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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81화 (81/303)

81화

“어머, 로빈. 그럴 리가 있겠니. 영주 성의 관리라고 해봤자 다 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잖니. 그런데 누가 널 무시하겠니.”

“그거야…….”

솔직히 그건 그랬다. 만약 자신이 무시당할 정도였으면 지난 3년간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지만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의 수도 몇 되지 않았다. 솔직히 제대로 된 관리라고 해봤자 지온과 월령, 그리고 지온의 친구들뿐이니 참 빈약한 스쿼드(?)이긴 했다. 물론 예전에는 이 정도조차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 정도 핑계로는 어림도 없나 보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무려 35년간이나 영주 직을 지키고 계셨지. 이젠 좀 쉬게 해 드려야 하지 않겠니? 우리 로빈은 똑똑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야.”

로빈도 35년이라는 말에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35년이라니까 너무 길어 징글징글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2년을 더 놀기보다 영주 직을 이어받아 할아버지의 어깨를 가볍게 해 드려야겠다. 오죽하면 저분들이 어린 자신에게 영주 직을 밀어 넣으려고까지 하겠는가?

“에휴, 그래요.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이니 그냥 제가 해야죠.”

“그래, 잘 생각했어.”

“그래, 로빈. 고맙구나. 이제 나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어.”

“그래요, 아버지. 이제라도 연애도 좀 하시고 그렇게 여유롭게 사세요.”

“원, 녀석도. 다 늙어서 무슨 연애냐? 하지만 공장도 지었고, 로빈이 영주가 된다고 생각하니 후련하구나.”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보니 좀 이상했다.

지온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재혼이 너무나 당연시된다고 하던데, 도대체 영주이신 할아버지는 왜 지금까지 홀로 계셨던 걸까?

그게 무슨 법칙도 아니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거지만 이상한 건 이상한 거였다.

“어머니 때문에 너무 오래 혼자 계셨잖아요? 왜 그런 약속을 하셔서…….”

그리고 이어지는 마리아나와 카인의 대화에서 대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카인의 아내, 그러니까 로빈의 할머니는 대단히 자상한 분이었다고 한다. 단아한 외모에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포근한 분위기까지. 그분은 그야말로 할아버지 카인과 천생연분이었고 결혼 후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단다.

그렇지만 몸이 약하신 할머니는 딸 마리아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내가 하늘에 대고 약속했지. 무조건 그녀의 피가 섞인 아이로 가문을 이어 나가겠다고 말이야.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했으니 무조건 지켜야지.”

그러니까 카인은 재혼 후 새로운 부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게 두려워 재혼하지 않은 거였다. 만약 남자아이가 태어난다면 무조건 그 아이가 차기 영주가 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피가 섞인 아이가 영주 직을 이어받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끙…….”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대단한 사랑? 순정? 집착? 아니면 고지식함?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혈통과 혈연 따위가 대체 뭐라고 저러는지, 솔직히 로빈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 보면 귀족 사회에서는 그런 것도 엄청나게 따지는 거 같았다. 다 부질없는 것이거늘.

게다가 더 어이없는 건 그 리아넨 공작도 자신이 약속한 걸 지킨다고 장인을 보내오더니, 할아버지 카인도 자신이 약속한 말을 지키기 위해 긴 세월을 홀로 보냈단다. 그때 지온도 리아넨 공작은 당연히 그래야 했다고 말했었고.

사실 로빈은 상황에 따라서 약속 따위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뻔뻔하게 굴 자신이 있었다. 그깟 명망이나 체면 따위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왠지 분위기를 보니 이쪽 세계에선 귀족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대단한 문제가 되는 거 같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자신도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어리기도 했고 그저 소영주에 불과했지만, 만약 영주가 되면 자신이 그레이츠 자작의 지위까지 이어받아 명백한 귀족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자신의 상식과 좀 다르니 한번 자세히 알아보긴 해야겠다.

아니, 예전에 힐데 후작은 사기 칠 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 않았나? 설마 자신의 거짓말을 알고 있는 녀석은 죽었으니 상관없다는 건가?

와, 그 힐데 후작 놈은 진짜 대단한 양아치였구나. 속은 놈이 바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쪽 세계가 그런 분위기라면 대충 이해는 갔다.

