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사실 영주 저에 들어온 이후, 그녀들 역시 따로 외출한 적이 거의 없었다. 누가 막은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럴 계기도 없었고 그녀들 자체도 별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나이가 나이다 보니 지금까지는 굳이 다른 마을에 다녀올 생각을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다만 린이 지금까지 한 번도 모야족 마을에 다녀오지 않은 건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분명 마음만 먹으면 마을에 다녀올 수 있었는데 굳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니.
백랑이야 영주 성에 자주 들르지만, 어머니인 월아가 그립지도 않은 건가?
그렇게 보면 확실히 린이 좀 특이하긴 했다.
“허약이는 실전을 겪어도 어차피 허약이지.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확인해 보겠어!”
“듀발 오빠랑 오랜만에 한 판 뜰 거야!”
끙, 적당히 좀 해라, 이 빌런 같은 녀석들아.
듀발이 무슨 동네북이냐?
확실히 세이라가 린과 어울리기 시작한 건 악수 중의 악수였다. 예전에 실비아랑 같이 어울려 지낼 때는 제법 얌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방방 뛰는 린이나 세이라와는 달리 실비아는 마차 안에서도 조용히 책을…….
그런데 무슨 책을 저렇게 집중해서 보는 거지? 도리아 여사의 말에 따르면 실비아도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없다고 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와서 따로 공부를?
호기심이 동한 로빈이 슬쩍 실비아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을 확인했는데.
『줄리의 황홀한 조언』 제1권 「내 남자를 거칠게 흥분시키는 법」.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미묘하고 어이없는 책인 거 같았다.
아니, 벌써부터 저런 엉뚱한 책을…….
하, 역시 말려야 하겠지?
그런데 줄리라. 왠지 느낌이 좀 싸한데. 에이, 설마……. 그건 말도 안 되지.
이래서야 세이라가 린이랑 어울리는 걸 뭐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흥분된 듯 방방 뛰는 린과 세이라,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책에 집중하던 실비아와 함께 영지 순방이 시작되었다. 물론 실비아는 로빈에게 꿀밤을 맞고 책을 압수당했다.
* * *
대망의 첫 순방지는 린의 기대와 달리 북쪽의 에보니 마을이었다.
이번 순방은 에보니 마을과 북부 관문을 시작으로 우버 마을, 에테 마을을 거쳐 마지막으로 남쪽 요새 마을을 방문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마지막에 모야족 마을을 방문하는 건 역시 일을 대충 마무리 지어놓고 그곳에서 좀 쉴 생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반가운 이벤트도 있었기 때문에 대략 4~5일 정도는 머물 계획이었다.
그리고 린은 그곳에서 1박 2일간의 대수림 탐방도 떠나게 된다. 린에게 최소한의 실전을 경험시켜 주기 위함이었는데 폴과 백랑 모두 지금 린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전문가들이 모두 그렇다니 꼭 필요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백랑이 맡아서 책임지기로 했다.
아무리 엉뚱한 백랑이라도 자신의 딸에게 심한 짓을 시키진 않겠지. 이거 믿어도 되는 거겠지?
마수 부산물과 약초를 채집해 생계를 꾸려가는 에보니 마을.
다만 마수 부산물이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하게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고 결국 주 수입원은 약초 채집에 불과한 마을이었다. 그나마 그 약초가 영지의 주 수입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레이츠 자작령의 마을치고는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바뀌었다.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혼 래빗의 등장이었다.
혼 래빗 가죽을 황도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서 가죽을 만지던 가죽 장인들에게 엄청난 일감이 쏟아져 들어왔다.
