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하지만 역시 아이를 키우는 게 뜻대로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세이라를 기사단장으로 기르려던 폴도 그녀가 장병기가 아니라 세검 두 자루를 선택하자 낙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수를 사냥하는 이곳 영지의 기사단장에게는 필수적인 무기가 장병기인데, 그녀가 그런 거병을 쓰는 것에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각성 이후 2년간의 훈련을 통해 알게 된 것도 그렇고, 시간이 지날수록 근력 쪽보다는 민첩성이나 순발력 쪽이 두드러지는 상황이니 그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다만 자신의 외손녀에게 기사단을 맡기고 싶었던 폴만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폴이 세이라보다는 린을 더 주시하고 있었다. 가르쳐보니 린의 재능이 생각보다 대단한데다가 거병을 다루는 센스 역시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이라에게 기사단을 물려주는 것에서 린에게 기사단을 물려주고 세이라와 린이 함께 상급 마수를 잡는 것으로 플랜을 바꾼 것이다.
날렵한 세이라가 아웃스탠더를 맡고 린이 피니시를 맡으면 그건 그거대로 그림이 나왔으니 노려볼 만은 했다.
그리고 그런 걸 제쳐둔다면 세이라는 정말 천재적인 아이였다.
로빈은 세이라를 볼 때마다 전설급이라고 예상되는 (L)급 타이틀의 위용을 몸소 느끼곤 한다. 마나를 깨우치긴 했지만 사용하는 것에는 애로 사항이 많은 자신에 비해 세이라는 그야말로 마나를 손발보다 더 자유롭게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족한 체력과 근력을 순간순간 마나로 대체하며 치고 빠질 때는 정말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의심될 정도였다.
저 정도면 발군의 신체 능력과 상당한 마나적 재능을 겸비한 린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데, 대체 왜 세이라는 등장인물이 아닌 걸까?
훈련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강단도 있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것 같은데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이곳 영지 자체가 특별히 두드러지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인 건가?
순간순간 지나가는 소설의 작은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라서 뭐라고 단언할 순 없었지만 세이라가 소설 속 중심인물이 아닌 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보지 못한 뒷부분에 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끝까지 다 본 것도 아니잖아?
요즘에는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빠! 오늘은 나랑 한 판 붙자!”
요것이나 저년이나 참…….
쪼렙 잡고 놀면 기분 좋으냐? 어?
세이라가 린이랑 붙어 다니더니 점점 안 좋은 것만 닮아가고 있다. 저것만 아니면 참 좋은 동생인데 말이야.
그리고 실비아.
이제 열 살이 된 실비아는 아직도 많이 자라지는 못했다. 부쩍 키가 자란 린에게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는지 식사량도 늘리고 잠도 많이 자고 있지만 사실 이제 겨우 성장기에 들어간 거라 당분간 저 차이는 계속 유지될 거 같았다.
다만 물약 제조 능력만은 빠르게 늘고 있는지 요즘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물약을 들고 와 로빈에게 진상(?)하곤 했다.
로빈의 체질에 맞췄다는 전용 정력제나 정확한 목적을 알 수 없는 체질 개선제 따위가 그것이었는데, 도대체 저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는데다가 건강에도 은근히 좋은 물약이었고 심지어 맛까지 괜찮아 거절하진 않았지만, 이제 이런 것보다 더 의미 있는 걸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나마 대단한 건 정력제인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로빈의 체질에만 맞춘 거라 다른 사람은 먹을 수 없다니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히센을 위한 정력제라도 만들라고, 요 녀석아.
이제 겨우 열 살인 내가 정력제를 얻다 쓰냐? 요거 설마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듀발.
듀발은 요즘 모야족 마을로 내려가서 지낸 지가 꽤 되었다. 사실 세이라랑 린이 로빈에게 엉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은근히 동네북으로 살던 듀발이 없으니 대체품으로 로빈을 선택한 것이니 말이다.
물론 예전에 잠깐 상상했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내려보낸 건 절대 아니었다.
이제 열세 살이 되어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할 정도가 된 듀발.
