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물론 사람이 살 수 있게 집은 지었지만 제대로 된 공사가 들어간 건 아니라 불편한 곳이 제법 있어 보였다. 수도 시설을 따로 만든 게 아니라 위생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고.
영지를 완전히 뜯어고치면서 로빈은 위생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웬만한 소소한 질병들은 청결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데다가 제법 발전한 세계라지만 하층민들은 그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직도 종종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지을 때마다 몇만 골드씩 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영지민을 아끼는 카인과 지온 모두 로빈과 같은 뜻이라 공사가 그렇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로빈의 뜻이 상당히 반영됐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런 무허가(?) 마을이라니. 이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미 지어진 마을이지만 수도 시설을 따로 추가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마법으로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뭐, 좋아요. 하지만 마을을 제대로 정비할 필요는 있겠어요. 앞으로는 이런 소소한, 이게 소소한지 모르겠지만 백랑 님은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연락하지 않으셨겠죠? 어쨌든 이런 문제들도 저에게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끙, 그럴게. 그냥 집만 지으면 괜찮을 거로 생각해서 그랬는데…….”
“틀린 말은 아닌데 목욕탕이나 그런 시설들은 전혀 짓지 못했잖아요? 그런 것도 중요하거든요.”
이 기회에 이곳뿐만 아니라 에보니 마을이나 우버 마을에도 대규모 목욕탕을 설치해야겠다. 영주 성이나 새로 지은 에테 마을, 그리고 남쪽 요새 마을에는 완벽하게 갖춰 놓았는데 그쪽은 다소 미흡하니 말이다.
앞으로 이상한 일도 많이 생기는데 작은 거라도 예방할 수 있는 건 미리 예방해야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좋은 걸 적시에 떠올리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신전 지은 친구들, 지금 마을에 있죠? 다시 그 사람들 좀 써야 할 거 같은데요. 영지에 목욕탕 같은 것 좀 만들게요.”
“응. 그 친구들이야, 뭐. 알았어. 이번 행사만 마치면 바로 보낼게.”
“그래요. 그럼 마을로 가죠. 흑웅은 잘 지내요? 큭큭, 이제 총각이 아니라고 우울해하는 건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 있나. 자기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흠흠. 아니, 뭐. 그렇다고.”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렇다.
이번 남쪽 마을 탐방을 이 시기로 맞춘 이유.
그건 흑웅이 이번에 결혼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예전에 로빈도 봤던 검은 곰 기사단 부단장 하워드의 동생 세나였다.
수많은 모야족 처녀들이 영지의 다른 마을로 시집가는 상황에서 모야족 전사인 흑웅이 부족 외 여성을 아내로 보게 된 건 좀 의아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하긴, 세나 정도면 모야족 여성에 비해서도 전혀 꿀리지 않지.
검은 곰 기사단의 수많은 늑대들의 접근을 필사적으로 막던 하워드였지만 단장인 흑웅이 작정하고 달려들자 결국 세나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단다.
하긴 아무리 오빠라도 직장 상사(?)를 이길 순 없었을 거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했고.
백랑의 말을 들어보니 흑웅이 은근히 거칠게 나갔나 본데 자신이 본 세나의 성품을 떠올려보면 상대가 흑웅이라도 세나가 꿀렸을 거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서로 눈이 맞았으니 저렇게 결혼까지 하는 거겠지.
혼 래빗 사육장과 남쪽 요새 마을은 그렇게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모야족 전사들이 로빈을, 아니 사실은 린을 환영하고 있었다.
“오! 진짜 아가씨다! 하하.”
“아가씨가 다 컸어! 세상에!”
이렇게 제법 큰 린에게 감탄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아가씨를 영주님이 후르릅 하실 날도 멀지 않은 거지!”
“준비된 영주 부인, 린!”
“영주님! 린 아가씨 좀 빨리 먹어(?)주세요!”
등등, 부족의 부족장 딸과 영주의 결합을 격렬하게 원하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와, 이 사람들. 완전히 적응해서 영지민들이랑 어울리며 잘 살고 있는데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한다고?
저 쓸데없이 굳건한 의지는 대체 뭐야? 왜 이런 일에 쓸데없이 열을 내고 있어? 당황스럽게.