“어쨌든 그녀의 피를 이은 아이가 무사히 영주가 되었으니 그걸로 됐어. 하하하.”

자신에게 영주 직을 넘겨준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하긴 마음속에 아직까지 그런 짐이 남아있었다면 영주 직을 하루라도 빨리 넘겨주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가문 특유의 귀차니즘 역시 한몫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로빈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큰일도 없을 테니 2년 정도 먼저 영주가 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원작이 시작되기 전에는 뭐, 최근 3년처럼 그렇게 무난하게 흘러가겠지. 마수 뼈 제련이나, 영지의 전투력을 더 올릴 방법이나 고민하면서 그렇게 지내야겠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지 상당히 귀찮은 문제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로빈이 영주에 취임한 첫날.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회의장에 모여들었다.

지온과 월령, 그리고 폴처럼 항상 같이 영지 일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물론, 히센과 백랑, 주노, 그리고 루이처럼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참여하는 사람들과 존과 릭스터처럼 이곳을 처음 방문한 자들까지 있었다.

성가신 안건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어 로빈이 모두 부른 거였다.

“지온, 그러니까 윤락가가 필요하다고요?”

어이없게도 로빈을 기다리던 안건은 윤락가와 직업여성(?)에 대한 안건이었다.

예전, 그러니까 용병들이 난리를 부린 후, 로빈은 지온에게 사창가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 들을 수 있었다.

단순히 외부인을 위무하고 금전적 이익을 얻는 목적 외에도 외부인들에게 소소한 정보를 얻거나 다른 귀족들과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밀담, 밀서를 나눌 때도 사창가 쪽을 창구로 이용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방문객도 거의 없는 이곳 영지에서는 불필요한 장소였다. 자신들이 다른 귀족들과 음모를 꾸밀 일은 더더욱 없었고.

다만, 타지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거나 영지의 동향 정도는 알아두는 게 낫겠다 싶어 그 일을 존에게 맡겼고, 지금은 존의 동생들, 그리고 릭스터를 따르던 녀석 중에 넉살 좋은 놈 몇이 각 마을 술집에서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솔직히 이 영지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온이 이번에 정식 안건으로 건의해 이렇게 회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게 갑자기 올라온 안건은 아닐 거 같은데, 할아버지도 아시는 일인가요?”

“네, 몇 개월 전부터 카인 님께 건의를 드렸습니다. 사안이 사안이라 어리신 영주님께서 처리하기는 좀 곤란할 거라 생각해서…….”

“그런데 그게 밀렸나 보네요? 결국 저한테 다시 왔잖아요?”

“카인 님이 그런 건 아무래도 앞으로 영지를 다스릴 영주님이 처리하는 게 맞겠다고 하시면서…….”

“음……. 그건, 후~ 알 만하네요.”

아니, 할아버지. 이런 식으로 태업을 하시면…….

당장 급한 사안은 아니고 당장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상당히 번거로울 거 같은 문제.

카인이 싫어할 만한 일이긴 했다. 완전 말년 병장 같은 포스의 카인이었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지금 카인은 새로 장만한 마차에 아이스박스 같은 작은 보관 창고를 싣고 아버지 윌리엄과 우버 마을로 떠났다. 대물을 잡아 온 가족이 매운탕과 회로 잔치를 벌이자고 하시면서 말이다.

얼핏 봐도 본격적인 해피 라이프가 시작됐다는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영주로서의 첫 업무가 하필이면 사창가에 대한 거라니.

솔직히 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필요하다면 해야지.

“뭐, 좋아요. 이게 왜 필요해요? 지금까지 없어도 잘만 살았잖아요?”

물론 예전보다 외부인이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다는 건 존의 보고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창가를 따로 조성해야 할 정도인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아예 자체적으로 생긴다면 굳이 막을 생각은 없지만 이곳의 사창가는 이름만 사창가고 거의 공창 수준으로 영주가 관리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한 마음은 정말 귀찮다는 거였다.

“그건 제가 말씀드려야겠군요.”

바통을 이어받은 건 바로 주노였다.

“사실, 지금 황도 쪽에서 혼 래빗 식품에 대한 수효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뭐, 아는 사람들만 아는 물건이지만 조금씩 입소문을 타는 중이죠.”

