리를 찾는 것과 실비아를 살리는 퀘스트뿐이지 않은가. 특히 언리페어 용병단 관련한 퀘스트가 나왔던 건 어이없기까지 했다. 대체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
솔직히 모야족을 살리는 일 정도면 퀘스트로 나올 만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 정도면 A+급 퀘스트 정도로 말이다. 인류의 보배(?)이자 영지의 보물인데 너무 취급이 박했다.
“그건 그냥 린의 퀘스트로 퉁 친 건가?”
린의 히든 퀘스트가 S급이었고, 린을 제대로 관리하려면 모야족의 생존은 필수적이었으니 그럴싸한 예상이지만 어쨌든 예상은 예상일 뿐이었다.
“그래, 아예 안 나오는 게 차라리 속 편하긴 하지. 앞으로도 이렇게만 지내자.”
오늘도 한가롭게 하루를 보낸 로빈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날들이 이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 * *
그렇게 별일 없이 빠르게 3년이 지났다.
3년의 세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발전하는 그레이츠 영지의 3년은 더욱더 그랬고.
우선 남쪽 모야족 마을이 완벽하게 정비되었고 서쪽 우버 마을의 항구가 완전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각 마을 간 도로까지 넓어졌으니 영지의 기틀은 완전히 다진 셈이었다.
로빈도 3년간은 더 이상 일을 늘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들을 다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로빈 자체는 제법 한가한 3년을 보냈다.
일은 원래 아랫사람들이 하는 거였고, 영지 전체를 조율하는 지온과 월령, 그리고 각 마을을 다스리는 지온의 친구들이 제 일을 알아서 착착 해결하니 로빈이 특별히 할 일은 없었던 거였다.
오히려 이 시간만큼은 공장 쪽 일에 전념한 카인보다 로빈이 더 여유 있게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카인이 심혈을 기울이던 공장이 완공되었다.
이번에 완성된 것은 의복 공장이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공장에 댈 재료를 생산하는 사람부터 직접 의복을 제작할 사람들까지 상당히 많은 인력을 소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장이었다.
이제 영지 내 토목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시 새 일터를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장이 적절한 시기에 완공되어 다행이었다.
사람들의 변화는 더욱 두드러졌다.
우선 영지의 중요 인물들이 각자 알아서 제 짝을 찾아가고 있었다.
히센은 결국 주술사 쌍둥이와 화촉을 밝혔다. 예전부터 분위기가 그랬으니 솔직히 짐작 못 한 바는 아니었다.
누가 먼저 고백하고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식도 올리지 않고 뭐가 급한지 신방부터 꾸미더니 지금은 알아서 잘 살고 있었다.
덕분에 히센의 영구 고용이 확정되었다. 모야족인 쌍둥이가 황도로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뭐, 알아서 코가 잘 꿰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확실히 나쁘지 않은 결합이었다.
“히센 님은 모야족의 바보들이랑은 완전히 다른 분이죠. 뇌가 섹시한 분이라고 할까요?”
“응응, 지적인 남자가 좋지. 말도 잘 통하고. 밤마다 짐승처럼 변하는 건 또 반전 매력이라니까.”
아무래도 쌍둥이는 단세포에 가까운 모야족 남성보다 지적이고 아는 것 많은 히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능력에 비해 여자 운이 없었던 히센이 어렵게 얻은 짝이니만큼 잘 살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쌍둥이에게 동시에 기를 빨려야 한다니. 아무리 히센이 지금까지 모은 파워(?)가 대단하더라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 드려야 하려나?
그리고 로빈이 예상하지 못한 커플이 둘 있었다.
바로 지온-월령 커플과 루이-월연 커플이었다.
아예 같이 지내다시피 하는 지온과 월령.
서로 마음이 맞아 보였으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옛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던 지온이 재혼을 택했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