하지만 그는 린처럼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정식으로 기사가 되기 위해선 많은 실전을 겪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내려보낸 것인데.
물론 내려간 김에 모야족 전사들의 임기응변과 자유분방함을 조금이라도 배워 오면 좋을 거 같긴 했다.
아, 그러다가 진짜 백랑 같은 녀석이 돼버리면 또 곤란한데. 설마 거기까지 가진 않겠지?
기본적인 성격이 있으니 아마 그 정도까지 막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 그렇게까지 물들어 온다면……. 뭐, 어쩌겠나, 백랑 탓일 테니 그를 혼내줘야지.
그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백랑이 가장 싫어할 만한 우버 마을이나 북쪽 방벽 아래 에보니 마을로의 파견을 고려해 봐야겠다.
몇 년 정도 마누라 없이 한번 살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어쨌든 이제 열세 살인 듀발은 제법 사내 티가 났다. 제법 자란 린보다도 한 뼘은 더 컸으니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린과의 정면 대결에서 자꾸 밀리는 게 더 안습하긴 했지만.
대체 듀발은 언제쯤 린을 이기려나? 듀발이 발전하는 만큼 린도 발전하고 있으니 그건 또 무리일까?
하긴 그보다 나중에 세이라에게까지 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역시 재능충이 아니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병들.
모야족 마을 공사 현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던 용병들은 그 뒤 바로 우버 마을 도크 점검 현장으로 파견되었고, 그 뒤로는 공장 건설 현장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일했다.
그리고 결국 공장의 건설이 완료되는 순간 모든 죗값을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이제 이쪽 방면의 전문가들이 된 릭스터를 포함한 일꾼 100여 명은 그냥 그대로 모야족 마을에 눌러앉았다. 어차피 능력 있는 용병들도 아니었고 칼밥 먹으면서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평온하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우선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 혼 래빗 사육장과 모야족 마을을 오가며 지낸다는데 릭스터는 존, 그리고 백랑과 짝짜꿍이 맞아 아예 존이 일하는 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릭스터는 모야족 처녀 하나를 낚아채 가족까지 꾸리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설명한 릭스터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그의 반짝이는 대머리였고.
반짝이는 릭스터의 두상이 매력적이라서 결혼한다니, 대체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하긴 모야족은 모든 모발의 힘이 눈썹 위로만 솟구치는 신비의 부족이라 대머리가 없다니 릭스터가 좀 신기하긴 했을 것이다. 로빈도 털이 눈썹부터 위로만 난다는 모야족의 비밀(?)에 신기함을 감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이유로 결혼은 좀…….
차라리 이 소설답게 그의 화려한 혀 놀림에 반했다, 그의 자존심이 내 몸 깊숙한 곳에 꼭 맞아 들어 잊을 수가 없었다, 후벼 파는 손가락 기술이 환상적이었다… 이랬으면 차라리 이해했을 것이다.
하긴 꼭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릭스터만의 매력이 있었던 거 아니겠어?
로빈은 이렇게 생각하며 겨우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히센이 주술 문양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마법 사슬의 재현까지 성공적으로 끝낸 것에 비해 마수 뼈를 제련하는 일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덕분에 장인 스미스마저 낙담하고 실망한 모습을 숨기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단순히 비전서를 넘겨주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나 보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장인을 알아봐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고 영지의 장인들도 지금까지 바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낙담하던 스미스가 이제 겨우 기운을 차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 진득하게 기다려보는 수밖에.
이제 영지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장인들도 여유를 찾았으니 이쪽으로 투입해야겠다. 머리를 맞대면 뭔가 좋은 수가 나오긴 할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 백랑이 말했던 루터카우의 사육장.
이건 성공이라고 하기는 좀 부끄럽고, 그렇다고 실패했다고 하긴 또 애매한 상황이었다.
물론 우여곡절 끝에 루터카우 몇 마리를 생포해 오기도 했고, 히센의 마법 부여로 튼튼하고 거대한 목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먹이는 리퉁으로 충분한데다가 루터카우는 혼 래빗처럼 서식지를 가리지도 않아 번식의 문제도 없는 상황.
