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물론 이쪽 세계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떠난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도 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사별의 경우 대부분 1~2년 사이에 재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온은 무려 4년도 넘게 혼자 살았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늦은 편이기도 했고.
어린 실비아마저 아빠는 아빠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고 좋아할 정도였으니 원래 이쪽 세계의 흐름이 어떤 식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
다만 이 커플의 유일한 문제는 가끔 일하다가 불이 붙어 찐한 연애를 즐긴다는 거였는데, 단순히 꽁냥꽁냥이 아니라 하앜하앜~ 수준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아 로빈으로서는 참 난감했다. 그나마 부모님처럼 공개적으로 하앜~ 하지는 않으니 참을 만은 했지만.
그리고 진짜 어이없었던 루이와 월연 커플.
이 둘은 모야족 여궁수들이 영주 성 쪽으로 단체 훈련을 나오면서 알게 된 사이인데 처음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루이는 단체 훈련이 있을 때마다 병사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불만이었고, 월연은 월연대로 항상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루이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렇게 시작된 악감정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폭발해 결투까지 가게 되었다.
월연도 훌륭한 전사였지만 이미 완숙한 경지에 이른 루이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루이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는데.
다만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깨진 것은 또 처음이라 충격받은 월연이 루이에게 계속 재도전하기에 이른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격돌이 있었고 총 열 번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월연이 결국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모야족 내에서 여전사랑 결투할 때는 승패를 가르는 선에서 적당히 마무리 짓는다고 한다. 그쪽의 풍습상 완전히 발라(?)버리게 되면 그 여자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인데, 그렇게 처절하게 승부를 내는 경우는 혼인 결투뿐이라니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혼인 결투에서 상대를 완벽하게 무너트리는 건 ‘이제부터 넌 내 것’이라는 의사 표시라나?
하지만 누구를 상대해도 무조건 최선을 다해 짓밟아버리는 고지식한 루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냥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패배한 후 승복한 월연은 그날부터 루이에게 끊임없이 구애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걸 구애라고 할 수 있을까?
아예 그녀 스스로가 저를 루이의 것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었으니 구애라기보다는 모야족스럽게 마누라 행세를 했다고 표현하면 그나마 정확할 것이다.
주인님이란 호칭을 패시브로 장착하고 육탄 돌격을 불사하니 감히 누가 감당하겠는가.
처음에는 당황하던 루이도 내막을 알고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저항했지만 가졌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라며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월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뭐, 그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예전에 루이가 월아에게 끝내주는 엉덩이라고 했던가? 월연 역시 그쪽 혈통이라 그런지 만만찮은 엉덩이의 소유자였으니 루이 역시 손해는 아닐 것이다. 폴도 당차면서 실력까지 겸비한 월연을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고.
그러고 보면 월(?)가 세 자매가 각각 모야족 족장과 영지의 재무관, 그리고 치안대 대장을 품었으니 참 대단한 혈통이었다.
자매가 한둘만 더 있었으면 베갯머리송사로 영지를 지배했을지도?
그리고 주노의 배에 탄 선원들도 모두 영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4년 가까이 영지와 황도를 오고 가며 우버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아예 이곳에 뿌리내리는 선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 결국은 그렇게 된 것이다.
배를 탄다지만 겨우 왕복 14일의 짧은 항해였고, 아주 안전한 항로였으며 대우도 좋아 그들이 이곳에 뿌리내리지 않을 이유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 뒤에는 주기적인 항해를 위해서는 선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주노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아이들의 3년은 어른들의 3년과는 또 달랐다.
이제 성장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든 린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겨우 1년 차이지만 올해부터 성장기에 들어가는 실비아와는 키가 한 뼘이나 차이 날 정도였다.
물론 로빈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보다 10센티미터 정도는 더 큰 린을 올려다보며 굴욕에 몸을 떨고 있었다. 물론 남자인 자신이 나중에는 더 커질 거라고 애써 위안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 차이가 나니 굴욕적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린이 키만 자란 것은 아니었다.