솜씨가 투박해 몸으로 때울 이들은 직접 움직여 혼 래빗 사육장에서 도축과 1차 공정을, 대충 작업한 가죽을 이곳으로 옮겨와 전문가들이 2차 공정을 마무리하고 우버 마을로 옮겨 황도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단순히 가죽을 매끄럽게 다듬어 황도로 보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혼 래빗 가죽을 만지다 보면 황도로 보내거나 영지의 기사들이 사용하기 힘든 하등품 물건이 종종 나온다. 그리고 장인들은 그 가죽을 이용해 영지민들이 사용할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편의성 따위는 무시하고 오로지 야릇한 느낌만을 살린 가죽 속옷과 몸에 착 달라붙어 몹쓸 상상력을 부추기는 가죽 바지였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 삼아 만든 물건들이 은근히 입소문을 타며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고, 물건이 뜻밖에 잘 팔리자 당연히 생산량마저 늘어나는 추세였다.
게다가 그 물건을 흥미롭게 살펴보던 주노가 황도에서 하급 마법 공학자들까지 몇 데려와 마을에 정착시키자 다양한 혼종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마법 공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대단한 엘리트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집단이든 쩌리는 있는 법이었고, 야심차게 마법 공학을 공부했지만 성과가 나지 않아 하급 마법 공학자로 빌빌대며 살아가는 자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마법 갑옷을 만들거나 마법진을 손보는 일은 어림도 없고 아주 기본적인 하급 마법만 부여할 수 있어 아무도 찾지 않는 마법 공학자들.
주노는 그런 자들을 싸게 고용해 다양한 물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혼 래빗 가죽이 남아도는 그레이츠 영지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몸에 착 달라붙게 만드는 피팅 마법이 부여되어 안 입은 듯 활동성까지 완벽하게 살린 가죽 반바지와 가슴 가리개는 남쪽 요새 마을 풀장의 인기 덕분인지 마치 수영복처럼 풀장 전용 의복으로 많이 팔려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짧은 반바지와 팬티는 소재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품질은 좋지만 크기가 작아 하급 판정을 받은 가죽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 제법 괜찮은 물건이 많이 나왔다.
솔직히 로빈마저 신기한 마음에 하나 장만해 놓은 상황이었으니 그 인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하급 가죽으로 만든 다양한 물건들이 아주 기초적인 마법만 부여되어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에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중 겨울을 따듯하게 날 수 있게 도와주는 가죽 복대나 시원한 여름을 위한 가죽 쿨매트, 완벽한 방수를 자랑하는 방수 가방은 그 효용성을 인정받은 물건이었다.
다만 이 물건들의 유일한 단점은 수공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가격이 제법 나간다는 거였는데, 덕분에 영지민들의 워너비 아이템, 혹은 나름의 사치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대량 생산은 불가능해 다른 곳에 팔 순 없겠지만 이 물건들이 영지민의 삶을 더 편안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는 있을 거 같았다.
로빈은 바쁘게 북적거리는 공방 거리를 둘러보며 생각보다 더 다양한 물건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특히 용도를 익히 짐작할 만한 진동 마법이 걸린 가죽 막대기나 아래쪽이 훤히 뚫려 도대체 왜 입는 건지 알 수 없는 여성용 가죽 팬티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와……. 이거 신기해!”
“이건… 가지고 싶어요.”
“헤?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야?”
게다가 요 꼬맹이들이 저 가죽 막대기나 가죽 팬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뭔지나 알고 관심을 가지는 건지.
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하게 주의를 준 후, 모야족 마을 풀장에서 두 꼬맹이와 한 소녀가 입을 가죽 내의를 구입하는 것으로 구경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고 해도 요 녀석들이 저런 물건을 사기에는 너무 일렀다. 나중에 성인이 된 이후라면 몰라도 말이다.
마을을 대충 둘러본 후 바로 북쪽 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레이츠 영지의 정체성이자 자존심인 북쪽 관문.
비록 대수림이라는 다크호스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래도 영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 북쪽 관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뚫리지 않게 철저하게 방어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수의 습격이 뜸한 여름철에도 항상 스물이 넘는 기사들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는 없나요?”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렇군요. 많이 힘들겠지만 계속 수고해 주세요.”
