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다만 술이나 음식을 팔지 않고 숙박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분위기 자체는 그리 산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화끈한 봉사를 받고 근처에 위치한 숙박업소나 술집을 찾아가거나, 반대로 술을 한잔 걸친 후 이곳에서 봉사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거 같았다.
“엇, 영주님? 아가씨!”
사제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상주하던 모야족 전사가 로빈과 린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다른 전사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린을 둘러싸고 말았는데.
“오! 아가씨, 많이 컸네요. 이제 처녀라고 해도 믿겠어요.”
“당연히 아직은 처녀겠지. 아직 성인도 아니라고.”
“아니. 그 처녀 말고, 이 밥통 같은 놈아.”
전사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자 린도 창피했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를 악물었다.
“저기, 아저씨들. 적당히 좀 하지? 지금 주인님도 계시거든? 오랜만인데 이러기야?”
그때야 전사들도 린 옆에 선 로빈을 발견하고 황급히 인사를 건넨다.
참 언제 봐도 정신없는 사람들이라니까. 엉뚱하기도 하고.
방금 들어간 놈이 아무래도 영주가 왔다는 말보다 린이 왔다는 말을 더 먼저 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 남자들은 뒷말을 듣기도 전에 튀어나와서 자신이 같이 온 사실을 미처 전해 듣지 못한 거고.
“오, 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요!”
“아가씨가 평소보다 조용하다 했더니 영주님도 같이 계셨군요. 원래 예전이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달려드셨을 텐데.”
“그러게, 많이 조신해지셨다니까?”
“하긴 이제 벌써 열한 살이야. 조신해질 때도 됐지.”
시작은 분명 인사였는데 다시 이야기는 린에 대한 폭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얌전해진 거면 넌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냐? 그때 넌 기껏해야 여섯 살 아니었니?
어쨌든 소식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튀어나오는 걸 보면 이곳의 경비도 상당히 삼엄하게 유지되는 모양이다. 백랑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전달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문제는 없나요?”
“네, 영주님. 술에 잔뜩 취해 엉뚱한 짓을 하는 놈은 적당히 두들겨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영주님이 그러라고 하셨다고…….”
“아, 예. 그랬죠.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세요.”
“네! 저, 그런데…….”
전사들의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모야족 전사답지 않은 조심스러움에 로빈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고.
대체 무슨 사고이길래 이러는 건지 솔직히 겁이 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큰일은 아닌데요. 어떤 남자가 사제 한 분을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동생이라면서요.”
“그래요? 이상한 일이네요.”
“그런데 사제님도 거부하는데다가 원래 이곳에서 사람을 빼가려면 큰 기부금을 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네, 맞아요. 그렇죠. 그런데 기부금이고 뭐고, 사제님이 거부하면 그걸로 끝일 텐데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워서…….”
“그래서요?”
“그냥 두들겨 패버렸습니다. 지금 한쪽에서 기절해 있고요.”
“끙.”
영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런 일이.
하지만 잃어버린 여동생이라고 주장하는 건 정말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여동생이 맞긴 한 건가?
로빈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바로 사제부터 찾았다.
단아한 외모에 농염한 몸매를 자랑하는 봉사의 교단 사제 히나는 난처한 얼굴로 로빈을 찾아왔다. 로빈도 이곳 사제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라 천천히 그녀의 외모부터 살펴보았다.
청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에 그것보다 더욱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우아한 여성.
로빈이 느낀 히나의 첫인상은 바로 그랬다.
역시 이 세계에서도 청순 섹시, 혹은 베이글 코드는 통하는 건가?
역시 이건 만국 공통이군. 시대도 초월하고.
“오빠가 찾아왔다면서요?”
“네, 영주님.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필요는 전혀 없고요. 그런데 친오빠가 맞긴 한가요?”
“네, 아무래도 제 큰오빠가 맞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히나의 말을 들어보니 좀 어이가 없었다.
