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에테 지역의 농경지 정비가 마무리된 이래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주 성 근처의 사람들은 공장에 납품할 옷감 소재인 르베리나와 레페소의 재배에 한창이었고.
게다가 놀던 사람들마저 곳곳에서 자라는 리퉁을 채집해 혼 래빗 사육장으로 배달하느라 바빴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그 많은 혼 래빗을 수월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저런 작업이 생각보다 중요했으니 말이다. 영지에서 혼 래빗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것도 확실히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영주 성에 이름은 신전이지만 사제들이 거주할 주거지를 조성하고 우버 마을에는 신전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윤락 업소인 것을 건설하기로 했다.
터만 닦고 자세한 이야기는 주노가 그쪽 사람들을 데려온 후에 해야겠지만 우선 빠르게 시작한 것이다. 서로 급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 * *
회의를 마친 로빈은 백랑과 존을 조용히 불렀다.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당부할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 앞으로 영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텐데 외지인이 자주 드나들 우버 마을의 동태를 더 자세히 살펴주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네, 영주님. 이 기회에 아예 거주지를 우버 마을로 옮길 생각입니다. 가족들도 다 같이요. 몇 년이나 주말 부부로 지냈더니 이게 또 마음이 안 편하네요.”
몇 년 동안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존도 이제는 가족들과 다시 합가(?)할 생각인가 보다. 하긴 이 정도면 오래 나가있긴 했지.
“잘 생각했어요. 부인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큰 여관을 차려 드릴게요. 아예 부인이랑 같이 운영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외지인들이 늘어나면 그곳에서 묵는 사람들도 늘어날 테니 관찰하기도 편할 거고요.”
“네, 감사합니다. 동생들도 몇 명 모아야겠군요.”
“어쨌든 부탁할게요. 그리고 백랑 님, 우버 마을에 그 신전이 들어오면 아마 옆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할 거 같아요. 물론 자신들을 보호할 성기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원래 그런 곳에는 파리들이 들끓잖아요? 은근히 진상 같은 놈들도 있을 수 있고요. 제 체면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보호해 주세요.”
“음… 그거야 그렇지. 그럼 교대로 전사들을 파견하도록 할게.”
“은근히 모야족이 지킬 곳이 늘어나네요. 혼 래빗 농장도 그렇고요. 웬만하면 영지 치안대 쪽에 맡기려고 했는데 거기는 또 거기대로 일이 늘어나버려서요.”
우버 마을로 이어지는 대로의 끝에는 타 영지에서 그레이츠 영지로 들어오는 제법 큰 관문이 있었다.
남쪽 관문이라고 불리는 영지의 경계선.
지금까지는 당연히 이곳을 그냥 방치했었다. 어차피 영지로 오는 사람도 없으니 굳이 신경 쓰지 않은 것인데, 상황이 변해 영지에 방문객들이 늘어나면 이곳을 확실히 관리해야 했다.
영지에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들어서는지 검문하고, 늘어난 상인들 때문에 도적이라도 나타나면 그걸 토벌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치안대였다.
로빈은 루이에게 명해 치안대의 일부와 모야족 예비 궁수들을 그곳에 상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렇듯 근무지가 한 군데 늘어나는 바람에 우버 마을의 신전까지 그들에게 맡기는 것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확실히 일이 늘어나니 일손이 달리긴 하네요. 대수림과 사육장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모야족이 해줘야 할 일은 다 해주는 건데요.”
“에이. 지난 3년 동안 배부르게 잘 놀았잖아. 덕분에 전사들도 제법 늘었어. 거기에 투입하는 건 충분하지. 그리고 혼 래빗 사육장에서 일하는 게 어디 일하는 건가? 그냥 노는 거지. 이놈들이 거기에 가기만 하면 완전 술판이야. 아주 골치가 아프다니까.”
“그래요? 그럼 당분간은 좀 쪼아주시겠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쪽에 대한 공작이 늘어날 수도 있거든요.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끔 자신이 못 가지는 건 남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또라이들이 있어서요. 미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이제는 그쪽의 방비도 주의해 주세요. 요즘도 가끔은 도둑이 든다면서요?”