영주의 시찰이 있을 거란 통보를 전해 들어서인지 아니면 원래도 군기가 엄정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사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하긴 원래 이곳은 폴의 강도 높은 훈련을 통과한 정식 기사들만 근무할 수 있는 곳이니 아마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마수들의 공격을 받았었지? 그때 그 고릴라 같은 놈을 폴이 한 방에 보내버렸던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옛 추억에 잠긴 로빈은 관문을 살펴보며 만나는 기사마다 말을 걸어 곤란한 점이나 힘든 점이 없는지 묻고 다녔다.
사실 영주가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할 기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특히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기사들은 더욱 입조심을 하고 있을 것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생소한 기사들이었는데 아마 습격이 빈번한 시기가 아니라 신입 기사들을 위주로 배치해서 그런 거 같았다. 그러니 대답 역시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관문의 애로 사항은 폴에게 먼저 보고한 후, 폴이 그중 중요한 사항만 로빈에게 전달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곳에나 특별한 녀석은 한둘씩 있기 마련이다.
“저, 영주님. 애로 사항은 아니지만 건의하고 싶은 건 있습니다.”
“오, 그래요? 뭔데요?”
다들 괜찮다고 하는데 처음 보는 기사가 자신에게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말에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딱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 임관한 지 얼마 안 된 기사 같은데 훗날 곤욕을 좀 치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튀어나올 수도 있어서 로빈도 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에보니 마을에도 봉사의 교단이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음……. 봉사의 교단이라.
이 친구, 이거… 한 번 이상 먹은 놈이었구만.
봉사의 교단이 영지 청년들에게도, 아니 아직은 외지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영지 청년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교단의 인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까지 지부를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무리네요. 차라리 빨리 결혼을 하는 게 어때요? 영지에 처녀들도 많고 기사가 되었으니 충분히 능력도 되잖아요?”
“아……. 네. 그럼 혹시 모야족 여성이랑 만남의 기회라도…….”
“하하. 그래요? 재미있네요. 만약 큰 공을 세우면 제가 한번 나서볼게요.”
“넷!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기사들을 매우 선호하는 모야족 처녀들의 성향상 소개를 해줘도 별 탈은 없을 거 같았지만 왠지 재미있어서 공을 세우면 들어주겠다고 장난을 한번 쳐봤다.
하지만 공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서 근무를 마치고 영주 성으로 돌아가면 쉽게 모야족 여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공장 쪽에서 일하면서 남편감을 찾기 위해 영주 성으로 올라온 모야족 여성들도 제법 되었으니 말이다.
궁수대로 훈련받는 여궁수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고.
다렌이라.
재미있는 녀석이니 이름을 기억해 놔야겠다. 만약 재수가 없어서 정말 짝을 못 구하면 백랑에게 한번 부탁이라도 해봐야지.
어쨌든 북쪽 관문의 관리 상태, 그리고 기사들의 경계 태세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훗날의 위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조금 부족한 거 같은데 어떻게 전력을 보강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직 영주 성에서 폴이 훈련하고 있는 예비 기사들도 남았고 그날을 대비해 무기도 더 비축하면……. 그리고 모야족 전사들 역시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니.
“후, 솔직히 모르겠네. 지금 이 수준으로 문제없이 막을 수 있을지…….”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 봐야 할 거 같았다.
* * *
에보니 마을과 관문을 살펴본 로빈과 일행은 바로 우버 마을로 향했다.
우버 마을은 영지 물류 유통의 메카로 발전해 있었다.
황도에서 들어오는 물건, 그리고 황도에 나가는 물건이 모두 이곳에 모이고, 앞으로 영지에서 무언가를 사갈 사람들도 이곳에서 물건을 구입하게 될 것이다.
어업만으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들이 항구에서 일하거나 물건을 떼어다가 다른 마을에 팔고, 자신의 가게를 꾸리면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마침 황도에서 배가 들어왔는지 번잡한 항구를 살펴보던 로빈은 먼저 가장 궁금했던 봉사의 교단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봉사의 교단 지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신전이라기보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숙박업소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