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세상이 세상이라 알몸의 여자나 여자의 성기, 혹은 남자의 힘을 상징한다면서 귀두 따위를 그려 넣을까 봐 노파심으로 전달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폴은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문양은 영지의 문장으로 통일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그게 가장 나아 보여서요.”
영지의 문장이라.
귀족 가문은 각자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레이츠 자작가의 문장은 성벽 위에 검 한 자루가 박혀있는 문양이었다.
제국을 지키는 성벽이자 첫 번째 검이라는 의미라나?
비슷한 문장이 많아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눈에 거슬리는 모양도 아니었다.
그 정도면 적당히 괜찮을 것 같았다. 기사들이 새기기에는 의미도 나쁘지 않았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행히 주술 문양에 대한 것까지 마무리되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마라톤같이 이어지는 회의에 로빈은 지치기 직전이었고.
“이거……. 제가 영주가 되자마자 이상하게 안건이 많은 거 같은데요.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요? 혹시 노린 건 아니겠죠?”
회의를 마무리 짓고 나가는 길에 로빈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붙였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
뭔가 찔리는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 설마 당분간 계속 이런 생활이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 카인은 분명 일이 별로 없을 거라고 했는데 신전 건을 해결하고 배를 만들려면 아무래도 신경 쓸 것이 많아 보였다. 혼 래빗 농장도 확실히 점검해야 했고.
이래서야 언제 마수의 뼈로 된 무기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은 지쳤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가 잡아온 생선으로 매운탕이나 끓여달라고 해야겠다. 솔직히 누가 봐도 수고를 많이 했으니 오늘 정도는 어머니도 얼큰한 탕을 흔쾌히 허락하실 것이다.
얼큰한 탕으로 답답했던 속이나 풀어야지.
만약 아니라면? 바로 삐뚤어질 생각이었다.
이제 내가 영주라서 겁날 것도 별로 없…….
아, 물론 등짝 스매시는 빼고. 그건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아팠다.
다음 날도 회의의 연속이었다.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몇 가지 놓친 부분이 있기도 했고 어제 연락했던 봉사의 교단에서 바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생각해 보고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그날 바로 날아온 전언은 그 내용조차 조금 충격적이었다.
“…지부를 내는 게 아니라 아예 본거지 이쪽으로 이전하겠다고요?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왜 그렇게까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동 인구가 엄청나 수익조차 알짜배기인 황도를 버리고 기껏해야 뜨내기들이나 들르는 이곳으로 이주할 만한 이유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 고민하자 그럴듯한 이유가 떠오르긴 했는데.
아, 설마 벌써 시작된 건가? 환락가 대통합이?
황도 환락가를 지배하게 될 여걸, 로즈.
일명 브릴리언트(Brilliant) 로즈. 손님들은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만 동업자들이 부르는 호칭은 전혀 달랐다.
바로 페이탈(Fatal) 로즈였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한 살소를 머금고 움직일 때면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 나가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
단검 두 자루를 기가 막히게 다룬다고 했던가?
이분이 황태자 형보다 여섯 살이 많았으니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건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갈 만한 나이라는 뜻도 된다.
황태자가 귀환한 후 아카데미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 로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일이었다.
그러면 그때가 기껏해야 2년 후.
그때 이미 로즈는 환락가의 반을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한창 충돌이 계속되는 중일 것이다. 물론 황도 수비대가 두 눈을 치켜뜨고 지키는 중이니 대놓고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은밀하게 진행되는 밤의 전쟁 전부를 그들이 막을 순 없었으니 말이다.
로즈라…….
로즈는 소설에서 나름대로 인기 있는 캐릭터였다.
황도 최고의 유흥업소 브릴리언트 캣을 운영하며 황태자에게 알짜배기 정보를 계속 제공하기 때문에 출연 비중도 상당히 높았고 첫 등장 자체도 제법 임팩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황태자는 정보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회귀하자마자 자신만의 정보통을 가지기 위해 그 대상을 물색하다 로즈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단신으로 브릴리언트 캣에 쳐들어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로즈를 굴복시키는데.