“혼 래빗 식품은 또 뭐예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혼 래빗 육포입니다.”

“그게 왜요? 판 적도 없지 않나요? 아, 팔긴 했구나. 요즘 가끔 옆 영지에서 사러 오긴 했죠? 그런데 그게 왜 황도에서…….”

“그러니까, 그 발단은 예전 토벌 때 영지를 방문했던 기사들과 그릭스 리아넨 대공자인데요.”

이제는 영지에서 다 소화할 수 없을 지경인 혼 래빗 고기.

워낙 생산량이 대단하고, 가죽을 황도에 납품해야 하는 관계로 꾸준히 도축되고 있는 혼 래빗 고기는 상당량 육포로 말려 보관하고 있었다. 이 육포는 기본적으로 병사들이나 기사들이 원정을 떠날 때 전투 식량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마을마다 충분한 양이 비축되어 있었고.

기본적으로 육포 같은 놈들은 1년 정도밖에 보관할 수 없고 마법의 도움을 받아도 2년 정도가 한계였기 때문에 보관한 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주변 영지로 싸게 판매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 품질과 가격이 만족스러워 주변 영지들도 흔쾌히 사가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혼 래빗에 대하여 알려지는 것이 조금 걱정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걱정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혼 래빗 자체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발견한다고 해도 수많은 마수를 뚫고 산 채로 무사히 잡아오는 건 더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만약 대수림의 생태계가 완전히 엉킨 그해가 아니었으면 모야족이라도 혼 래빗을 무사히 잡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었으니 아마 다른 곳에서도 이놈들을 잡아오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 영지의 사육장에서 잡아가는 거였는데 숨을 곳도 없는 뻥 뚫린 개활지에 수십 명의 전사가 번갈아 지키는 사육장에서 거의 돼지만 한 혼 래빗을 몰래 잡아가는 방법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어떻게 혼 래빗을 구한다 해도 몇 달을 그냥 풀어놓고 집을 지을 시간을 줄 여유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설령 그렇게 사육에 성공해도 모야족의 주술 창고가 없으면 절대 먹을 수 없는 놈이었다.

만약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사육에 성공하면 자신들처럼 가죽 정도는 팔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요즘은 지혈제로 쓰는 뿔도 제법 팔리니 그것도 의미가 있을 거고.

하지만 이 가죽의 가장 큰 거래처는 바로 군부였다.

변화를 그리 반기지 않는 완고한 집단인 군부에서 굳이 같은 물건을 거래처를 바꾸면서까지 거래할까? 물론 다른 귀족들에게 팔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경쟁이 붙으면 금전적인 손해는 좀 볼 수 있겠지만 이미 영지에서 해야 할 것들은 다 했고, 공장까지 지은데다가 비축해 놓은 자금도 제법 되니 크게 상관없었다. 고기 덕분에 식량 사정도 엄청 좋아졌고 말이다.

게다가 앞으로 원작이 시작되면 혼 래빗 말고도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이 제법 있었으니 혼 래빗은 제 몫을 이미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주노의 말을 들어보니 혼 래빗 육포의 붐(?)은 3년 전 있었던 그 토벌로부터 시작된 모양이었다.

당연히 3년 전에도 혼 래빗 육포는 기사들의 전투 식량이었다. 2주로 계획된 상급 마수 토벌 역시 많은 짐을 들고 들어갈 수 없어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육포로 식사를 대신했었고.

그리고 그곳에서 먹었던 특별한 육포를 아직도 잊지 못한 모양인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고기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수의 고기라고 당당하게 말하긴 좀 그랬으니까.

다른 영지도 처음에는 마수의 고기로 만든 육포라는 이야기에 살짝 당황하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그랬다는 거다.

게다가 상대는 공작가의 대공자, 그리고 정예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몰라도 대공자에게 마수 고기를 대놓고 들이미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였다.

아마 그냥 몸에 좋은 특별한 고기라는 정도로만 소개했을 것이다. 그때가 이게 무슨 고기인지를 따질 만한 그런 상황도 아니라 가볍게 넘어갔을 테고.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갑자기 그렇게 인기가 올라간 거예요?”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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