실력 또한 빠르게 늘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제 겨우 열한 살이 된 소녀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솜씨였다. 게다가 처음 로빈이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으니 참 대단한 재능이긴 했다.
물론 그것도 린이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최고 전사가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노력이 성과가 있었는지 그녀의 타이틀에도 변화가 생겼다.
흑표범의 몸놀림(UC)이 흑표범의 강인한 육체(R)와 흑표범의 놀라운 탄력성(SR)으로 발전한 것이다.
검술에 대한 타이틀이 생기지 않은 건 조금 아쉬웠지만, 신체 능력의 발전은 저렇게 타이틀로 나타나고 있었으니 저 정도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민첩성을 나타내던 타이틀이 체력이나 근력 쪽으로 선회한 건 정말 큰 발전이었다.
지금처럼 계속 발전하면 나중에는 진짜 폴처럼 대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에셋과 비슷한 무기인 린지애를 들고 마수에게 피니시를 날리고 다니겠지.
“주인! 덤벼! 이번에야말로 내가 귀여워해주겠어!”
가끔 저런 소리만 안 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됐어, 이년아. 저리 가!
다음은 세이라.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이벤트는 바로 집안의 귀염둥이 세이라의 각성이었다.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끔 헛웃음이 터져 나오곤 한다.
아버지 윌리엄의 조각 같은 외모와 어머니 세릴의 귀여움을 모두 이어받은 귀여움을 결정체 세이라.
물론 네 살 후반부터 훈련으로 아이들의 두목(?) 자리에서 물러난 린 대신에 혈통의 힘으로 은근히 아이들을 휘어잡으며 로빈의 걱정을 사기도 했지만, 그녀가 여전히 귀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섯 살이 된 세이라는 예전에 로빈이 그렇듯 각성의 시기를 겪게 되었는데 사실 가족 모두 별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츠 가문 대대로 특별한 능력자가 탄생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인과 마리아나, 그리고 로빈 역시 마찬가지인데다 그 위 세대로 올라가도 그렇다니 기대감이 바닥을 친 것이다.
다만 그래도 기대한다면 세이라의 생모 세릴이었는데 폴의 핏줄을 이은 세릴은 제법 가능성 있는 여기사였다니 검술에 대한 재능 정도는 조금 기대할 수 있으리라.
아니면 아버지 윌리엄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거나.
그렇게 별 다른 기대 없이 시작된 세이라의 각성.
모두 모여 그녀의 각성을 기다리던 가족들은 드디어 등장한 세이라의 모습에 모두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는데.
그건 그녀 주변에 반딧불처럼 작고 영롱한 빛 덩이들이 춤추듯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세이라 주변에 떠다니는 형형색색의 빛 뭉치들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묘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빠! 오빠! 엄마! 이거 봐! 너무 예뻐!”
그녀는 마냥 신기한 듯 빛 덩이를 어루만지는데 빛 덩이들은 마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듯 그녀의 몸속으로 하나둘씩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빛 덩이가 그녀의 몸속에 흡수될 때까지 가족들은 할 말을 잃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이름: 세이라 그레이츠
성향: 천진난만. 단호. 직설적
타이틀: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하, 이런 미친. 저게 뭐야!?
로빈은 세이라의 상태창을 열람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의 가문에 저런 천재(?)가 탄생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이 빛 무리를 본 것이 가족들만은 아닌지 저 멀리서 폴과 루이, 그리고 히센과 도리아까지 뛰어오고 있었다.
“분명해. 이건 마나의 축복이야! 세상에, 저걸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다니.”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는 히센.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런 현상을 마나의 축복이라고 하는데 각성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기적인 재능이란다.
다른 재능의 유무에 따라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마나적 재능만은 최고 등급이라는 뜻인데.
와. 세상에, 우리 가문에서 저런 재능충이…….