“응. 영주님.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이 기회에 방만한 분위기를 좀 잡긴 해야지.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8년 동안 다들 너무 고생이 심했어. 그래서 좀 풀어준 건데 몇 년 푹 쉬었으니 이제 다시 제대로 해야지.”
맨날 사고만 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런 면에서는 나름 철저하다. 마냥 실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백랑이 알아서 하기로 했으니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요, 백랑 님. 그건 알아서 해주시고요. 그리고 신전에서 진상 짓하는 놈들은 영주의 이름으로 그냥 패버리세요. 하는 일은 그렇지만 거기는 어쨌든 신전이니 좀 강압적으로 나가도 괜찮아요. 솔직히 기부금 조로 내는 돈이면 거의 꽁씹 즐기는 수준인데 그따위로 나오면 재미없죠. 사제들의 안전은 무조건 최우선으로 해주시고요. 말 안 듣는 놈들은 그냥 체포하셔도 좋아요. 체포하면 바로 영주 성으로 보내주시고요.”
우리는 체면 때문에 신전까지 짓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제들을 데려와 앞으로 보호까지 해야 하는데 서비스를 이용하는 놈들이 진상 짓이라도 하면 가만히 둘 수 없지.
솔직히 저 신전이 들어오면 다른 교단의 지부를 세우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 아직도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고까지 친다면? 바로 분노의 응징을 받으리라.
“흐흐. 꽁씹이라고? 영주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은근히 재미있네. 이제 다 컸다, 이거지?”
“끙, 다 크긴요. 이제부터 크는 건데요. 어쨌든 그건 그렇게 해주세요. 아, 그런데 거기로 가면 타지인과의 접촉도 빈번할 텐데 그건 괜찮나요?”
“응, 이젠 뭐. 영지민들하고 어울려 산 것도 몇 년 됐잖아? 슬슬 적응하고 있는 거 같아. 생각보다 사람들이 우호적이라서.”
“당연히 우호적이어야죠. 해주는 게 얼만데요.”
남쪽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는데다가 혼 래빗 사육장까지 만든 모야족.
솔직히 지금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영지민이 드물 정도였다. 다들 한 번쯤은 그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슬슬 영지의 다른 마을로 시집가는 모야족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었고.
다들 가서 아주 잘 살고 있다나? 영주 성으로 들어와 사는 월령, 월연, 그리고 쌍둥이 주술사들만 봐도 확실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는 거 같았다.
물론 영지 화합 차원에서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아, 맞아. 아마 영주님에게도 나름 의미 있는 소식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예전에 그랬잖아. 흑웅이가 선물 하나 할 수도 있겠다고.”
“응? 아아, 그랬죠. 하도 예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요?”
예전에 얼핏 지나가는 소리로 백랑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3년도 넘은 일이라 로빈은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뭔가 있긴 한 모양이다.
“하하. 흑웅이가 드디어 대전사가 되었거든. 부족에서 대전사가 탄생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경사야, 정말.”
“음?”
대전사라. 솔직히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부족의 대전사는 백랑 아닌가?
“대전사요? 그건 뭐예요? 백랑이 대전사 아니었어요?”
“아아, 설명이 부족했네. 난 최고 전사이자 족장이고 대전사는 좀 다른 개념인데…….”
대충 들어보니 모야족의 대전사는 제국의 마스터와 비슷한 개념인 모양이었다.
마스터.
이곳도 판타지에 기반을 둔 세계였기 때문에 당연히 마스터란 게 존재했다. 물론 다른 판타지 소설에서처럼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무쌍 하는 그런 존재와는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이곳의 마스터는 자신의 역량을 모두 끌어올린 후 그걸 초월한 기사를 의미했다.
사람인 이상 잠재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 도달하면 성장이 정체되거나 단련을 게을리하면 퇴보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하지만 극한의 경험과 훈련, 그리고 운이 따르면 그 수준을 돌파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스터였다. 쉽게 말하면 자신의 한계를 확장했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렇게 한계를 돌파하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도 그걸 느낄 수 있다는데 그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또 미묘한 면이 있었다. 그렇게 마스터가 된다고 무조건 엄청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잠재력 40인 기사가 있다고 치자.
