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심지어 그 미녀들은 상대의 외모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선천적 노안인 히센이나 대머리인 릭스터까지 쉽게 짝을 구한 것만 봐도 그렇다.
“음, 그래요? 뭐, 그건 그렇게 해주세요. 어쨌든 선물은 잘 받았어요. 아 참, 그리고 그 듀발은 잘 지내나요? 이 녀석이 전혀 소식을 전해주지 않아서요.”
“아, 허약한 꼬맹이? 큭큭. 그놈이야 잘 지내지. 요즘 종일 실전이야. 린을 타도한다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지금 백랑 님이 허약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무슨 일인지 알 만하지 않나요? 게다가 이제 거의 다 컸는데 꼬맹이라니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린은 듀발을 허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을 꺾을 때까지 영원히 허약이라고 부를 거라나?
린이 자꾸 그렇게 부르자 주변 사람들도 듀발을 허약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는데 사실 그것도 듀발에게는 굴욕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저 백랑이었고.
악감정을 가질 정도는 아니지만, 허약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의지를 다질 정도의 원한은 쌓이고 있을 것이다. 아마 끊임없이 훈련할 수 있는 원동력 중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타도 린이라. 예전 같았으면 어린 여자아이한테 그런다고 타박했겠지만, 요즘은 뭐, 그렇게도 못 하겠다. 린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야지.
진짜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이길 수 있으려나?
“그렇게 궁금하면 마을에 한번 들러. 부족민들도 영주님을 기다린다고.”
하여간 은근히 자신을 환영하는 부족민들이었다.
아마 5년 전 마수 범람 때 자신이 끝까지 남쪽에서 부족의 예비 전사들이랑 함께 싸운 것이 호감으로 다가간 거겠지?
“그래요. 어차피 영지의 점검 차 각 마을을 순방할 생각이었으니까요. 아, 물론 이번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여름에나요.”
모야족 마을은 당연히 여름에 들를 생각이었다.
후후. 드디어 가보는구나. 모야족의 풀장.
여름마다 그곳에 들르는 마을 총각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야말로 끝장이라던데, 정말 기대된다.
습관적으로 헐벗은 처자들이나 몸에 완전히 밀착된 얇은 가죽 내의만 입은 여성들이 물에 젖어서…….
당연히 그림의 떡이었지만 보는 즐거움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존, 그리고 백랑과의 대담을 마친 로빈은 바로 루이를 찾아가 남쪽 관문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실히 마무리 지었다.
그 뒤로도 로빈은 계속 바빴다.
우선 영주 성내 신전이 들어올 자리를 알아봐야 했고, 우버 마을 신전 터도 찾아봐야 했다. 게다가 각 물자의 관리 상태까지 확인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물론 기본적으로 지온의 일이지만 마지막 확인만은 영주인 로빈이 해야 했다.
특히 우버 마을 같은 경우는 마을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넓은 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건물의 특성상 식당가나 여관 근처에 위치한 게 유리해 그쪽을 알아보다 보니 더 구하기 힘들었고.
그래도 영지에 새로운 스타일의 유흥업소가 들어오는 건데 술집 거리랑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효율이 떨어져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장사 잘 하고 있는 근처의 영지민을 쫓아낼 수도 없었으니 곤란할 수밖에.
그나마 때마침 영주 성 쪽으로 시집오는 딸을 따라서 온 가족이 다 같이 이주하는 가족과 모야족 마을로 이사 가는 가족이 있어 몇 번의 조율 끝에 제법 넓은 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조율해 준 건 당연히 이곳을 관리하는 지온의 친구 류네였는데, 몇 년간 마을에서 명망을 잘 쌓아놓았는지 사람들이 순순히 그의 뜻에 따라주었다.
덕분에 로빈도 영주가 되자마자 강제권을 발동시키는 꺼림칙함을 피할 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강제로 명령하는 것보다는 원만한 방향으로 서로 합의하는 게 더 나았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일은 문제없이 잘 풀린 셈이었다.
“하, 무슨 일이 이렇게 많아?”
다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때와는 달리 잡무가 생각보다 많아서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오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카인이 노는 모습만 봐와 이 자리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나 보다. 그는 그만의 연륜으로 일을 최소화해 왔던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앞으로 당분간, 아니 상당히 오랫동안 이 영주 직을 로빈이 담당해야 했다.
왠지 로빈도 역대 가주들이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 아이부터 만든 이유를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 * *
영주 성 한쪽에 넓은 터를 닦고 기초적인 공사를 마무리 할 무렵.
남부 관문에 치안대가 자리를 잡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혼 래빗 사육장을 완전히 둘러싼 새로운 목장에 루터카우를 밀어 넣기 위해 모야족 전사들과 기사들까지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그 무렵에 황도에서 배편으로 출발한 봉사의 교단 식구들이 무사히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로빈도 황도에서 교단 식구들이 출발한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다.
다만 주노와 이야기가 잘되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생각보다 급했는지 사전 조율 없이 바로 이전부터 진행하겠다고 해 조금 의아하긴 했었다. 적어도 뭔가 바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디에 어떻게 신전을 지을 거며,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는지는 그쪽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일 텐데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이전하겠다니 이상할 수밖에.
하지만 그들이 에이스임은 분명했고 영지의 수뇌부들도 은근히 반기는 분위기라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좀 과한 걸 원한다고 해도 웬만하면 그냥 들어주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우버 마을 항구에서 그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로빈은 드디어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봉사의 교단 대사제를 만날 수 있었다.
“여신을 섬기며 봉사하는 첫 번째 종, 줄리에타라고 합니다.”