린도 당황스러운지 얼굴이 벌게져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씨, 이래서 내가 마을에 오기 싫었는데.”
아니, 너 오랜만에 듀발이랑 한 판 뜬다고 엄청 신나하지 않았니? 빨리 이곳부터 오려 했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네가 도대체 언제 오기 싫어 했…….
아니, 됐다. 그래, 당황스럽긴 하겠지. 게다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이곳에 오지 않은 건 맞으니까.
하여간 예전에 어떤 모습으로 이들과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기 하나는 정말…….
어쨌든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지만 열렬한 환호 속에 무사히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로빈은 우선 가장 중요한 남쪽 요새 부분과 새로 지은 마을의 상태가 어떤지부터 살펴보았다. 우선 일부터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뭔가 놀기 시작하면 일은 더 하기 싫어지는 법이니 말이다.
요새는 정말 튼튼해 보였다. 그간 건축 기술이 제법 발전했는지 오래전에 세운 북쪽 방벽보다도 더 견고해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미연의 사태에도 끄떡없을 거 같았다.
다만 문제는 인력인데.
“수비 병력은 충분한가요? 아무래도 여기저기에 전사들을 차출하다 보니 좀……. 꼭 필요한 일에 동원한 거지만 여기가 제일 중요한 건 또 사실이라 마음도 안 편하고요.”
“응, 영주님. 걱정 마. 여기서 잘 먹고 도끼질만 하다 보니 전사들이 빠르게 늘고 있어. 지금 사방으로 떠난 전사들 빼고도 40명이 넘는다니까. 여전사들도 여덟 명이나 늘었고. 전사가 되는 바람에 그것들이 짝을 찾기는 좀 힘들어졌는데 그건 알아서 하겠지, 뭐.”
“하하. 그건 그렇네요. 어쨌든 그 정도 병력이 지키고 있다니 안심이에요.”
하긴 루이와 월연의 일을 생각해 보면 여전사가 된 모야족 여성들이 제 짝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기사들도 늘어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전체적인 영지 전력이 올라가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의 인력 차출은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닌가 보다.
마을 수비는 괜찮다니 이제 문제는 주술 문양 정도인가? 비축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고 하는 거 같았는데.
“그런데 주술 문양 재료는 충분해요? 원래 성인식 날 모든 부족민이 새기는 거잖아요? 영지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에게까지 문양을 새기려면 재료가 훨씬 많이 들고요. 당장은 괜찮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확실히 좀 그렇지? 거기에 들어가는 리메란이 좀 귀하긴 하거든. 마을 근처에 있는 건 다 뽑은 거 같고. 이제 숲 깊숙이 들어가야 할 텐데 걱정스럽긴 하네.”
“그거 재배는 불가능한 건가요? 루터카우보다 그게 더 급해 보이는데요.”
“음……. 아직까지 한 번도 안 해 본 일이라.”
“어쨌든 영지 전력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거 같으니 좀 신경 써주시겠어요? 그 풀이 대수림에서만 자생하는 거라 따로 구할 방법도 없거든요. 혹시 모르니 저도 대수림 주변 영지에 연락해서 한번 알아볼게요. 미묘한 마취 효과도 있는 풀이라니 영지에서 마취제로 사용한다고 하면 크게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취제는 워낙 비싸니까요.”
“응, 영주님. 이제 루터카우 목장 일도 마무리되었으니 그쪽을 한번 알아볼게.”
루터카우 목장이라.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곤 있는데 뿔은 많이 뽑았나 모르겠다.
뿔 수천 개를 만들겠다고 했던가?
“큭,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뿔은 몇 개나 모았나요? 수천 개 모은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아까 목장에 있던 루터카우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제법 모았을 거 같은데요.”
“훗. 수천 개까지는 아니지만 500개는 넘어. 그걸로 각궁을 만드는 중이고. 우선 여궁수들에게 다 나누어준 후에 영지로 올려 보낼게. 기대하라고.”
“오, 진짜요? 벌써 그렇게……. 대단하네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인간들이 루터카우들을 어지간히 혹사시킨 모양이다.
그 각궁이 벌써 500개라.