녀석이 마스터가 되기 전, 극한까지 수련하면 40의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걸 초월해 마스터가 되면 40+의 능력은 갖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60의 잠재력이 가진 녀석이 최대한 수련하면 60의 능력치를 가지게 되는데, 이 40+가 60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40+인 녀석은 40인 녀석을 압도하고 잘하면 50인 녀석까지는 비벼볼 만하지만 60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으니, 이 마스터라는 개념도 상당히 거품이 끼어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흑웅의 잠재 능력 차제가 얼마나 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무예를 중시하는 제국에는 제법 여러 명의 마스터가 있었고 그들은 그들의 무위 수준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무예를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손꼽히는 강자들을 제국 8검이라는 다분히 중2스러운 칭호로 부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대단한 고수들임은 분명했다.
“흑웅이 마수 범람 때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운이 따랐는지 마수 범람을 마치고 뭔가 실마리를 잡은 모양이야. 그래서 계속 실전을 겪을 수 있게 마을에 남긴 거고.”
흑웅이 단순히 부족민들과 같이 살고 싶어서 그곳에 남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실전이라. 확실히 실전이 중요하긴 하지. 당시 남쪽은 개활지로 이어져 있었으니 아무래도 북쪽 방벽에서 지키는 것보다는 실전을 겪기 수월했으리라.
“그러다가 3년 전 상급 마수 사냥에서 아웃스탠더로 나섰잖아? 그때 완전히 가닥을 잡은 모양이야. 그 후 작년까진 겨울마다 아예 대수림에서 살았지. 그러더니 드디어 자신의 한계를 완전히 돌파했어.”
확실히 그때의 경험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상급 마수와 정면으로 싸우면서 긴장에 긴장을 거듭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백랑도 가메라랑 그렇게 대치하지 않았었나?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백랑은 왜 아직 그대로지?
백랑 저 인간도 다른 건 몰라도 수련은 엄청 열심인데 대체 무슨 차이인지 생각은 좀 해봐야겠다.
“좋은 일이긴 한데요. 그래서 무위는 어느 정도 수준이에요? 백랑하고 비교하면 어떤가요?”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는 백랑과 폴이었다.
물론 둘의 전문 분야가 조금 달라 정확하게 누가 우위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그 둘이 가장 강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예전에 흑웅이 폴과의 대전에서 패배를 인정하기도 했었고.
대인전 전문인 흑웅이 대마수전 스페셜리스트 폴에게 패배를 인정한 것이니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아마 자신의 한계점에 거의 도달해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단련하고 있지만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니 거의 확실했다.
그러니 흑웅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음……. 단순히 싸우면 내가 필패지. 그 녀석이 용병치고는 우직한 면이 있어서 정직한 편이지만 그래도 신체 능력 자체가 달라졌거든.”
“흠.”
영지의 기사들을 여러 가지 속임수로 농락한 것이 흑웅인데 그가 순진하다니, 대체 이 모야족은 어떻게 싸우는 걸까?
진짜 대놓고 침을 뱉거나 흙이나 모래를 뿌리면서 개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이건 훗날 확인해 봐야겠다. 왠지 궁금해지네.
어쨌든 백랑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할 정도로 강해진 모양이다.
이건 진짜 대단한 선물이네. 백랑과 폴 말고도 대단한 무기가 하나 늘어난 셈이니 정말 좋은 선물이었다.
이게 자신이 영주가 된 기념으로 준비된 선물이라면 완전 성공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정말 기뻤으니 말이다.
“하하. 그래요? 그건 대단하네요. 흑웅 님께도 수고하셨다고 전해주세요. 그래서 검은 곰 기사들은 계속 남쪽에 남는 거죠?”
“아? 그건 아무래도 그렇지? 당장 북쪽보다 이곳이 더 바쁘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렇고. 그리고 이 녀석들이 아예 마을에서 자리를 잡아버렸어. 우리 마을이 마음에 드나 봐.”
그래. 마음에 들 만하지. 기본적으로 미녀들이 즐비한데다 전사인 그들이니 당연 인기 만점일 것이다.
게다가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많은 환경.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