“사랑과 봉사의 여신을 섬기는 교단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레이츠 영지의 영주, 로빈 그레이츠 자작입니다.”
대사제 줄리에타는 예상과 달리 3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교단의 특성, 그리고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사제의 신성력은 마나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신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사제들은 신성력이 높을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그건 사랑과 봉사의 교단뿐만 아니라 모든 교단에서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우리 도리아 여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벌써 나이가 40대 후반에 접어들었음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3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였으니 마나의 효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나보다 효과가 더 탁월한 신성력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제란 사람이 저렇게 평범하니 로빈으로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그래서 혹시 나이가 많은데 젊어 보이는 건가 싶어 나이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초면에 그런 실례를 범하기는 좀 어려웠다.
어떻게 궁금증을 풀 수 없나 싶어 그냥 그녀를 살펴보는데.
이름: 줄리에타
성향: 자애. 포용. 음란
타이틀: 대사제(SR). 신성력 봉인(??)
딱 신성력을 봉인하고 있다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사정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성력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이어가려는데 뒤따라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대략 50여 명 정도 되는 젊은 처녀들이 배에서 내렸고 그 뒤에 아이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몇 살인지 정확히 추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성장기에 접어들지 않은 것이 분명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응? 잠깐, 저게 뭐야?
처음에는 그저 몇 명 정도일 거라 예상한 아이들의 행렬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00명을 지나 200명… 그리고 그 후에도.
저 배가 물론 상당히 큰 상선이긴 하지만 저 정도 인원을 어떻게 실어왔는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인원이었다. 저 정도면 분명 물자가 실리는 칸에도 사람이 타고 왔음이 분명했다.
로빈이 잠시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줄리에타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머쓱한지 슬쩍 그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녀 자신도 이 상황이 좀 어이없다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 저게 다 교단 식구들이라고?
어쩐지 군말 없이 이전한다고 하더니 저런 함정 카드가 숨어있었군. 작은 교단에 불과한 봉사의 교단에 왜 그렇게 넓은 부지가 필요한가 의아했는데 저것 때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군식구(?)들을 핑계로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야겠다. 처음부터 웬만한 건 다 받아들일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퀘스트 놈이 넓은 부지를 확보하라고 한 것도 당연히 이거 때문이겠지?
물론 수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대동할 줄은 몰라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저런 게 더 나았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제대로 된 교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린아이들을 잘 돌보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음… 생각보다……. 뭐, 어쨌든 환영합니다. 저 아이들은 교단의 식구들인가요?”
“네,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피곤하실 테니 우선 자리를 옮기죠.”
이건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주노를 탓해야 하나?
생각보다 숫자가 많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은근히 말을 얼버무리더니 이거야, 원.
아무래도 다음에 만나면 앞으로는 무조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하긴 해야겠다. 은근히 사람 좋은 주노가 저 많은 아이의 사정을 전해 듣고 혹시나 해 말을 줄였음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딴에는 군식구가 너무 많아서 뒷말이 나올까 걱정되어서 그랬나 본데, 지금 이 일이야 상관없지만 만약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좀 곤란했다.
그나저나, 저 많은 아이를 다 어디서 재우나?
당장 영주 성까지 데려가는 것도 그렇고. 미리 알았으면 어떻게 준비라도 했을 텐데 조금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또 황도에 남아버리다니. 떠넘기는 스킬이 아주 예사롭지 않았다.
다행히 우버 마을의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흔쾌히 잠자리를 제공하고 나섰다.
하긴, 그냥 얼핏 봐도 대단히 귀여운데다가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방끗방끗 웃고만 있는 이 여자아이들을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처럼 살기가 각박할 때도 인심만은 괜찮은 편인 이곳이었는데 요즘처럼 풍요로울 때는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렇게 아이들을 모두 챙긴 후에야 편하게 줄리에타 대사제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원래 교세가 대단한 교단들은 교왕과 추기경, 성녀, 그리고 대사제가 모두 존재하지만, 이곳 봉사의 교단은 오로지 대사제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 기준은 바로 신성력이었는데, 지금 줄리에타 대사제는 직책대로 대사제급 신성력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훗날 교세에 따라 신성력이 늘어난다면 스스로 교왕을 자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 교왕. 교황이 아니라 교왕이다.
이곳은 황권이 교권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곳이었고 ‘황’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황제 폐하뿐이었다.
하긴 단일 교단도 아니고 무수히 많은 교단이 있는데다가 신앙에 목숨 거는 사람도 없는 세상이니 교단이 제국과 맞먹으려고 하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되긴 했다.
솔직히 소설에서 교왕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말이 된다, 안 된다 하며 독자 간에 사사로운 충돌이 있긴 했다.
하지만 호칭이야 정하고 부르는 사람들의 약속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로빈은 뭐라고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고.
“원래 교단에 저렇게 아이들이 많았나요?”
“네, 각지에서 고아들을 모아 보살펴주는 것도 저의 교단의 봉사니까요. 물론 교리상 여자아이들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요.”
“음…….”
물론 여자아이만 받고 있는 건 좀 미묘하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일을 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다만 교단이 주로 한다는 봉사란 게 그런 것이다 보니 저 아이들이 결국 다 커서……. 흠흠. …할까 봐 꺼림칙한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저 아이들이 다 사제가 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저 아이들이 대부분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교단의 봉사가 취미와 성격에 맞는 일부 특별한 아이들은 실제로 사제가 되고, 어떤 아이들은 사제가 되어도 봉사보다는 새로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단다. 그리고 신전에 남아 그냥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바로 외부에 독립하여 살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