무력으로 황태자를 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그를 유혹해 같이 뜨거운 밤을 보내게 되지만 사실 그건 그녀의 계략이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암살 포지션을 잡기 위해 그를 유혹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사정하며 쾌락에 몸을 떠는 그 순간을 노려 회심의 한 수를 날리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인 황태자에게 그런 계략이 통할 리가 없었고 당연히 바로 제압당한다.
그리고 그 뒤?
칼침과 배신 트라우마를 제대로 자극당한 황태자는 그야말로 극대로(大怒)해서 밤새 그녀를 수도 없이 잔혹하게 농락하며 그야말로 자박꼼(X지를 박으면 꼼짝 못 해)이라든지, 내아못(내가 아니면 못사는 몸으로 만들어버릴 거야)을 시전해 완벽하게 불복시키고 말았다.
그 후에는 완전히 복종하며 황태자의 충실한 왼팔이 되었고 훗날 네 번째 부인까지 된다.
그때 그 난폭하고 강압적인 신이 참 짜릿하고 자극적이었지. 덕분에 로즈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고.
솔직히 로빈도 로즈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했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미모만을 따졌을 때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황태자의 부인들이 다 그런 수준이지만 로즈는 연상의 매력이 물씬 풍겨오는 농염한 스타일이라 더 궁금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로빈이 본 미녀라면 월가의 세 자매랑 예전에 잠깐 봤던 하워드의 동생 세나 정도였는데 얼마나 차이가 날까 호기심까지 생겨났다.
물론 그중 으뜸은 단연 월아였고.
“영주님?”
“아아, 아니요. 흠흠. 그래요. 어쨌든 이쪽으로 완전히 이주하고 싶다는 거죠?”
상념이 너무 길어지며 잠시 멍청히 있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이거야, 원. 영주 체면이.
어쨌든 떠오르는 건 이 정도였다.
지금 황도 상황이 생각보다 거칠게 돌아가긴 하는가 보다. 생각보다 시기를 잘 잡았다고 해야 하나?
교단의 특성상 로즈에게 항복하거나 그 반대편에 몸을 맡기며 굴복할 수는 없을 테니 끝까지 버티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든지 했을 텐데, 만약 조용히 사라졌으면 생각보다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이런 작은 곳으로의 이주도 불만 없이 받아들일 테니 영지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물론 정확한 사정은 그들에게 직접 들어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곳도 교단인데 성기사가 있긴 한가?
하긴 성기사가 있다 해도 교세가 많이 위축되었다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황도의 환락가에서 버티는 건 무리일 것이다.
본단이라.
그러면 신전은 어떻게 할까?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그냥 우버 마을 쪽으로 넘겨야 하려나?
그리고 그때.
사랑과 봉사의 여신을 섬기는 교단의 신전을 건설하라.
부지가 넓을수록 보상의 등급이 상승한다.
보상: ???
페널티: ???
기한: 신전의 완성
오랜만의 퀘스트였다. 게다가 아주 간단하고 쉬운 퀘스트.
왠지 이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온순해진 거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 이 녀석아. 앞으로도 이 정도만 하자.
중요도 C면 아무래도 영지에 영향을 주는 퀘스트인 모양인데 옆에 +가 붙어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더 중요한 퀘스트인 것 같았다.
솔직히 모르면 몰라도 저렇게 버젓이 보상의 등급을 논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웬만하면 소박하고 작게 지을 생각이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생각부터 바꿔야 했다.
그나저나 넓은 부지라…….
“본단은 아무래도 영주 성 쪽으로 하는 게 좋겠네요. 그리고 우버 마을에는 계획대로 지부를 설치하고요. 손이 두 번 가게 되었는데 괜찮을까요, 지온?”
“네. 그 정도라면……. 대신 새로운 배의 제작은 한동안 미뤄 둬야 할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이곳까지 먼 길 오는 사람들을 박하게 대접할 수는 없으니까요.”