잠깐, 아니지. 그게 아니구나.
세이라의 재능에 감탄하던 로빈은 자신이 깜빡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깨닫고 말았다. 바로 세이라가 그레이츠의 피를 이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세이라가 그레이츠라는 성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머니 마리아나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레이츠의 피가 섞인 아이는 아니었다.
데릴사위인 윌리엄과 작은어머니 세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지 않은가. 윌리엄과 세릴, 그리고 마리아나가 모두 그레이츠라는 성을 쓰고 있어서 잠시 잊은 것이었다.
에이, 그럼 그렇지. 이 피가 어디 가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로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레이츠 가문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세이라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아이는 분명한 모양이었다.
실비아를 제자로 둔 도리아는 한발 물러나 있었지만, 직전 제자가 없는 히센과 세이라를 다음 세대의 기사단장으로 키우고 싶어 하는 폴이 그녀를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니, 마나의 재능이 충만한 아이지만 우선 여자아이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마법 공학을 배우는 것이 현명한 거지. 칼을 쓰다니, 그건 너무 위험해.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영지의 마법 갑옷이나 관문의 마법진을 손볼 수 있는 마법 공학자가 필요하지 않겠나?”
아니, 적어도 40년은 더 사실 거 같은데요?
“세이라는 제 뒤를 이어 영지의 수호신이 될 겁니다. 세릴도 어렸을 때부터 검을 사랑해 기사가 되었고, 세이도 그 피를 이었으니 당연히 검술에도 재능이 있겠죠. 물론 이 아이도 그걸 더 원할 테고요.”
물어보지도 않고 단언하시면…….
물론 허풍과 날조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대립하니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세이라조차 정확하게 한 가지를 선택하지 못했다.
“어떠니? 마법 공학을 배워 보지 않을래? 검을 드는 것만이 영지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신기한 물건도 많이 만들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단다.”
“헤~ 정말요? 재미있겠어요!”
아니, 세이. 네가 뭐가 부족해서 돈이란 말에 그렇게 눈이 동그래지는 거니?
내가 널 그렇게 키웠니? 아……. 그렇게 키웠구나.
로빈이 갓난아이였던 세이라를 돌볼 때 가난하던 영지를 한탄하며 돈, 돈, 했던 것이 무의식중에 남았는지 돈이라는 말에 눈이 동그래진 세이라의 모습이 그를 절망시키기도 했고.
“세이, 영지의 수호신인 기사단장으로 사는 건 정말 영광된 일이지. 모두에게 존경받는 자리고. 마법 공학자가 되면 항상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해야 하는데, 네가 그런 걸 쉽게 버틸 수 있겠니? 린 언니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면서 무예를 익히고 영지와 도련님을 지키지 않으련?”
“오, 좋을 거 같아요!”
재능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오빠인데, 다섯 살 꼬맹이인 네가 날 지키겠다고 하면…….
로빈으로선 오빠인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말에 눈빛이 달라진 세이라의 모습에 왠지 모를 수치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는데.
어쨌든 이렇게 세이라가 모두 좋을 것 같다고 달려드니 결판이 안 나는 것이었다.
히센과 폴의 대립이 격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카인이 나서게 되었는데.
“아직 어리니 우선 둘 다 해보게나. 나중에 더 마음에 드는 쪽으로 선택하겠지.”
카인도 이렇게 결론 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배우게 되었는데 세이라를 노리던 두 남자도 입맛을 다시며 우선 수긍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적어도 기회는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이라의 선택은 결국 검술이었다. 마나의 축복을 받아 마나를 다루는 데에는 능숙하지만, 이해력이 부족해 마법 공학을 배우는 건 조금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아버지도, 작은어머니 세릴도 그쪽으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물론 부모와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세이라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니까.
그렇게 마법 공학을 포기할 때 히센의 우울한 표정이란 정말. 솔직히 지금까지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히센을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