늘어난 여궁수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아직도 좀 부족하지만, 이 추세라면 몇 년 안에 상당한 수의 각궁을 치안대에도 보급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것도 어쨌든 마수 소재로 만든 무기라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물론 마수 뼈로 벼려낸 무기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요새를 모두 살핀 로빈과 백랑은 웃으며 다시 마을로 들어섰다. 중요한 사항은 모두 확인했으니 이제 며칠 동안 쉬는 것만 남았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서니 공터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린과 듀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노려보는 건 듀발뿐이었고 린은 그저 희희낙락이었다.
아무래도 갈등을 빚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자마저 저러고 있다니 진짜 못 말리는 녀석들이다.
“아니지. 그래도 내가 먼저지. 언니, 언니랑 먼저 붙으면 힘 다 써버려서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 내가 먼저!”
게다가 거기에 세이라까지 끼어있었다.
아무래도 대련 순서를 정하고 있나 보다. 우리 듀발이 저 빌런들을 상대로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좋습니다. 아가씨부터 하시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듀발이 드디어 대련을 허락했다.
그리고 단단한 방패를 꼭 부여잡은 듀발과 두 자루의 짧은 목검을 든 세이라가 마주 보고 섰다.
이게 뭐라고 또 긴장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역시 선공은 세이라였다.
두 자루의 짧은 검을 들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세이라.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속도였다. 마나의 힘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가속한 것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듀발 역시 세이라의 순간 가속을 한두 번 겪은 것은 아닌지 왼손에 든 방패로 가볍게 일격을 차단하고 바로 비어있는 그녀의 옆구리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전혀 없이 매끄럽고 간결한 동작.
단순히 한 번 검을 휘두른 것뿐이었지만 그 움직임만으로도 지금껏 얼마나 많이,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안목이 부족한 로빈이 봐도 너무나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반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이라의 몸놀림도 만만치는 않았다. 물론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듀발의 검을 피한 후 다시 반대편으로 파고들었으니 말이다.
“햐, 저 꼬맹이 녀석은 진짜 물건이네. 저 녀석이 영주님 동생이라고? 일곱 살?”
“예. 대단하죠? 아직 어려서 그렇지 제대로만 자라주면 정말 큰 인물이 될 거 같아요.”
둘의 공방을 지켜보며 감탄하는 백랑에게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이는 로빈.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듯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소였다.
항상 한 판 붙자고 달라붙는 세이라를 귀찮다는 듯 빌런이라고 표현하는 로빈이지만 그녀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었으니 저런 대견한 모습에 흐뭇함을 느끼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동안 공격하고 막는 거친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라 듀발의 철저한 방어에 세이라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부족한 신체 능력을 마나의 힘으로 보충하는 세이라.
하지만 너무 부족한 체력과 신체 능력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결국 지구력이 부족한 것이다.
훗날 신체적인 능력까지 모두 갖춰진다면 어떤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녀지만 지금은 일곱 살 아이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린과 듀발의 일곱 살을 생각하면 저것도 말이 안 될 정도였지만 말이다.
결국 체력이 다 떨어진 세이라는 듀발의 부드러운 방패 공격에 얻어맞고 주저앉고 말았다. 상대의 체력이 다했음을 알고 있는 듀발이 최대한 타격이 적은 방패 공격으로 대련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어린 세이라에게 나름의 배려를 보인 것이리라.
“에이, 역시 아직 안 되네. 듀발 오빠, 딱 3년만 기다려요! 내가 빨리 클 거니까 그때 보자고요.”
응, 안 돼. 넌 3년이 지나도 겨우 열 살이야, 이 녀석아.
솔직히 3년은 좀 무리고 최소한 성장기에 들어가서 2~3년 있어야 어느 정도의 근력과 체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되어도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였다. 세이라가 성장하는 만큼 듀발도 성장하긴 할 테니 말이다.
오늘 보니 듀발 역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메인이벤트군.”
“그러네요. 흠…….”
세이라가 물러나자 자신의 애병, 린지애를 빼어든 린이 듀발 앞에 섰다. 듀발 역시 세이라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듀발이 이곳에서 훈련할 때 지켜보셨잖아요? 가능성이 있을까요?”
(다음 화에서 계속)