퀘스트가 저렇게 나와버렸으니 우버 마을로는 무리라고 판단한 로빈은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들을 황무지에 떨어뜨려놓을 수는 없으니 그나마 넓은 부지를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영주 성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레이츠 자작령의 영주 성은 인구수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한창 번성했을 때를 기준으로 크게 확장한 외성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예전에 건설한 공장의 건물 자체는 외성 안에 위치시킬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덕을 좀 봐야겠다.
어쨌든 영주 성이면 각 마을 간의 거리도 가장 가까웠으니 교세를 확장하기도 좀 더 수월할 것이다. 이 작은 영지에서 교세를 확장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릭스터, 당신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한데요. 예전에 그 건설조 사람들은 지금 뭐 하고 있나요?”
로빈은 이제는 아예 공병대급으로 대우받는 릭스터의 용병들부터 찾았다. 역시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속 편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릭스터의 부하들이 하는 일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존의 부하들과 함께 술집에서 일하든지, 아니면 모야족 마을에서 혼 래빗과 관련된 잡무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릭스터, 이번에도 부탁 좀 할게요.”
“아이고, 영주님. 부탁이라니요. 그저 명령만 내리십시오.”
이 사람도 은근히 영지 사람이 다 되었다. 기사급인 주제에 소심한 성격 탓에 전투보다 이런 일을 더 좋아하는 거 같고.
첫인상은 서로 껄끄러웠지만 뭐, 못 고쳐 쓸 거 같은 사람들을 적당히 잘 고쳐 쓴 셈이니 나쁘지 않다고 할까?
사실 신전이라고 해봤자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런 웅장한 신전을 지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황도에 위치한 생명의 교단이나 전쟁의 교단의 본단은 그렇게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거야 그 교단이 그야말로 끗발 날리니까 그럴 수 있는 거고 그 외의 교단은 대부분 그냥 넓은 예배당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황도의 환락가 끝자락에 위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봉사의 교단이 그런 걸 바랄 리는 없었고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부지를 넓게 써 크게만 지어야겠다.
특히 대수림에서만 자생하는 단단한 흑목을 사용하면 나무로 된 집이라도 더욱 크고 단단하게 지을 수 있었으니 그걸 사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
분명 선박 건조를 위해 벌목해 놓은 흑목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지?
“백랑 님, 모야족 장정들의 손을 좀 빌려야겠는데요. 흑목을 좀 날라주세요. 그리고 그쪽은 지금도 놀고 있죠? 신전 짓는 데 장정들도 좀 빌려주시고요.”
“흑목이면 배 만든다고 벌목해 놓은 거 말이지? 그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 근데 영주님, 물론 일은 하겠지만 우리도 노는 건 아니거든. 다 하는 일이 있다고.”
“네, 뭐. 아이 만드는 일 하고 쌈박질하는 것도 일이긴 하죠. 어쨌든 그 쌈박질은 잠시 멈추고 영지 일부터 좀 도와주세요?”
“끙, 알았어.”
모야족은 참 생산적인 일과는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자기네들끼리 단련하면서 훈련만 거듭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원래부터 전사가 되는 것이 모든 남성의 목표인 곳이니 그걸 강제로 막기도 어려웠다. 대수림처럼 불안한 환경이 아니라 마음 놓고 훈련만 하는 건데 혼 래빗 사육장이 아니었으면 저 사람들이 먹고사는 것도 제법 피곤한 문제가 되었을 거다.
다만 그 덕분에 예비 전사들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전사들도 간간이 늘어나고 있었고.
심지어 요즘은 여성들마저 제대로 된 궁수가 되기 위해 훈련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아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여유가 생겨 아이들마저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먹고 자고 싸고 훈련하고 밤에도 싸고. 이런 생활의 반복이었으니 아이가 늘어날 수밖에.
로빈이 농담 삼아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레이츠 영지의 베이비 붐은 모야족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원래부터 아이가 많은 곳이었는데 새로 태어난 아이들까지 성장하면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이룰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새로 지은 남쪽 마을 요새의 규모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인구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나도 문제없었으니 이 기회에 인구가 늘어나는 게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었고.
그런 전투 민족인 모야족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손을 빌려야 할 거 같았다. 현재 영지에서 유일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