원래 히나는 근처 영지에 살던 가난한 농민의 막내딸이었는데 흉년이 들었을 때 입을 하나 줄이기 위해 봉사의 교단 사제에게 그녀를 팔았단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여섯 살이었다나?
어쨌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난데없이 나타나 집으로 돌아가자는 통에 자신도 곤란하다는 것.
자신은 돌아갈 생각도 전혀 없고 기부금을 낸다고 해도 그러고 싶지 않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뭔가 더 석연찮았다.
물론 원래 살던 곳이 이 주변의 영지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다른 영지를 돌아다니는 상인도 아닌 거 같아 더 이상했다.
“이해가 안 되네요.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요?”
“저도 그건 잘…….”
“혹시 히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나요?”
“음……. 그건. 아, 제가 황도에서 일할 때 단골이 몇 계셨는데 그분들은 알고 계시죠. 봉사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교감하곤 하거든요. 그 외에는 딱히…….”
단골이라. 하긴 그런 사람이 있을 만도 하지.
게다가 진득하니 사랑을 나누다 보면 마치 자신이 이 여자의 애인이라도 된 듯 착각하는 이상한 녀석도 한둘쯤은 있을 만했다. 교감을 나눈다는 걸 보니 그냥 단순히 몸을 파는 수준이 아닌 거 같았으니 말이다.
“혹시 그중에 당신에게 기부금을 낸다고 한 사람은 없었나요?”
“몇 분 계셨죠. 인생을 맡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계속 거절했지만요.”
“그 사람들도 히나가 이곳으로 온다는 건 알았겠네요. 단골이었으니까요.”
“네, 그게 예의니까요. 이제 이곳으로 옮기게 돼서 봉사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곳까지 찾아온 고마운 분도 한 분 계셨어요.”
황도에서 이곳까지 왔다라. 이건 뭐, 중증 스토컨데.
왠지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내가 무슨 포주도 아니고 지금처럼 사제의 가족이 나타나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강제로 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사제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했다.
그나마 히나가 나갈 생각이 없다고 해서 다행이지 만약 가족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으면 자신도 그냥 그녀를 놓아줘야 할 뻔했다.
그게 진실한 호소라면 가족에게 돌아가는 거니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더러운 수작이라면 그건……. 생각만 해도 좀 짜증 난다.
원래라면 그 오빠라는 남자를 쫓아내고 자신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내막이라도 한번 알아봐야겠다. 더 이상 이런 귀찮은 짓을 못 하게 말이다.
“그럼 히나 님은 계속 이곳에 있고 싶다는 거죠? 다른 분이 기부금을 낸다고 해도 말이에요.”
“네, 물론 운명적인 분이 나타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은근히 또 로망은 있었군.
하긴 상관없겠지. 그럼 이제 그 오빠라는 녀석을 만나볼 차례였다.
기절에서 깨어난 그 오빠가 로빈을 만나러 왔다.
딱 봐도 ‘나 농민이요’라고 말하는 듯한 녀석이었다. 확실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히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법한 상인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누군가가 이 녀석에게 히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을 것이다.
“히나의 오빠라고요?”
“네. 그렇습니다요. 제발 히나를 풀어주세요. 가족들에게 데려가야겠습니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괴로운 듯 몸을 떠는 남자의 모습이 왠지 어이없었다. 그럼 애당초 사제한테 히나를 팔지나 말 것이지 저건 또 무슨 억지인지. 의도가 뻔해 보여 무슨 말을 더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뭐, 좋아요. 그럼 그냥 기부금을 내세요. 신전에 기부금을 내면 히나를 풀어줄 수 있습니다. 원래 교리가 그러니까요.”
“기부금만 내면 된단 말이죠? 정말입니까?”
“네. 그렇죠.”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남자는 두말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는 당연히 히나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딱 봐도 먹고살기 빠듯한 놈이 기부금이란 말에 저렇게 기세등등해지다니.
역시 연기의 기본도 안 된 녀석이군.