이 정도만 들으면 완전히 성공한 것 같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우선 사육장에서 루터카우가 자라고는 있지만, 도축할 때마다 전투를 벌여야 하니 이놈들을 외부에서 사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혼 래빗처럼 성장이 빠른 것도 아니었고.
결국 사육장을 만든 노력에 비해 득 되는 게 별로 없었다.
어쨌든 만든 사육장이라 그냥 먹이나 주면서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 루터카우 사육장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바로 예비 전사들이나 어린 전사 후보생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대수림에 들어가지 않고도 마수와 싸우는 연습을 할 수 있다나? 심지어 앞으로 개체 수가 늘어난다면 남자들의 성인식이나 예비 전사의 징표로 루터카우 뿔을 뽑아오는 시험을 치르겠단다.
그나마 다행인 건 루터카우는 뿔을 뽑아도 죽지 않고 서서히 뿔이 다시 자란다는 거였다.
개체 수가 늘어나면 주기적으로 뿔을 뽑으며 예비 전사들도 훈련하고 활의 재료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육장을 만드느라 사용된 마법 재료보다 대단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뿔을 한 수천 개 정도 뽑으면 또 모르겠지만.
로빈이 백랑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앞으로도 계속 루터카우를 사냥해 와 언젠가는 수천 개의 뿔을 모으고 말겠다고 큰소리쳤다. 물론 로빈은 뿔이 다 자라는 데 대략 1년쯤 걸리니 그 정도를 모으려면 한 100년쯤 걸리겠다고 비웃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이었다.
카인이 지금까지 벼르고 벼르던 바로 그날.
정식으로 영주 직위를 로빈에게 넘겨주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남몰래 공장 건설을 자신의 마지막 업적으로 생각했던 카인은 그동안 로빈이 영지 일을 처리하는 걸 계속 지켜봐 왔다.
3년 전 대수림 토벌 건도 여러 물자와 마수까지 챙기며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고 그 뒤로도 작고 소소한 일들마저 무리 없이 해결.
그 모습을 지켜보며 드디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어차피 큰일도 거의 없는 영지니 조금 일찍 넘겨줘도 별문제 없겠다고 말이다.
하긴 예전 몇 년이 이상하게 바빴던 거지, 원래 이 영지는 마수 범람만 아니면 최근 3년처럼 한가로운 게 정상이었다. 그러니 로빈이 몇 년 빨리 이어받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카인은 이렇게 생각하며 가족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알리게 되었다.
가족들은 대부분 카인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니고, 그동안 로빈이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걸 보고 곧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아주 어린 나이의 로빈에게 발언권을 줘 왔던 것도 가능하면 빠르게 영주 직을 계승시키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그래요, 아버지. 이제는 좀 쉬셔야죠.”
“장인어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로빈도 물론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는 자신이 영주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한가하지만, 그때가 되면 이런저런 일들이 급격하게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소영주로서 옆에서 훈수를 두는 것보다는 그래도 영주인 것이 대처하기 나았다. 만약 동생이 있어 그가 영주가 되면 자신이 윗사람이니 차라리 훈수 두기도 편했겠지만, 할아버지가 영주라면 그가 고집을 부릴 경우 그걸 제지하기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이 영주가 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여동생인 세이라가 태어나는 순간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 모두가 그러라고 하니 기분이 좀 묘했다. 원래 이곳의 영주 직 승계가 빠르긴 하다지만 아무리 빨라야 열두 살, 웬만하면 성인식을 치른 후 영주 직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카인조차 열다섯 살 때 영주 직을 이어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고작 열 살인 자신에게 영주 직을 넘기려 하다니.
뭔가 좀 억울한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적어도 열두 살까지는 기다려주시는 게……. 제가 너무 어려 다른 사람들이 가볍게 볼까 걱정이에요.”
열두 살이 되면 원작이 시작되니 그때가 딱 적당했다. 게다가 이제 공장도 완공되어서 카인이 다시 업무를 볼 테고 자신은 2년간의 마지막 휴가(?)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하지만 카인의 대답보다 마리아나의 대답이 더 빨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