“몇 분 따라가서 저놈이 누굴 만나나 한번 지켜보세요. 특히 돈 같은 걸 받는지도 확인하시고요. 저놈이 돈을 받고 떠나면 돈을 준 남자를 잡아서 데려오시면 돼요.”
모야족 전사들에게 지시를 내렸으니 이제 어떤 놈이 잡혀오는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바보짓인지, 참…….
모야족 전사들이 아까 나갔던 히나의 오빠라는 작자와 덩어리 둘, 그리고 평범하게 생긴 남자 하나를 잡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분에 불과했다.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겠지만 너무 무방비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 덩어리가 혹시나 해 남자가 대동한 용병인 모양인데 아마 히나가 끝까지 거부하면 강제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던 거 같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우선 보기엔 확실히 그랬다.
“다… 당신들,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남자는 갑작스럽게 끌려와서 그런지 많이 당황한 듯 보였는데 저 대사를 저렇게 떨면서 하니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았고.
“댁이 누군지는 관심 없고요. 잠시만 입 다물고 계세요.”
“뭐? 응? 이 꼬마 녀석은 뭐야? 네가 설마 이 덩치들의 대장이야? 이 무슨……. 네 이놈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봤어! 당장 이거 놓지 못해!”
“영주예요.”
“뭐… 뭐?”
“이곳 영주라고요.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길래 알려 드리는 거고요. 그러니까 잠깐만 입 다물고 계세요.”
자신을 영주라고 소개한 로빈의 말 때문인지 남자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좀 꺼벙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왜 저러고 있나 모르겠다.
잠시 후, 로빈의 부름을 받은 히나가 이곳에 당도했다. 그리고 남자를 보고 놀란 듯 눈이 왕방울만 해졌는데.
“이분이에요. 당신의 오라비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 당신을 빼내가려고 했나 봐요.”
“하…….”
로빈의 말에 고개 숙이고 있는 자신의 큰오빠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본 히나는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히… 히나. 난…….”
“부르노 님, 제가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전 지금이 좋다고요. 대체 왜 이러세요?”
히나의 한탄이 남자, 부르노를 자극했는지 그도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냐고? 너야말로 왜 이래? 분명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날 따라올 수 없다는 거야!”
“하……. 그래요, 부르노 님. 사랑하죠. 부르노 님뿐만 아니라 카파 님, 렌다린 님, 그리고 페베 님까지 다 사랑해요. 저의 봉사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들이잖아요. 어떻게 제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뭐… 뭐?”
잽이 아주 제대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대미지가…….
예상대로 제법 대미지가 있었는지 부르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솔직히 너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에 당황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정말 실망했어요. 제 가족까지 끌어들여서 이런 짓을 벌이시다니. 하긴 그 인간들이 저를 찾아올 리가 없죠. 무슨 사과라도 하려나 싶어서 만나줬더니. 제가 바보였네요.”
이번 것도 제법 묵직했다.
실망이라는 단어에 부르노의 표정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히나. 난… 난 그저…….”
“하. 부르노 님, 이제 앞으로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르노 님에게는 정성껏 봉사할 수 없을 거 같아서요. 그럼 앞으로도 평안하시길. 그리고 큰오라버니. 아시겠지만 저에겐 가족 따윈 없어요. 오로지 여신님만 계시죠.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 찾아오지 마세요.”
말을 마친 히나는 부르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나가버렸다. 앞으로 영원히 보지 말자는 그녀의 의도가 아주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제대로 들어갔다. 히나의 보이콧 선언에 부르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으니까.
역시 이런 식으로 흘러가나.
처음에는 찌질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둘의 대화를 지켜보니 저놈은 그냥 순진해 빠진 놈인 모양이다.
좀 딱한 생각도 들었지만, 당사자가 저리도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 방법도 너무 저질이었고.
그나저나 봉사의 사제들은 정말 대단했다.
모든 고객(?)을 사랑할 수 있다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특히 그녀가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을 때의 표정을 떠올려보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그래서 더욱더 무서웠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